89화. 시작2021.01.03.
라틸은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자신이 들었던 대화를 최대한 정확하게 떠올리려 애썼다. 다행히 하도 충격적인 이야기였다보니 당시의 대화는 물론 그 말을 들을 때의 억울한 감각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오빠는 왜 내가 황태녀가 되게 뒀대요? 아니, 애초에 내가 황태녀가 되도록 밀어준 것도 오빠잖아요! 그때부터 이런 짓을 꾸몄어요?”
“네가 황태녀 자리에 오르기 전엔 후보라고 확신하지 못했대.”
“지금도 로드라 확신하지 못한다면서, 후보라 확신하지 못하는 건 또 뭔대요!”
“레안도 대현자의 제자가 되어서 신전에 간 다음에야 로드의 전조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듣고, 네가 로드일 가능성이 높다 생각하게 된 거래.”
당시에도 이 부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로드 후보라 확신할 수 없는’ 상태였고, 지금은 ‘로드라 확신할 수 없는’ 상태라 했지. 비슷하게 들리지만 전자 때 레안은 라틸이 황제 자리에 오르게 황위를 양보해주었고, 후자 때 레안은 라틸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나라를 위한답시고.
“너인가봐.”
“내가 너에게 보낸 내 편지를 빼돌렸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라틸이 갑자기 멈추어 서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하이신스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라틸은 확 고개를 돌려 그의 회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너였어.”
“무슨 소리지?”
“오빠가 나랑 헷갈린 대상!”
하이신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레안이 너랑 날 헷갈렸다고? 우리가…… 헷갈릴 정도로 닮았나?”
“붙어 있었잖아! 계속!”
하이신스는 정확한 사정을 모르기에 라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라틸이 뭔가를 떠올리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건 눈치챘다. 거기에 레안이 연관되어 있단 것도.
“하. 진짜 미치겠네. 언제부터 꾸민 거야.”
라틸은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깨를 후들후들 떨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도대체 레안이 알게 됐다는 ‘로드의 조건’이 뭐길래…….
‘그래놓고서 하이신스가 날 배신했다고 그렇게 화를 냈다고? 내가 하이신스 때문에 아파하는 걸 위로했어? 자기가 나와 하이신스 사이에 이어진 끈을 싹둑 잘라 놓고서?’
“라틸?”
“오빠야.”
“무슨 소리지?”
“우리 쪽에서 네 편지 가로챈 거. 오빠라고.”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레안 외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하이신스가 보낸 편지를 빼돌리던 시절에는 레안이 황태자였다. 라틸은 신분은 높으나 평범한 황녀였고. 레안이라면 충분히 편지를 빼돌릴 힘도, 감출 힘도 있었을 것이다. 감추어야 할 이유도 있고.
‘내가 로드든 하이신스가 로드든, 오빠는 우리가 결혼하지 못하게 막고 싶었을 테니까.’
하이신스가 로드라면 동생을 위해. 동생이 로드라면 자신의 영역 안에 두고 관찰하기 위해. 라틸은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으면서 하이신스를 보다가 흠칫했다. 하이신스의 표정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런 표정이어서.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 있는데 눈꺼풀은 파르르 떨렸다. 라틸을 볼 때마다 저녁 구름처럼 포근해지던 회색 눈동자는 폭풍이 담긴 듯 위태로웠다. 라틸은 입을 열었다 닫길 반복했다. 그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서. 하이신스가 라틸과 계속 연락이 되었다면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건 라틸도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갈 수 있는 방향은 많았다. 라틸이 아버지에게 부탁해 하이신스를 후원할 군대를 보냈을 수도 있고, 하이신스가 다가 공작의 힘이 꼭 필요하다고 라틸에게 사과하며 작별했을 수도 있다. 좀 더 제대로 된 작별을. 좀 더 마음의 정리가 된 상태에서의 작별을. 어느 쪽이든 몇 년 만에 전해 들은 게 하이신스의 결혼 소식이었을 때보단 나았을 것이다.
“진짜…… 개새끼.”
* * * 좋지 못한 소식 뒤에 좋은 소식이 바로 전해졌다. 손님방으로 돌아가보니 타시르가 보낸 흑림 암살자가 편지를 들고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얼음이랑 근육이도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근육이는 몰랐는데 제가 알려준 겁니다. 가산점 주세요) 가짜가 가자미 님의 어장에 관심을 두지 않게 만들겠습니다. 따로 지시할 일이 있다면 알려주시길. 보고 싶어요 우리 가자미. 라틸이 편지를 멍하니 보고 있자니 흑림 암살자가 얼른 설명했다.
“혹시 이 편지가 유실될 가능성을 생각해 사람 이름은 암호로 대체하셨답니다.”
‘그럼 얼음이 라나문이고 근육이 대신관인가. 어장은 황좌? 근데 나는 왜 가자미야?’
라틸이 도끼눈을 뜨자 흑림 암살자가 괜히 주눅 들며 칼라인의 눈치를 살폈다. 전에 칼라인을 습격하러 왔을 때 된통 당한 모양이었다.
“저…… 가자미 님.”
라틸이 찌릿 쳐다보자 흑림 암살자는 몸을 오그리고서 얼른 말을 이었다.
“수장께서 답장도 암호를 넣어 써달라 하셨습니다.”
“알았다.”
라틸은 힘을 꽉 주어 대답하고서 작은 편지지를 가져다 빠르게 답장을 적었다. -이쪽에도 도움 줄 사람이 둘 있어. 신호를 보내주면 그쪽으로 데려갈 테니, 내가 가짜와 대립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줘. 마차 바지. * * * 이후 라틸은 타시르가 준비를 다 마쳤단 소식이 들려오길 기다리면서 하루하루 달력에 엑스 표시를 해내갔다. 이곳에 있으면 하이신스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들려오는데. 지금은 하이신스 이야기를 듣는 게 더 힘들었다. 이전에는 원망만 하면 됐는데. 지금은 그 사이에 오빠의 계책이 끼어 있단 걸 알아버려서, 더욱 마음이 복잡해진 탓이다. 이 와중에 아이니는 여전히 주기적으로 칼라인을 찾아와서 정말로 자기를 모르겠냐 하고. 이 모든 게 복잡해서, 라틸은 얼른 궁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가서…… 라틸은 눈을 질끔 감았다. 어제. 라트라실 황제의 최측근 호위기사가 흑마법사와 한패란 게 발각되어 쫓겨났단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서넛 얘기겠지. 제 목숨은 무사히 부지할 실력 있는 사람이란 걸 알지만 얼른 자신이 제자리를 찾지 않으면 그도 위험해 질 터였다.
‘시종장은 진실을 알까? 알면서 레안을 돕는 걸까, 아니면…….’
그때.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라틸은 벌떡 일어났다.
‘칼라인인가?’
어디 갈 데가 있다고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돌아왔나? 라틸은 얼른 문으로 달려가면서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하지만 반갑게 문을 열고 보니 찾아온 사람은 황후의 시녀 루이스가 자주 부리는 심부름꾼이었다. 사흘 전. 루이스가 드레스를 고르자면서 라틸을 부른 적이 있는데, 당시에도 이 사람을 보냈기에 얼굴이 기억났다.
“무슨 일이냐.”
라틸이 묻자 심부름꾼은 들고 온 커다란 상자를 라틸에게 내밀었다.
“루이스 님이 사디 양께 빌려드리기로 한 드레스입니다. 사디 양 치수에 맞추어 수선했으니 잘 입고, 파티가 끝나면 천천히 돌려달라 하셨습니다.”
사실 무슨 일이냐고 묻긴 했지만 라틸도 심부름꾼이 드레스를 전하러 온 거란 건 알았다. 알 수밖에 없었다. 심부름꾼이 가져온 상자는 라틸의 허리께까지 올라올 만큼 커다랬으니까. 심부름꾼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가자, 라틸은 상자를 방 안으로 가져와 뚜껑을 열고 드레스를 샅샅이 살폈다.
‘안에 핀 같은 걸 끼워뒀을지도 몰라.’
절대로 좋은 의도로 드레스를 빌려줬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두 시간에 걸쳐서 꼼꼼하게 살펴도 드레스에는 핀이 박혀 있지 않았다. 그 외에 뜯어진 부분이나 찢어진 부분도 없고, 디자인도 라틸이 고른 무난한 디자인 그대로였다.
‘진짜로 사과하려고 드레스를 빌려주는 건가?’
찝찝하게 여기면서도 라틸은 일단 드레스가 구겨지지 않게 펼쳐서 침대 위에 잘 펼쳐두었다. 이틀 뒤면 이곳 축제 파티였다. 파티 전에 타시르가 오면 좋겠지만…….
‘파티 끝나고 올 것 같아.’
* * * 예상대로 이틀 뒤. 타시르가 보낸 사람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축제가 먼저 시작 되었다.
“내가 이 와중에 남의 나라 파티에 참석해야 하다니.”
라틸은 정말로 이곳 파티에 이 모습으로 참석하고 싶지 않았으나, 이미 하이신스의 손님으로 손님용 방에 머무르는 여자 이야기는 사방에 다 퍼져나간 뒤였다. 차라리 한 번 모습을 보여준 다음 호기심을 가라앉히게 하는 게 나았다. 칼라인은 얼굴의 2/3를 가리는 하얀 가면을 착용하면서 물었다.
“하이신스 황제에게는 잘 말해 두셨습니까?”
“어. 파티 때 내 근처에도 오지 말라고 했어.”
라틸은 거울을 보며, 자꾸 무릎 언저리에서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려는 드레스 밑단을 툭툭 걷어차 펼쳤다.
“하이신스가 연회 내내 나한테 관심 없는 모습을 보이면 이상한 소문이 확 줄어들거야.”
“제가 주인 옆에 계속 있을 테니, 소문이 더 잘 줄어들 겁니다.”
“네 옆에 아이니 황후가 안 온다면.”
“……”
“아이니 황후가 다가와서 또 그 슬픈 눈으로 쳐다보면 이번엔 다른 소문이 돌걸.”
안 그래도 아이니 황후가 하루에 한 번꼴로 계속 여기에 찾아오다 보니, 요즘은 ‘사디’와 하이신스에 대한 소문뿐만이 아니라 칼라인과 아이니에 대한 소문도 조금씩 퍼지고 있었다. 다가 공작의 세력이 크다 보니 대놓고 소문이 퍼지진 않지만. 라틸이 볼 때는 칼라인이 요즘 다른 볼일이 있다고 자리를 비우는 횟수가 부쩍 늘어난 게, 아이니를 피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황후가 찾아오는 데 만남을 거부할 수 없으니 아예 다른 곳에 숨어 있기 위해서.
“제 옆에 꼭 붙어 있어 주십시오. 그러면 될 겁니다.”
“응. 우리 둘이 꼭 붙어 있자.”
* * * 파티 내내 둘이서만 붙어 다녀서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틈도 주지 말기로 칼라인과 약속한 뒤. 라틸은 일부러 사람들이 대거 몰려 들어갈 시간에 맞추어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라틸과 칼라인이 연회장 안에 들어가고 시종이 두 사람을 ‘하이신스 폐하의 손님들’이라고 소개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대번에 몰려들었다. 짓궂은 호기심으로 가득 찬 시선들. 탐색하는 시선이 라틸과 칼라인을 하나하나 뜯어 보았지만, 라틸은 모른 척 칼라인과 팔짱을 끼고서 홀 한편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다행히 약속대로 하이신스는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 아이니 역시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써서인지 오늘은 다가오지 않았고. 30분쯤이 지나자 라틸은 조금 경계를 풀고 칼라인과 이런저런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맛있는 음식이라도 배불리 먹고 가야지.’
그러나 막 안심하는 그때.
‘어?’
옆을 지나가던 사람이 라틸의 치맛단을 꽉 밟았다. 그것도 그냥 밟는 게 아니라 힘을 주어서 밟았다.
‘뭐야?’
라틸은 바로 옆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한 번 힘주어 밟았을 뿐인데 치마 밑단이 한 번에 ‘투두둑’ 끊어진 것이다. 발목을 다 덮는 드레스가 무릎 위쪽이 드러날 만큼 댕강 짧아지자,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라틸은 반사적으로 아이니의 시녀들이 몰려 있는 곳을 보았다. 그러자 안 그래도 이쪽을 보고 있던 루이스가 라틸을 보며 빙그레 웃더니 손을 들어 얄밉게 인사하듯 흔들었다.
‘와…… 저거?’
갑자기 드레스를 빌려준다더니 이러려고 그랬구나?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타시르가 꼭 이런 옷을 개발하고 싶어서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으니. 물론 타시르는 자기가 입으려고 했던 거지만.
“저런 식으로 하이신스 폐하를 유혹했나 보네.”
“경박해라. 다짜고짜 다리부터 드러내는 꼴이라니.”
“다들 잘 봐둬요! 저게 폐하를 사로잡은 다리니까!”
처음에는 놀라 하던 주위 귀족들이 곧 낄낄거리면서 경박한 말을 던지고 웃어대기 시작하자, 라틸은 주먹을 꽉 쥐었다. 순간 치솟는 분노로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어찌나 화가 나던지 머릿속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느낌까지 났다. 라틸은 그게 이성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라틸이 완전히 분노에 잠식되기 직전.
“까아아아아아아아아!”
“괴물이야!”
엄청난 비명 소리와 함께 공포에 질린 귀족 남녀가 창문을 부수고 홀 안으로 황급히 뛰어들어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대번에 그쪽으로 쏠리자, 라틸도 덩달아 그곳을 보았다가 화내던 걸 잊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피가 군데군데 묻은 하얀 드레스 차림의 여자. 하지만 누가 봐도 시체로 보이는 여자가 커다란 도끼를 들고 창문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