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가자미와 마약상이 주고 받은 편지2021.01.13.
“따라가도 진짜 괜찮겠어?”
갑작스러운 좀비 사건이 있고 난 뒤. 라틸은 하이신스가 직접 타리움에 와주는 건 무리가 아닐까 생각했으나, 하이신스는 괜찮다고 말했다. 의외였다.
“미안해할 필요도 과하게 고마워할 필요도 없어. 레안에겐 나도 원망할 게 생겼으니까. 레안을 막는 건 내 복수이기도 해, 라틸.”
“네가 자리를 비운 틈에 혹시라도…….”
“오히려 지금은 내가 자리를 비워도 다가 공작은 못 움직여.”
“그래. 그러면 다행이지만.”
* * * 타리움에 가기 위한 사절단이 편성되자, 하인들은 바쁘게 마차에 짐을 싣고 기술자들은 마차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하이신스는 표면상으로 ‘사디를 보내 도움을 준 데 답례차’ 타리움에 가게 될 것이었다. 타리움에선 ‘사디가 누구야?’ 하고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감히 카리센 황제를 내치진 못할 거다. 오빠와 엄마 역시 마찬가지. 두 사람은 ‘사디’가 일이 터지기 전 라틸이 카리센에 보낸 특사인가 아닌가조차 제대로 알 수 없을 테니까.
“기대되시나 봅니다.”
라틸은 테라스에 서서 밖을 바라보다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칼라인이 곁으로 와 있었다.
“넌 인기척이 너무 없어.”
라틸이 구시렁거리자, 칼라인은 라틸의 옆으로 와 나란히 섰다. 칼라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라틸이 바라보던 광경에 멈추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안 그래도 화려했는데 점점 더 화려해져 가는 마차들…….
“이렇게 돌아가면…….”
“음?”
“또 둘이서 여행을 떠날 일은 없겠지요.”
칼라인이 마차를 내려다보는 동안 라틸은 칼라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혹시 섭섭해?”
“자주 와주셔야 합니다.”
“어딜?”
라틸의 시선을 느꼈는지 칼라인도 천천히 라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칼라인은 속삭이는 듯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제게요.”
고막을 간지럽게 만드는 조용한 속삭임에 라틸은 얼굴이 화끈거려서 빠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나 때문에 여기까지 같이 와 준 사람인데. 하녀랑 달아났단 불륜 누명까지 쓰고.”
하지만 자주 올 거란 약속에도 칼라인의 표정엔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가 다시 정면으로 머리를 돌리더니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자, 라틸은 칼라인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혹시 지금 도미스 생각해?’ 묻고 싶었다. 도미스에게 하고 싶은 말들인데, 후궁으로 들어와서 내게 하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해? 그래서 먼 곳을 바라보는 거야? 그러다 라틸은 아이니 생각이 났다. 자신이 칼라인과 전생에 연인이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아이니. 차분하고 침착한 그녀인데, 이상하게도 칼라인과 관련된 일이면 그 이성적인 면이 사라져버렸지.
“아이니 황후가…….”
라틸이 뒷말을 감추자 칼라인이 다시 라틸을 보았다. 라틸은 고개를 저었다. 순간 ‘아이니 황후가 도미스일 확률은 없어?’라고 물을 뻔했다. 하지만 안 된다. 칼라인은 라틸이 도미스에 대해 안다는 걸 모르니까.
“그분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눈치였지요.”
“뭐. 오해라면 오해겠지.”
“안타깝지만 저와 관련된 일은 아닙니다.”
그때. 이쪽으로 오는 발소리가 나서 두 사람은 대화를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 계단을 지나 복도를 건너오고 있었다. 다가온 사람은 아이니의 시녀 중 하나였는데, 근처에 도착하자 라틸과 약간 거리를 두고 서서 말했다.
“사디 양. 황후 폐하께서 그쪽을 만나고 싶다 하셨네.”
칼라인이 아니라? 웬일로? 라틸은 칼라인을 힐긋 보았다. 그러나 칼라인은 그쪽엔 관심이 아예 없단 얼굴이었다. 아이니가 칼라인에게 묘한 관심을 보였다는 걸 이미 아는지, 시녀는 그 반응에 자기가 모욕을 받은 표정이 되었다. 원래 황후와 시녀들은 누구보다도 끈끈한 사이이니 과한 반응은 아니었다. 라틸은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전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 * * 카리센 황후의 방. 안으로 들어서면서 라틸은 방 안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벽과 기둥마다 금박 문양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고, 커튼 역시도 햇볕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금색이었다. 황금으로 만든 촛대는 신들의 저택에 놓여 있어야 할 것 같고, 커다란 거울에서는 윤이 났다. 그리고 그 거울 덕에 두 배로 더 화려해 보이는 샹들리에……. 기분이 묘해졌다. 몇 년 전. 라틸은 이 방의 주인이 자신이 될 거라 믿었다. 의심조차 못 해볼 정도로 당연하단 듯이. 그런 방을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사용하고 있었다. 자신은 그 사람 방에 초대를 받아 왔고. 이렇게 아이러니한 일이 있을까? 사실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내 방이 마음에 드나 보군?”
그러고 있자니 아이니 황후가 물었다. 라틸은 그녀 쪽으로 돌아섰다. 아이니는 긴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연회장에서의 일 때문인지 여전히 안색이 창백했으나 단정한 모습이었다.
“절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대는 신분이 높아. 그렇지?”
라틸은 아이니가 무슨 말을 하려나 기다리다가 깜짝 놀랐다. 뜬금없긴 한데 맞는 말이어서.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자연스럽게 내 질문에 대답을 넘겨버렸으니까.”
“!”
“대답하기 싫은 건 안 하고 살았단 거지. 남들 눈치 안 보고.”
“……예리하시군요.”
“조금 조사를 해 봤는데. 고위 귀족 중엔 ‘사디’란 이름을 쓰는 영애가 없어. ‘사디’란 애칭을 쓸만한 영애도 없고. 그러면 자넨 누굴까?”
칼라인에 관련되지만 않으면 참 똑똑한 사람인데 말이지. 라틸은 혀를 내둘렀다. 어쨌든 찔리는 점을 찔러대니 이쪽도 대응을 해야 했다.
“드디어 제게도 관심을 가져 주시니 영광입니다, 황후 폐하.”
“!”
“자꾸 제 일행에게만 관심을 주셔서 서운했거든요.”
라틸이 방긋 웃자 아이니 황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잠시. 곧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긴장하지 마라. 그대가 누구인지 추궁하려 부른 게 아니니.”
“긴장하긴요. 폐하의 관심을 받을 수 있어 기쁜걸요.”
라틸이 또 방긋 웃자 아이니는 입꼬리만 슬쩍 올려 웃고서 테이블 위에 놓인 과자 접시를 가리켰다.
“앉아서 먹거라.”
“이야기가 길어지려나 봅니다.”
“조금. 하지만 지루하진 않을 거다. 내가 주는 과자는 퍽퍽하지 않고 맛있거든.”
진짜 조금도 안 지는 사람이네. 아이니의 시녀가 라틸에게 준 퍽퍽한 싸구려 과자를 라틸이 아이니에게 그대로 대접한 일이 있다. 아이니가 그 일을 꺼내자 라틸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면서도 일단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말씀하시지요, 황후 폐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칼라인은…… 행복한가?”
“저야 모르지요. 이번엔 일행이 되었지만, 칼라인은 늘 저희 황제 폐하의 하렘에서 지내니까요.”
“그래…….”
아이니 황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라틸은 눈살을 찌푸렸다.
“황후 폐하. 칼라인이 황후 폐하의 말씀처럼 정말 폐하와 전생에 연인이었다고 한들, 전생일 뿐입니다. 황후 폐하는 하이신스 폐하와 결혼하셨고, 칼라인 역시 다른 여자의 연인이 되었습니다. 서로 어긋난 인연인데 왜 계속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라틸은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어차피 내일이나 모레쯤 떠나게 될 테니, 이전보다 노골적으로 솔직하게. 아이니 황후는 씁쓸하면서도 차갑게 웃었다.
“현생의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애달프게 사랑했던 전생의 연인에게라도 매달리게 되는 법이지.”
“!”
“뭐 이런 대답을 원하고 묻느냐?”
“!”
연달아 두 번이나 라틸을 놀라게 한 아이니는 잠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라틸은 아이니가 준 퍽퍽하지 않은 과자를 먹으면서 그녀가 다음 말을 하길 기다렸다. 약 5분쯤 후. 문밖에서 아이니의 시녀가 알현 시간임을 알리자, 아이니는 팔을 내리고 일어서며 물었다.
“지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타리움도 ‘인간이 아닌 것’들 때문에 골머리라지. 시체들이 사라지고 있다던가?”
“…….”
“타리움에 돌아가거든 그곳 황제께 물어봐다오. 그 황제는 칼라인이 설령 사람이 아니라도 사랑할 건지. 계속 행복하게 해줄 건지.”
“사람이 아니라니요?”
“……각오를 묻는 거다.”
물어도 왜 하필 그런 각오를? 아니, 각오 내용도 이상하긴 한데, 왜 굳이 그걸 칼라인과 아무 관련도 없는 아이니가 물어봐 달라는 건지? 라틸은 눈살을 찌푸렸으나 일단 황후가 일어났는데 혼자 앉아 있을 수는 없어서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전해다오. 만약 그만한 각오도 없이 칼라인을 곁에 두려 한다면, 내게 보내라고.”
“!”
* * * 보내서 뭐 어쩌잔 거야. 아니, 하이신스랑 이혼하고 칼라인과 살기라도 하겠단 거야? 라틸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모닥불을 째려보며 혼자 속으로 투덜거렸다. 칼라인 의향은? 칼라인 의향은 무시하겠다는 거야? 아니면 칼라인을 자기 정부로 두겠단 건가? 카리센을 떠난 지도 사흘이 되었는데 아이니 황후가 마지막에 남긴 말이 너무 인상 깊어서인가. 마차를 타고 이동할 때, 식사할 때, 일어나 세수할 때 등등 그녀의 말이 수시로 생각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쨌든 그 말은 칼라인에겐 전해주진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그때.
“아가씨.”
잠깐 볼일을 보겠다면서 풀숲으로 들어갔던 칼라인이 라틸에게 다가와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뭐야?”
라틸이 받아 들자 그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알려주었다.
“타시르가 보낸 쪽지입니다. 답장을 가져가기 위해 암살자가 대기 중입니다.”
타시르? 라틸은 얼른 쪽지를 펼쳤다. * * * 나의 가자미. 어전회의가 열리는 시간에 아트락시 공작님과 로르드 재상님이 판을 깔아두기 시작할 겁니다. 폐하가 어느 시점을 계기로 좀 이상해진 것 같다, 늘 정치에 열정적이셨는데 왜 갑자기 뒤로 물러나고 레안 황자님이 전면에 나선 거냐 이런 식으로요. ‘갑자기?’라는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이전부터 차분하게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카리센에서는 축제 무도회 도중 귀족 영애가 좀비가 되어 나타났다면서요? 이 부근에서는 (물론 오는 길에 정보를 들어 아시겠지만) 마을 사람들이 실종되거나 시체가 사라지는 사건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틀라 황자가 정당한 황제였다고 수군거리고 있지요. 황제가 바뀌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라고요. 오시는 길에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불쾌해지셨을까 염려되지만 조금만 참아주세요.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틀라 황자 이야기가 쏙 들어갈 테니까요. 폐하야말로 ‘바뀐 황제’가 아닙니까. 하지만 이 모든 걸 위해서는 타이밍이 제일 중요합니다. 아시지요? 며칠에 오실지 알려주세요. by. 그대를 사랑하는 남자 중 제일 섹시한 누군가가 * * * 왜 다른 사람들은 다 암호를 벗어났는데 나만 계속 가자미인지? 닷새 이내로 도착. by. 가자미 소리에 불쾌해진 누군가가. * * * 나의 가자미는 편지가 짧네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지느러미로는 펜을 들기 어려우니까요 (웃음) 닷새 이내로 도착하신다니, 그러면 여유 기간 이틀을 잡아서 오늘로부터 (제가 편지를 쓰는 시점. 15일입니다) 일주일 후 어전회의를 결전의 날로 하겠습니다. 아, 일정에 변경이 없다면 답장은 더 안 하셔도 됩니다. (하트) P.S. 가자미가 마약을 좋아한단 연구 결과가 나왔답니다. 이거 참 무서운 세상이지요? by. 마약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