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계획은 조금씩 어긋나기 마련2021.01.17.
수도에 도착하기 전날. 라틸과 하이신스, 칼라인 셋이 모여서 어떤 방식으로 내일 어전 회의에 등장해 가짜들을 몰아세울지 의논했다. 그렇게 머리를 굴린 결과는 이랬다. 일단, 외국 황제로서 어전 회의에 들어간 하이신스가 사디 일로 고맙다고 기초를 깔아둘 것. 그러면서 ‘특사 사디’의 존재를 높이 띄우고 온갖 칭찬을 다 해서, 그들이 ‘사디’가 등장했을 때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지 못할 분위기를 만들 것.
“분명 가짜랑 오빠는 당황한 걸 감추고 어영부영 넘어가려 할 거야.”
여기서 두 갈래. 그들이 사디에 대해 아는 것처럼 말하면, 하이신스는 ‘마침 사디를 데려왔다’ 말하고 라틸은 앞으로 나아간다. 만약 그들이 사디에 대해 모른단 태도를 고수하면, 하이신스가 사디 이야기를 들어보자 제안하고 라틸이 앞으로 나아간다. 어느 쪽이든 라틸은 망토로 얼굴을 가리고 등장할 거고, 옆에는 칼라인도 망토를 쓰고 나올 것이다.
“그러면 레안과 가짜가 네게서 정보를 얻기 위해 온갖 말을 하겠지.”
“내가 적당히 듣다가, 눈치껏 수상하다고 두 사람을 몰아갈게.”
“그러면 당황해서 오히려 네가 더 이상하다고 몰아갈 거야.”
“그때 내가 망토를 딱! 벗으면서 외칠 거야. 당연히 모르겠지! 너희는 내가 아니니까! 이렇게.”
“저도 그때쯤 망토를 벗겠습니다.”
그걸 본 사람들은 수군대며 당황하겠지만, 미리 약속한 대로 대신관이 나서서 라틸은 기운이 맑다고, 절대로 흑마법사가 아니라고 바람을 잡을 것이다. 칼라인 역시 라틸이 진짜가 맞다고 옆에서 증언할 거고.
“이번에도 아니라고 반박할 거야. 당연히 그러겠지.”
“그때 내가 네 이야기를 할게. 네가 몸이 아프다고 자리를 비웠을 당시, 사실은 흑마법사 관련된 일을 의논하기 위해 나와 함께 있었다고.”
라틸은 타시르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다른 나라 사람 말을 어떻게 믿냐’고 반박하면 이때 타시르가 나서서, 나랑 자기가 둘이서 데이트를 자주 했으니 두 사람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달라고 할 거야. 당연히 내가 뭔 말을 하든 내 편을 들 거고.”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면 거기에 대고 라틸이 마지막 쐐기를 박으면 된다. 그러면 일이 잘못되어도 이전처럼 일방적으로 쫓겨나진 않을 터였다. 일이 잘되면 진짜란 걸 확인받을 수도 있을 테고. 의논을 끝낸 뒤. 하이신스는 잠자리에 들러 갔으나 라틸은 괜히 이불보만 만지작거리다가 야영장 밖으로 나와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러고서 끊어질 듯 말듯 흘러가는 개울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새 온 건지 칼라인이 다가와 옆에 앉았다.
“내일이면 원래 자리를 되찾으시겠군요.”
“생각처럼 안 될 수도 있어.”
“그래도 최소한 궁전에서 주무시겠지요.”
라틸은 개울물에 손가락을 넣어 흔들었다.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물길은 금세 끊어져 버렸다. 칼라인은 그걸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황후폐하께서 연루된 일이란 걸 밝히실 겁니까?”
라틸은 물길에서 손을 뗐다. 다시 물이 흘러가자 라틸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게 문제였다. 처음 카리센을 출발할 때는 아이니의 말이 계속 생각났으나, 타리움으로 가까워지자 라틸은 내내 엄마 생각만 계속했다. 오빠는 얼굴을 드러내고 일을 진행했으니 이 일에서 절대로 빠져나갈 수가 없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엄마는 얼굴을 감춘 채 일을 진행했으니, 라틸과 오빠, 칼라인 이렇게 셋이 입을 다문다면 이 일에 연루되지 않은 거로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공범이란 걸 밝힐지 덮을지. 그리고 라틸이 거기에서 낸 결론은……. 라틸은 시무룩해서 대답했다.
“……아니.”
“레안 황자가 가만히 있을까요?”
“어차피 이 일에 엄마를 끌어들인 건 오빠잖아. 가만히 있겠지. 있어야지.”
* * * 마침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하이신스가 어전 회의에 참석할 때, 라틸도 카리센 사절단 틈에 섞여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는 계획 그대로였다. 혹시 망토를 벗어보라고 할까 염려했으나, 근처에 하이신스가 서 있어서인지 다행히 그런 요구도 받지 않았다.
‘이제 내 자리로 돌아간다.’
대리석으로 만든 격자무늬 바닥을 걸어가 사절단 틈에 선 라틸은 황제의 자리에 앉은 엄마와 그 옆에 선 오빠를 너무 노려보지 않기 위해 망토 안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어전 회의 중간에 끼어든 것이기에 이미 모일 사람들은 다 모여 있었지만, 대신과 관리들 모두 하이신스 쪽만 쳐다보느라 그 누구도 이쪽으로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아직은.
“고맙단 이야기를 하러 이 먼 길을 와 주었다고요, 하이신스 황제.”
“네. 타리움 황제께서 보내준 특사 덕에, 연회 도중 벌어질 뻔한 사달을 막았지요. 고맙습니다.”
“소문을 듣긴 했지만 정말이었군요. 그래도 직접 오진 않아도 됐는데요.”
“잘못했다간 카리센의 귀족들이 전멸할 뻔했습니다. 사절단을 보내는 것보다 직접 오는 편이 고마운 마음을 드러내기에 더욱 좋을 거라 여겼지요.”
적당히 대화를 이어 나가던 하이신스가 마침내 미리 계획한 대로 ‘사디’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끌고 왔다.
“사디 양은 굉장하더군요. 다들 좀비를 보고 두려워하는 와중에도 홀로 앞으로 뛰어가 죽은 황자와 겨루길 전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죽은 황자가 맞았습니까?”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이 다 보았습니다. 일을 마친 후에도 사디 양은 굉장했지요. 하지만 너무 겸손하다 보니, 자꾸 자기 공을 감추더군요. 목격자가 너무 많아서 감춘다고 감춰질 공이 아니지만요.”
가짜가 ‘사디’보다 죽은 황자 쪽에 더 관심을 보이는 바람에 잠시 말이 다른 방향으로 갈 뻔했지만, 하이신스는 약간 억지스럽게라도 화제를 도로 사디로 돌려두었다. 그러고서 사디를 데려왔단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라틸도 심호흡하며 나설 준비를 하는데, 레안이 옆에서 화제를 또 바꿔버렸다.
“아이니 황후께선 괜찮으십니까? 좀비가 되어 나타난 사람이 듣기론 아이니 황후님의 절친한 시녀라던데.”
하이신스는 사디를 데려왔단 말을 하려다가 잠시 주춤하였지만, 곧 대답과 섞어서 사디를 또 화제로 끌고 왔다.
“사디 양 덕분에 무사합니다.”
“아이니 황후께서도 대단하시군요. 이전부터 죽은 헤움 황자 이야기를 계속했다 들었습니다. 한발 먼저 이상한 기류를 눈치채다니. 영민한 분입니다.”
하지만 또 레안이 화제를 아이니로 돌려버리자, 하이신스는 그 질문은 흘려 넘겨 버리고 그냥 대놓고 사디 이야기를 또 꺼냈다.
“사디 양을 데려왔습니다.”
이쯤 되면 누구라도 하이신스가 사디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어 한단 걸 눈치챘을 것이다. 이 때문일까? 레안도 웃으면서 대놓고 그 점을 지적했다.
“지금은 흑마법 관련한 일을 말하고 싶습니다. 더 중요한 일이니까요.”
이대로라면 자연스럽게 소개받아서 나서긴 어렵겠다 싶자, 결국 라틸은 그냥 저벅저벅 자기가 중앙으로 가버렸다.
“사디입니다.”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등장이 계획보다 조금 부자연스러웠지만, 레안이 자꾸 사디 이야기를 아예 묻어버리려 해서 어쩔 수 없었다. 하이신스 황제와 레안 황자가 주고받는 말에 집중하던 사람들은 사디 본인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당황해서 수군거렸다.
“저 여자,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왔어요.”
“겸손한 사람이라 안 했나요? 공을 내세우려 하지 않는다고?”
“자기 어필이 굉장한데요…….”
라틸은 민망했지만, 꾹 참고서 레안을 보았다. 하이신스가 얼른 옆에서 말을 보태주었다.
“사디 양입니다.”
그러나 레안은 이번에도 예상외로 굴었다. 사디가 정말 라틸의 특사인지 아닌지 정보를 얻으려 질문하는 대신 그냥 대놓고 꾸짖은 것이다.
“무엄하군. 들어가라. 지금은 그대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몇 가지 질문을 받은 다음 레안을 수상하다고 몰아갈 생각이었는데.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 멋대로잖아? 라틸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그러나 들어가지 않았다. 생각과 계속 다르게 돌아가고 있긴 하지만, 모처럼 잡은 기회인데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대신 라틸은 ‘하하하’ 일부러 큰 소리로 웃고서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새로운 사람 만나길 싫어하시는군요, 레안 황자님.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러신가?”
그러고서 ‘무례하다’는 호통이 들려오기 전에 확 망토를 옆으로 내리쳤다. 망토가 바람에 날아가듯 옆으로 훅 떨어지면서 자신의 모습이 파격적으로 드러나게 하려고.
‘젠장.’
그러나 망토가 벗겨지지 않았다. 한 번 펄럭이고 도로 제자리로 돌아올 뿐. 라틸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이젠 망토까지 말을 안 듣네.
“굉장히 자기 어필이 심한 사람이네요.”
“바람 효과를 스스로 내다니. 안 민망할까요……?”
“저건 무슨 연출인가요?”
사람들이 더 수군거리자 레안이 의심을 지우고 미간을 찌푸렸다. 가짜 역시도. ‘저 멍청한 건 뭐지?’ 생각하는 표정들이었다. 민망해진 라틸이 그냥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때. 슬그머니 옆으로 와 섰던 칼라인이 라틸의 망토 모자를 직접 천천히 벗겨주었다. 민망한 마음이 최고조에 달한 라틸은 ‘아직 안 돼!’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이미 손길이 모자에 닿아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입술을 꽉 다물고 눈에 힘을 줄 뿐. 가면은 이미 벗고 왔기에 망토를 벗자 바로 라틸의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자 사람들은 수군대던 걸 멈추었다. 그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눈은 커다래지고 입술은 그보다 더욱 커다래졌다. 눈동자가 라틸과 가짜 황제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돌았다. ‘흑마법사가 황제인 척 궁전에 들어온 적이 있다’는 소문은 모두가 알았지만, 사실 소문을 들은 대신들 중 진짜로 라틸을 본 사람은 드물었다. 말로만 들었을 뿐. 그러다 보니 눈앞에서 똑같은 황제 두 명이 대립하자 더욱 기겁한 것이다. 레안은 굳은 얼굴로 라틸을 내려다보았다. 라틸은 아까의 민망함을 잊기 위해 정색하고서 대신관을 불렀다.
“대신관!”
그러자 대기하던 대신관이 얼른 앞으로 나섰다. 라틸은 대신관 쪽을 쳐다보지 않고 레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내 오빠는 날 흑마법사라 몰아갔지. 대신관, 그대 눈엔 내가 흑마법사로 보이는가.”
귀족들의 시선이 대신관에게 몰리자 대신관은 넉살 좋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폐하께선 흑마법사일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기운이 맑으신데요. 제가 선물한 부적 목걸이도 걸고 다니는 분 아니십니까.”
내내 라틸의 옆에 조용히 있던 칼라인도 말을 보탰다.
“옆에서 상황을 다 보았기에 저 역시 이분이 폐하란 걸 압니다. 하렘을 떠난 것도 폐하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이신스가 빙그레 웃고서 라틸의 옆으로 와 섰다.
“레안 황자. 가짜 황제. 라트라실 황제가 아프다고 자리를 비운 사이에 두 사람은 가짜를 세우고 라트라실 황제의 자리를 차지했지요?”
사람들이 더욱 웅성거렸다.
“하지만 그때 라트라실 황제는 사실 나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대들에겐 안타까운 일이지요. 나와 라트라실 황제는 일찍이 흑마법사의 흔적을 남들보다 빨리 발견했기에, 이를 비밀리에 의논하고 있었거든.”
누군가 대신들 틈에서 외쳤다.
“외국인이 하는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저 여자가 그쪽 폐하와 손을 잡은 스파이가 아니란 걸 어떻게 믿냐고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번에는 타시르가 나서더니 사람들을 둘러보며 웃었다.
“저와 폐하는 단둘만의 데이트를 많이 했지요. 폐하께선 모든 후궁들 중 저를 가장 총애하셨기에, 저는 폐하와 둘만의 추억이 많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두 분 폐하의 기억을 시험해 드릴 수 있습니다.”
가짜 황제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라틸은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한 발 더 앞으로 나서며 차갑게 좌중을 돌아보았다.
“여기 모인 사람들 중 누군가는 가짜에게 속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가짜란 걸 알면서도 손을 잡았을 거다. 오빠가 가짜 곁에 있으니까. 오빠를 지지하고 싶으니까.”
힘 있고 서늘한 말에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흑마법사들의 위협이 시작되는 시기다. 이럴 때 가짜는…….”
라틸은 손가락으로 가짜와 레안을 가리켰다.
“아무 힘이 될 수 없지.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진실을 살펴라. 진실을 알고서도 덮은 자들은 이 자리에서 선택해라. 짧은 권력을 맛보고 흑마법사들에게 죽을지 말지.”
사람들이 레안과 가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라틸과 가짜가 아닌, 레안과 가짜를 쳐다보았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 아찔했으나 그래도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듯했다. 이상한 점이 있다면…….
‘왜 저렇게 둘 다 가만히 있지?’
저쪽도 저쪽 나름대로 반론을 해야 하는데. 왜 나서지 않는 걸까? 둘 다 말을 잘 하니, 뭐라고 말이라도 잘 해대면 시간을 더 끌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 순간.
“어머니, 제발 그만하세요!”
가짜 황제의 옆에 서 있던 레안이 비통한 목소리로 외치더니, 가짜 황제의 머리카락을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