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폐하, 이건 꼭 아셔야 합니다2021.01.24.
“지금은…… 신전으로 돌아가 주세요. 원래 계시던 곳이요. 어차피 여기에 머무르셔봤자 주위 시선 때문에 힘드실 거예요.”
엉망이 된 어전회의가 파한 후. 라틸은 집무실에 들어가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엄마는 신전으로 돌려보내기로. 엄마가 이쪽으로 오기 전부터 지내던 신전이기에 일부러 그쪽을 선택했다. 물론 또다시 비슷한 일이 생길 걸 염려해 상황을 지켜볼 사람들 역시 비밀리에 같이 보내기로 했다. 라틸은 엄마를 사랑하고 원망하고 안쓰럽게 여겼다. 벌을 줄 수도 용서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오빠에 대한 분노가 가장 컸지만 엄마에 대한 원망도 어느 정도 있었기에, 지금 당장은 엄마와 마주 보면서 지내고 싶진 않아서 내린 결정이었다. 언젠가 마음이 풀리면 다시 함께 지내더라도.
“괜찮겠어?”
그러나 하이신스는 라틸이 너무 무른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닌가 염려하는 모양새였다.
“주범은 레안이겠지만 어쨌든 어머님도 공범이잖아.”
라틸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신전에 보낼 편지를 쓰기 위해 반듯이 종이를 펼쳤다.
“엄마는 칼라인이 용병왕이란 걸 알면서도 날 따라가게 해줬어.”
“레안은? 레안은 어떻게 할 거야?”
“마음 같아서는 아주 콱콱 밟아버리고 싶은데…….”
라틸은 잉크병 뚜껑을 뻑 힘주어 따면서 이를 갈았다. 너무 힘을 준 탓인가. 뚜껑에 살짝 금이 갔다.
“지금 내가 오빠를 공격하는 건 화풀이로밖에 보이지 않을 거야.”
“화풀이면 뭐 어때.”
“난 이미 이복오빠 하나를 죽였잖아.”
“살아났다며.”
“남들은 모르니까. 하여튼 오빠가 죽이게 연기를 해낸 덕에 오빠 지지자들은 오빠가 가엾다고 생각하고 있어. 효자 아들이라 엄마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이런 짓을 한 거라고. 이걸 무시하기엔 오빠 지지자들 숫자가 한둘이 아니야.”
그래도 굳이 처벌을 하자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잘못은 잘못이니까. 하지만 파티 도중 좀비가 나타나고 죽은 황자가 살아 돌아오고 마을 단위로 시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 라틸이 이복오빠에 이어 동복 오빠까지 엄하게 처벌했다가는 나라 분위기가 섬뜩해질 게 분명했다. 이 섬뜩한 분위기와 맞물려 라틸에 대한 안 좋은 루머가 퍼질지도 몰랐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어디로든 화풀이할 곳을 찾아 화살을 겨누게 되어 있으니까. 레안이 한 변명- 이 일을 주도한 건 엄마이고, 자신은 동생을 지키기 위해 중간에서 엄마를 따르면서 라틸을 구했단 그 변명이 먹혀들어 갈 수 있던 것도 오빠가 평소 쌓아온 학구적이고 평화로운 이미지 덕 아니던가. 반면 라틸의 이미지는 오빠와 정반대라 이럴 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라틸은 잉크병을 펜으로 마구 휘젓다가 편지지 위에 쾅 소리를 내면서 펜을 내려놓았다. 까만 잉크가 여기저기 퍼지면서 사방에 검은 자국을 만들어냈다. 그게 딱 라틸의 지금 마음이었다. * * * 이번에는 하이신스가 큰 도움을 주었지만, 그는 오래 머무르진 못했다. 자신 역시도 카리센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 조사해야 할 일들이 한가득이었기 때문이다. 고작 하루를 머무른 하이신스가 돌아간 뒤. 라틸은 도망 다니는 내내 궁금했던 시종장과 유모를 찾았다.
‘과연 두 사람은 오빠한테 넘어갔을까?’
엄마는 떠나기 전 시종장을 두둔하는 말을 해주었다.
“사블레 후작은 처음엔 레안의 뜻에 따르겠다고 했어. 사블레 후작도 네 아버지가 널 조사한 일에 대해 아니까.”
“알고 있었어요?”
“알지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대.”
“…….”
“하지만 사블레 후작은 말은 레안의 뜻에 따르겠다 했지만, 뒤로는 너와 연락하려 애쓰고 있었어. 그게 들통 나서 근신 명령을 받았고.”
엄마가 신전으로 떠난 뒤. 라틸이 따로 알아보니, 과연 시종장은 처음엔 평소처럼 근무하였으나 며칠 뒤, 서넛을 도왔단 이유로 근신 명령을 받아서 자택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서넛을 도운 게 아니라 라틸을 찾은 거겠지만 대외적으로는 서넛 핑계를 사용한 듯했다.
“사블레 후작 근신을 풀어주고, 쉰 다음 몸이 괜찮아지면 내게 오라 전해.”
그나마 다행인 건 유모는 아예 처음부터 휴가를 받아서 이곳을 떠나 있었단 점이었다. 유모는 사블레 후작처럼 회유된 시늉조차 안 할 사람 같았는지, 너무 오래 일을 해 몸이 좋지 않아 보인단 핑계를 대고서 그냥 바로 휴가를 보낸 것이다. 계산해보니 휴가가 끝날 날짜가 멀지 않았기에, 라틸은 유모는 당장 부르지 않기로 했다. 곁에서 늘 바쁘게 지낸 건 맞긴 하니까. 그러나 몸이 괜찮아 지면 오라는 명령과 달리, 시종장은 명령을 받자마자 라틸이 보낸 심부름꾼과 함께 찾아왔다.
“시종장…… 이렇게 바로 오진 않아도 됐는데. 좀 쉬다 오지.”
“내내 쉬었습니다, 폐하.”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서인가.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 좀 뚱뚱해진 시종장을 보며 라틸은 감격해 중얼거렸다.
“하긴. 그건 그래 보여요.”
오빠와 엄마의 배신을 알게 된 후, 시종장도 자신을 배신한 건 아닐까 의심하느라 마음 아팠는데. 마음고생을 했을 텐데도 살이 붙은 모습을 보자 그래도 안심이었다.
“어떻게 하다가 걸린 거예요?”
“레안 황자님이 소스란 경을 감옥에 가두려 할 때, 옆에서 두둔하다가 의심을 샀습니다. 결국 폐하와 접선을 시도하던 것까지 덜미를 잡혔지요.”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날 배신한 게 아니어서 그것도 다행이고요.”
“폐하…….”
시종장이 코를 훌쩍이는 동안 라틸은 자기도 괜히 코가 찡해왔다. 라틸은 얼른 휴지를 뽑아 시종장에게 내밀며 물었다.
“서넛 경은 어디 있는지 몰라요?”
“예. 소스란 경을 만나러 갔다가 황자님에게 붙잡힐 뻔했는데 이후 달아난 뒤로는 행방이 묘연해진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자리를 되찾으셨으니, 이야기를 들으면 바로 오지 않을까요? 시종장이 제안한 말에 라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라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였다.
“사블레 후작,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오빠와 엄마가 처리한 모든 결제안 사본을 만들어서 가져와 줘요. 내 방향과 맞지 않는 게 있다면 빨리 취소해야 하고, 취소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흘러가는진 파악해야 하니까.”
“네.”
시종장이 지시를 받아 집무실을 나가자, 라틸은 이번에는 곧장 타시르를 불러 지시했다.
“마약아. 너는 흑림 암살자들을 시켜서 내가 황위를 찬탈당했다가 다시 찾았단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라.”
라틸은 서넛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런 소문을 내면 서넛은 라틸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제 애칭은 마약으로 굳은 겁니까, 폐하?”
“그리고 오빠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조사해서 보고해.”
“굳은 건가 보네요…… 알겠습니다.”
“마약아.”
“네, 폐하.”
“사랑해.”
라틸이 오랜만에 제대로 재회하자마자 일 얘기만 해대는 통에 좀 서운한 눈치를 보내던 타시르는, ‘사랑해’라는 말에 무슨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사랑해’라고 말한 라틸이 오히려 더 민망할 정도로.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웃더니, 라틸에게 슬금슬금 다가와 옆에 딱 붙어서 간능을 떨었다.
“오가는 비밀 편지 속에 드디어 우리의 사랑이 싹튼 겁니까?”
라틸은 웃고서 아까 책상 위에 올려두고 까 먹던 과자 하나를 집어서 내밀었다. 타시르는 얼결에 과자를 받아 들고서 ‘이게 뭡니까?’ 하는 표정으로 라틸을 보았다.
“상이야.”
“애정이 담긴 상인가요?”
“믿음이 담긴 상.”
솔직히 아까 사랑한다고 한 말은 빈말이다. 빈말이니 쉽게 내뱉은 거고. 게다가 라틸은 타시르 역시 자신을 사랑하는 건 아니라고 확신했다. 라틸이 보는 타시르는 그저 후궁 ‘놀이’ 중인 흑림 수장이었으니까. 하지만 별개로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타시르는 과자를 손안에 쥐고 미묘한 미소를 짓더니 라틸을 물끄러미 응시한 채 입을 열어 과자를 입에 물었다.
와삭와삭 씹어 먹더니 이윽고 눈가에 만족스러운 여우 눈웃음이 올라왔다. 먹이를 받아먹은 길들여진 여우 같은 눈웃음이.
“나름 맛있네요.”
“아, 타시르. 나 그거 봤다?”
“그거라니요?”
“네가 개발하고 싶어 하던 그거. 툭 치니까 홀랑 벗겨지던 옷.”
“!”
* * * 레안이 가지고 있던 가발 모양 마법 아이템. 대단한 연극으로 모든 잘못을 엄마에게 미룬 레안이지만, 그 아이템마저 안 주고 버틸 수는 없었다. 라틸은 레안에게서 그 아이템을 전달받자마자 직접 폐기해 버렸다.
‘이런 건 없애는 게 나아.’
가발을 가위로 싹둑싹둑 자르면서 라틸은 자신이 가면을 얻은 지도. 그 귀퉁이 끝에 있던 숫자 3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런 아이템이 세 개란 뜻일지도 몰라. 그런 거라면…… 조심해야 한다.’
그게 또 레안의 손에 들어가든 틀라나 헤움의 손에 들어가든 위험하다.
‘내가 사람들 속마음을 바로바로 들을 수 있다면 누가 얼굴을 감추더라도 이런 고민은 안 해도 될 텐데. 이 능력은 정말 더 향상할 수 없나?’
그런데 라틸이 막 작업을 다 끝내고서 직접 쓰레받기를 가져다가 흔적을 처리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방문했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났다. 라틸이 화답하는 종소리를 내자 문밖에서 호위가 알려왔다.
“폐하, 아트락시 공작님과 로르드 재상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들어오라 해라.”
라틸은 시계를 확인하고서 대답했다. 두 사람은 라틸이 직접 부른 거였다. 타시르의 말에 따르면 그 둘 역시 이번에 큰 도움이 된 듯했으니까.
“무사히 귀환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폐하.”
“폐하께서 돌아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폐하.”
방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이 앞다투어 인사하자, 라틸은 그들에게 앉으라 손짓하며 공을 치하했다.
“타시르에게 들었소. 그대들이 대신들 사이에서 분위기를 잡느라 많이 애썼다고.”
“신들이 아무리 애썼다 한들, 직접 폐하를 보필한 칼라인 님만 하겠습니까.”
“타시르 님도 폐하를 위해 온갖 상단의 정보망을 동원하며 많이 애썼습니다.”
그러자 웬일로 두 권력자도 자신들의 공보다 타시르와 칼라인의 공부터 치켜세웠다. 그러나 얼핏 겸손하게 들리는 그들의 칭찬을 들으며 라틸은 속으로 웃었다.
‘이 아저씨들, 딱 평민 출신 후궁 둘만 치켜세우네.’
하지만 잘한 일은 잘한 것이기에, 라틸은 그들을 놀리는 마음을 눌러두고 진심으로 칭찬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나도 누가 진짜 내 편인지 알았지. 라나문과 게스타가 내 사람이니, 로르드 재상과 아트락시 공작도 내게는 가족과 같은 사이란 걸 똑똑히 알았네.”
“가족!”
“가족!”
재상과 공작은 가족이란 표현이 마음에 드는지 동시에 ‘가족’하고 따라 외치다가, 서로를 째려보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라틸은 이후로도 몇 마디 더 공치사를 하다가, 더 처리해야 할 일들이 떠오르자 나중에 더 얘기하자고 둘을 내보냈다. 그런데 30분쯤 후. 떠난 줄 알았던 아트락시 공작이 다시 라틸을 찾아왔다.
“아직 안 갔나?”
라틸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아트락시 공작을 들인 후 소파에 앉게 했다.
“무슨 일인가? 급한 일 있는가?”
라틸이 묻자, 아트락시 공작은 목소리를 낮추어 진지하게 말했다.
“폐하. 우리 라나문이 폐하가 돌아오실 때까지 가짜 폐하와는 한마디 말도 안 섞은 걸 아십니까?”
다행히 급한 일은 아니었다. 전혀.
“……그거 얘기하러 왔는가.”
라틸이 황당해서 묻자, 아트락시 공작이 신중하고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다 물어봐도 아실 겁니다. 애가 얼마나 야무지게 대처했는지 모릅니다.”
야무진 라나문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에 라틸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본론은 뒤에 있었다.
“그런데 나원 참. 로르드 재상 아들은 보기엔 순진한데, 보험 들 듯이 가짜 폐하하고도 꼭 붙어서 잘 지냈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