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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전에 사귀었던 사람이야? (100/367)

100화. 전에 사귀었던 사람이야?2021.02.10.

아이니는 요즘 들어서 시녀인 루이스가 자신을 숭배하듯 바라보는 걸 느꼈다. 물론 루이스는 예전에도 과할 정도로 아이니에게 충성을 바치곤 했다. 하지만 좀비 사건 후, 루이스는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16551093256895.jpg“황후 폐하, 혹시 루이스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으세요?”

다른 시녀들조차 의아하게 볼 정도로.

165510932569.jpg“모르겠다.”

이상한 일이었다. 좀비가 나타난 날, 아이니는 도움이 되지 않은 귀족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날 빛이 난 건 발 빠르게 좀비에게 달려간 기사들과 차분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지시하던 하이신스 황제, 그리고 타리움에서 온 특사 두 명이었다. 아이니는 루이스가 대체 어느 지점에서 자신에게 감동 받은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16551093256895.jpg“응? 황후 폐하, 어디 가세요?”

165510932569.jpg“지하 감옥에.”

16551093256895.jpg“또 레들러를 보러 가시는 거예요?”

165510932569.jpg“좀 괜찮아졌나 궁금해서.”

16551093256895.jpg“혹시라도 위험할까 염려됩니다. 레들러는 지금 이성이 없잖아요…….”

165510932569.jpg“괜찮다. 잘 묶여 있으니까.”

여하간에 지금은 시녀인, 정확히는 시녀였던 레들러를 보러 갈 참이라, 아이니는 가벼운 망토를 걸쳐 입고서 방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 지하 감옥으로 들어서자 공기가 대번에 서늘하게 바뀌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발밑에서 돌과 구두 굽이 부딪치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16551093256927.jpg“오셨습니까, 황후 폐하.”

아이니가 지하 감옥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자 간수와 수사관들이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아이니는 손을 들어 화답하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감옥 지하층에는 연회장에서의 사건으로 좀비가 된 기사들과 의사가 갇혀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앙에 갇혀 있는 건 제일 처음 좀비가 되어 나타난 레들러였다. 좀비의 옷을 갈아입힐 사람은 없기에 레들러는 여전히 피 묻은 하얀 드레스 차림이었다. 그녀가 죽었을 때 꽃 무더기 관 안에서 입고 있던 그 차림. 아이니는 슬픈 얼굴로 그쪽으로 걸어갔다.

16551093256895.jpg“위험합니다.”

165510932569.jpg“가까이 가지 않으니 괜찮다. 그리고…… 자리를 좀 비켜줬으면 하는데.”

아이니가 명령을 내리자 간수와 수사관들은 절대로 감옥 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 당부하고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이니는 감옥 앞으로 다가갔다.

165510932569.jpg“레들러.”

감옥 안쪽 창살에는 길게 은을 붙여두었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둠의 종족들은 은에 약하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레들러는 두 손이 천장에 위로 묶인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이니가 가까이 오자 킁킁거리면서 포효했다. 마치 오랫동안 굶은 맹수가 간만에 다른 생명을 앞에 둔 것처럼. 아이니를 위해 부적을 가져다주려던 친구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165510932569.jpg“레들러…… 대체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

이미 친구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아이니는 목소리를 낮추어 묻고 말았다. 대답 대신 레들러는 짐승이 우는 소리를 내며 쇠사슬을 마구 뒤흔들었다. 아이니는 그 모습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다가 끊어질 듯 말 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165510932569.jpg“헤움이야?”

16551093271591.jpg“아이니.”

그 순간.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이니는 ‘악!’ 비명을 지르며 돌아섰다. 그 바람에 등이 창살에 탕 부딪히자 레들러가 더욱 괴성을 질러댔다. 아이니가 앞으로 넘어지려 하자 헤움이 그를 부축해주었다. 아이니는 황급히 그에게서 떨어져 섰다. 헤움은 그 겁에 질린 모습을 고통스럽게 바라보았다.

165510932569.jpg‘들었을까?’

아이니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헤움을 보았다. 분명 들었을 것이다. 바로 뒤에서 이름을 불렀으니. 아니, 그보다 그는 여기에 어떻게 나타난 걸까. 아이니는 경계심을 감추지 않고 헤움을 빤히 보았다. 그런데 헤움이 하는 말이 의외였다.

16551093271591.jpg“칼라인이 누군데 그러지?”

아이니는 움찔했다.

165510932569.jpg“무슨 소린가요?”

16551093271591.jpg“다들 네가 그자를 쫓아다닌단 말을 한다.”

165510932569.jpg“!”

16551093271591.jpg“정말인가?”

헤움의 질문에 아이니는 입술을 실긋거리다 대답했다.

165510932569.jpg“전생에…… 연인이었던 거 같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말이 안 되는 소리이기에 헤움에게 한 번 던져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못 믿을 말이지만, 헤움은 비현실적 존재이기에 오히려 이 이상한 일을 이해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

165510932569.jpg“전부 다 기억이 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 남자를 만난 후부터, 그와 함께한 순간순간이 계속 기억나요. 봉인되었던 기억이 하나씩 풀리는 것처럼…….”

아이니는 헤움의 표정을 살피다가 물었다.

165510932569.jpg“내가 이상해요?”

헤움은 슬프게 웃었다.

16551093271591.jpg“별로 듣고 싶은 얘기는 아니네.”

165510932569.jpg“!”

16551093271591.jpg“하지만 나 같은 존재도 있는데. 전생이 기억날 수도 있지.”

헤움이 레들러가 갇힌 창살 앞으로 가자 비명을 질러대던 레들러가 갑자기 잠잠해졌다. 헤움은 뒷짐을 진 채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물었다.

16551093271591.jpg“그자도 네가 전생의 연인 같다고 그래?”

아이니는 고개를 저었다.

165510932569.jpg“전생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은 전혀 달라요. 그뿐만 아니라 그는…… 전생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해요.”

헤움이 다시 물었다.

16551093271591.jpg“네가 전생 모습으로 다가간다면, 그자가 널 알아볼까?”

165510932569.jpg“모르겠어요.”

그때. 갑자기 헤움이 확 돌아서더니 아이니의 팔목을 잡았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에 아이니는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위층에서 대기 중이던 간수들이 우르르 아래로 내려왔다.

16551093256895.jpg“폐하! 괜찮으십니까?”

16551093256927.jpg“폐하!”

아이니는 펄떡펄떡 뛰는 심장 위를 누르면서 고개를 저었다.

165510932569.jpg“괜, 괜찮다.”

어느새 헤움은 사라져 있었다. 간수와 수사관들이 아이니에게 다가오자, 아이니는 레들러와 잘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을 번갈아 보다가 황급히 계단 위로 올라갔다. 손바닥 안. 꽉 쥔 주먹 안으로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아이니는 감옥을 벗어나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자마자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그곳엔 헤움이 쥐여주고 간 반지가 있었다. 아주 평범해 보이는 반지. 간수들이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그 순간, 아이니는 헤움이 사라지면서 귓가에 남겼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16551093271591.jpg-네가 필요한 모습으로 바꾸어 줄 거다.

그게 무슨 소리일까? 아이니는 주저하다가 지나가던 궁정인 셋이 인사를 올리자 고개를 끄덕이고서 얼른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침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단단히 잠그고 그녀는 여전히 손바닥에 쥐고 온 반지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한참 반지를 응시하다가 그녀는 천천히 반지를 손가락에 끼어보았다. 그 순간. 손의 형태가 변했다. 좀 더 길고 커다랗게. 아이니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움직여 보다가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심장 박동이 목에서 느껴졌다. 거울 앞에 선 아이니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거울에 비쳐진 건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강인하고 아름다운 여자. 그녀가 꿈속에서 본 여자. 자신의 전생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아이니는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누군가 그녀의 뇌에 대고 직접 속삭여 주는 듯 했다.

16551093300158.jpg[네 이름은 도미스.]

165510932569.jpg“내 이름은 도미스.”

16551093300158.jpg[다시 그를 만났을 땐, 네가 도미스다.]

165510932569.jpg“내가…… 도미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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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1093314071.jpg“서넛은?”

16551093256895.jpg“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16551093314071.jpg“오빠는?”

16551093256895.jpg“별 움직임이 없습니다.”

16551093314071.jpg“엄마는?”

16551093256895.jpg“내내 기도만 드리고 계신다 합니다.”

16551093314071.jpg“틀라와 헤움은?”

16551093256895.jpg“흔적이 없습니다.”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대부분의 대답이 모른단 말투성이다. 라틸은 책상 의자에 팔을 괴고 자꾸만 말려 들어가는 서류를 쳐다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시종장이 그 바람에 날아갈 뻔한 서류를 얼른 붙잡고서 물었다.

16551093256895.jpg“어디 가시는지요, 폐하?”

16551093314071.jpg“칼라인한테 갑니다.”

16551093256895.jpg“요즘은 칼라인 님께 자주 가시는군요.”

16551093314071.jpg“가장 어려운 순간에 날 도와줬으니까요.”

물론 다른 후궁들도 많이 도와주었지만 그래도 칼라인은 라틸의 손을 잡아준 첫 번째 후궁이었다. 같이 몇 번이나 야영을 거치면서 도주를 하기도 했고. 아무래도 계속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시종장은 노골적인 라나문 지지자였으나, 이번 사건으로 칼라인에게 고마운 마음이 커졌기에 바로 웃으면서 대답했다.

16551093256895.jpg“그럼요. 칼라인 님은 폐하를 충심으로 모시니 잘 대해 주셔야지요.”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칼라인의 방으로 갔다. 마침 칼라인은 방 안에서 검을 닦고 있었는데, 라틸이 들어오자 바로 검을 내려놓고서 일어섰다.

16551093328023.jpg“주인.”

그가 다가오자마자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 것조차 이젠 익숙해져 버렸다. 라틸은 그의 목줄기를 쓱쓱 쓸면서 ‘우리 늑대, 우리 늑대’ 하고 불렀다.

16551093328023.jpg“이 시간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16551093314071.jpg“뭔가…… 풀리는 게 없으니까 갑갑해서 왔다.”

16551093328023.jpg“나랏일 때문입니까?”

16551093314071.jpg“사람일 때문이다.”

라틸이 소파로 다가가 털썩 앉자, 칼라인이 라틸을 끌어다 침대에 엎드리게 하고는 어깨를 꾹꾹 눌러주며 물었다.

16551093328023.jpg“근위기사단장이 사라져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들었습니다.”

16551093314071.jpg“어. 오빠 명령에 따른 기사들에게 들어보니 추적 중 놓쳐서 자기들도 행방을 모른대. 그리고…… 분명 맞는 말이야.”

16551093314071.jpg‘엄청나게 굴린 후 속으로 애원하는 걸 들었으니 확실하지.’

라틸은 약간 아픈 듯 시원한 듯 어깨를 누르는 손길에 잠이 몰려와 반쯤 눈을 감고서 중얼거렸다.

16551093314071.jpg“그런데 왜 안 오고 있을까. 이렇게 소식 없이 자리를 오래 비울 사람은 아닌데.”

16551093328023.jpg“…….”

칼라인은 말없이 라틸의 어깨와 등, 날개뼈 부근을 시원하게 눌러주었다. 라틸은 점점 더 눈이 감겨와서 잠들지 않기 위해 억지로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16551093314071.jpg“너 마사지 잘하는구나.”

16551093328023.jpg“서넛 경은 무사할 겁니다.”

16551093314071.jpg“…….”

16551093328023.jpg“그냥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요. 그자는…… 주인을 지키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16551093314071.jpg“…….”

16551093328023.jpg“주인?”

16551093314071.jpg“…….”

16551093328023.jpg“주인?”

라틸은 깜빡 잠이 들고 잠결에 카리센에서 아이니와 나눈 대화를 복기했다. 그러다 칼라인이 귀 바로 뒤에서 부르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면서 아이니와 대화하던 도중 내내 떠올리던 이름을 말하고 말았다.

16551093314071.jpg“도미스.”

말을 하자마자 잠이 확 달아나서 라틸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칼라인이 굳어 있는 게 보였다.

16551093314071.jpg“아, 그게.”

라틸은 주저하다가 황급히 둘러댔다.

16551093314071.jpg“미안. 전에 네가 아플 때 잠결에 그 이름을 부르더라고.”

사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잠결에 들은 이름은 맞으니까. 꿈속에서. 칼라인은 굳어 있다가 라틸의 설명을 듣자 어깨에서 힘을 뺐다. 다행히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수상하게 여기는 눈치도 아니고. 라틸은 그를 살피다가 슬며시 물었다.

16551093314071.jpg“전에 사귀었던 사람이야?”

물론 사귀었던 사람이겠지만. 아니, 이 부분은 묻지 말걸. 라틸은 칼라인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더 당황해서 괜히 횡설수설했다.

16551093314071.jpg“계속 불렀거든. 막 도미스! 도미스. 도미스? 도미스! 이러면서. 그래서 궁금했어. 무슨 사이길래 저렇게 애처롭게 부르나 하고. 절대로 내가 과거를 추궁하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러니까 나는 그냥…….”

16551093328023.jpg“사랑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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