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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너는 아니었으면 해 (110/367)

110화. 너는 아니었으면 해2021.03.17.

시녀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16551095685095.jpg“아무 냄새도 안 납니다, 폐하.”

16551095685095.jpg“저도 잘…….”

라틸은 코를 킁킁거리면서 응접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피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이렇게 또렷한데? 하지만 시녀들은 영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볼 뿐. 냄새가 뻔히 나는데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 같진 않았다.

16551095685104.png‘아니, 이 냄새를 다 못 맡는다고?’

라틸이 답답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는 기색도 아닌데 따질 수도 없어서, 라틸은 이번엔 응접실 문을 열고 복도를 살폈다.

16551095685095.jpg“폐하.”

라틸이 잠옷 차림으로 고개를 삐죽 내밀자 입구를 철통처럼 지키고 섰던 호위들이 황급히 양옆으로 물러나며 인사를 올렸다. 라틸은 편히 있으라고 손짓을 하면서 그들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그러나 호위들 역시 피 냄새 따윈 나지 않는단 얼굴이었다. 누군가 다친 것 같지도 않았다.

16551095685104.png“피 냄새 나지 않느냐?”

16551095685095.jpg“예?”

16551095685095.jpg“아니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습니다, 폐하.”

아니, 이 많은 사람 중에 피 냄새를 나 혼자 맡고 있다고? 점점 더 황당해진 라틸은 마지막으로 서넛을 바라보았다. 고생했으니 푹 쉬다 오라는데도 서넛은 괜찮다면서 굳이 이곳에 와 있었다. 라틸은 서넛에게 ‘넌 냄새가 나지?’ 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서넛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

16551095685104.png“!”

라틸은 피 냄새가 서넛에게서 풍겨온단 걸 눈치채고서 질문을 바꿨다.

16551095685104.png“다쳤습니까?”

서넛은 입술을 반쯤 열었다가 도로 닫더니 잠시 망설이다 부정했다.

16551095685135.png“아닙니다.”

16551095685104.png“아닌 게 아닌데요?”

16551095685135.png“정말로 아닙니다.”

16551095685104.png“상의를 조금 들어봅니다. 그쪽에서 냄새나고 있습니다.”

서넛은 주저할 뿐 상의를 들지 못했다.

16551095685104.png“따라옵니다.”

라틸은 혹시 사람들이 주위에 있어서 서넛이 저러는가 싶어서, 일단 서넛을 데리고 응접실로 들어가 시녀들에게 자리를 비켜달라 명령했다. 시녀들이 모두 복도로 나가자 라틸은 서넛에게 다시 지시했다.

16551095685104.png“상의만 벗어 봅니다.”

16551095685135.png“정말로 괜찮습니다.”

16551095685104.png“상의만 벗어 봅니다. 내 앞에서 벗기 싫으면 다른 기사를 시켜 보게 할 겁니다.”

라틸이 단호하게 버티자, 결국 서넛은 하나하나 단추를 푸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상의를 벗더니 한 손에 들고서 양팔을 아래로 내렸다.

16551095685104.png“거봐. 다친 거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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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틸은 코웃음을 쳤다. 심지어 다쳐도 슬쩍 다친 정도가 아니었다. 서넛은 아예 배꼽 위부터 가슴까지 죄다 붕대로 칭칭 감아둔 상태였다. 웬만큼 다쳐서는 이 정도로 붕대를 칭칭 감아둘 리가 없었다. 게다가 가슴 한 부분에서는 이미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고.

16551095685104.png“대신관을 불러서 치료해주겠습니다.”

라틸은 서넛에게 다시 옷을 입으라 하고서 탁자에 놓아둔 종을 치기 위해 그쪽으로 걸어갔다.

16551095685135.png“폐하.”

하지만 서넛이 라틸을 붙잡았다.

16551095685135.png“괜찮습니다.”

16551095685104.png“괜찮긴요. 붕대 감았단 건 처치를 해 놨단 건데, 그 위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게 괜찮아 보입니까?”

16551095685135.png“정말 괜찮습니다.”

하지만 라틸이 종을 치려 하자, 서넛은 아예 제 손으로 종을 막으면서까지 거부했다. 라틸은 황당해서 서넛을 쳐다보았다. 이게 뭐 하는 거야? 그래도 서넛이 손을 치우지 않자, 라틸은 미간을 찡그리고서 그에게 반은 장난으로 써주던 말투를 집어치웠다.

16551095685104.png“허세 부리지 마라. 네가 최선의 몸 상태로 있는 게 내게도 도움이 돼. 대신관은 아프지도 않게 한 번에 치료해 줄 수 있어.”

그러나 라틸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서넛은 버티고 서서 고개를 저었다. 잔뜩 언 표정으로.

16551095685104.png“왜 안 된단 거야?”

이쯤 되자 상처도 상처지만 이유가 궁금해져서 라틸은 대놓고 물었다. 그렇지만 서넛은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리기만 했다.

16551095685104.png“서넛 경.”

16551095685135.png“저는…….”

16551095685104.png“…….”

16551095685135.png“…….”

16551095685104.png“대신관에게 치료 받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16551095685135.png“그런 건 없습니다.”

16551095685104.png“그럼 치료를 받으면 되잖아?”

말을 마친 라틸은 대번에 종을 쳤고, 대기 중이던 시녀들은 지체 없이 바로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서넛과 라틸 사이의 날 선 분위기에 들어와서도 주춤주춤 서서 눈치만 살폈다.

16551095685135.png“제발.”

서넛이 얼어붙은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들릴 듯 말듯 중얼거리자, 라틸은 결국 손을 저었다.

16551095685104.png“나가봐라.”

시녀들이 나간 뒤에도 서넛과 라틸 둘 중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라틸은 눈꺼풀조차 깜빡이지 않고서 서넛을 쳐다보았다. 피부 밑에서 개미가 지나다니는 것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왜 대신관에게 치료를 받지 않는다는 거야? 치료를 받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치료를 받으면 곤란해? 뭐가 곤란한데? 혹시 너…… 흑마법 쪽과 관련이 있어? 라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묻고 싶은데. 반대로 묻고 싶지 않았다. 결국, 라틸은 눈을 도로 뜨고서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16551095685104.png“너도 나가봐.”

16551095685135.png“……예.”

서넛이 절제된 인사를 하고 나갔으나, 라틸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거의 15분 가까이 지나서야 라틸은 느릿느릿 침실로 걸어가 문을 닫고 침대에 엎어졌다.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배로 빨라졌다.

16551095685104.png‘아닐 거야.’

아니어야지. 엄마와 레안에 이어서 서넛까지?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

16551095685104.png‘그래, 그럴 리가 없다. 서넛은 레안에게 반대하다가 위험에 빠지기까지 했잖아.’

그럼 레안이 아니라…… 틀라 쪽이면?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대신관을 불러서 치료를 받게 하면 어느 쪽이든 답이 나올 거 같은데. 차마 검사를 받으라 할 용기가 나오지 않았다. * * * 숙소로 들어가 불을 켜자, 어둠 속에 까맣게 가려져 있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1인용 안락의자에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이는 칼라인이었다.

16551095685135.png“언제 돌아왔습니까?”

하지만 서넛은 그를 보고서도 놀라지 않고 물었다.

16551095818962.png“곧 돌아올 셈.”

칼라인 역시 밤중에 주인의 허락 없이 방에 들어온 이답지 않게 태연히 대답했다. 그러더니 서넛이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거는 걸 지켜보다 중얼거렸다.

16551095818962.png“피 냄새가 나는군.”

서넛은 이번에는 부정하는 대신 솔직하게 대답했다.

16551095685135.png“예.”

16551095818962.png“확실히 아직 약하군.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니.”

16551095685135.png“……폐하께서도 피 냄새를 맡으셨습니다.”

서넛은 옷걸이에 옷을 걸고서도 계속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마지못해 거기서 손을 떼고서 침대 가로 걸어갔다. 그 표정은 몹시 착잡해 보였다.

16551095818962.png“점점 깨어나시는 거겠지.”

16551095685135.png“예.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은데.”

16551095818962.png“더 강해지실 거다. 그뿐이야.”

16551095685135.png“더 강해지시겠지만, 더 많은 적이 생기겠지요.”

16551095818962.png“적들을 분산시키는 데 가짜가 도움이 되길 바라야지.”

서넛은 말없이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칼라인은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의자에서 일어나 서넛 쪽으로 다가갔다.

16551095818962.png“붕대.”

서넛은 라틸 앞에서와 달리 셔츠 안쪽의 붕대까지 순순히 풀었다. 그가 하얀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붕대를 침대 앞에 내려놓자, 엉망으로 헤집어진 상처가 드러났다. 심장 바로 앞쪽에 난 상처는 어느 부분은 치료가 되어 있고 어느 부분은 치료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는데, 그런 부위가 제멋대로 뒤섞여 있어서 몹시 괴이했다.

16551095685135.png“폐하께서 대신관을 불러 절 치료하려 하시기에 거절했습니다. ……절 의심하시는 것 같았어요.”

16551095818962.png“그러게 좀 더 숨어 있으라니까.”

16551095685135.png“그러면 걱정하시잖습니까.”

16551095818962.png“지금도 걱정하실 거다. 다른 의미로.”

서넛이 힘없이 웃는 사이, 칼라인은 자신의 엄지 중앙을 송곳니로 와득 깨물었다. 엄지에서는 바로 적빛의 피가 흘러나왔다. 서넛이 발은 바닥에 붙인 채 상의만 침대 위에 눕자, 칼라인은 그의 헤진 심장 위로 자신의 피를 떨어뜨렸다. 몇 방울의 피를 떨어뜨리자 서넛의 상처가 점점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느리지만 확실한 속도로.

16551095685135.png“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서넛은 손을 뻗어 상처 부위에 칼라인의 피가 더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는 상체를 다시 일으켰다.

16551095818962.png“아직 치료가 덜 됐는데.”

16551095685135.png“상처가 갑자기 다 나아버리면 폐하께서 의심하실 겁니다.”

16551095818962.png“그러던가.”

칼라인은 상관없다는 듯 옷장 문을 열고 그 아래 구급상자에서 붕대와 치료 약을 챙겨 와, 상처 위에 약을 얹고 붕대를 다시 감아주기 시작했다.

16551095685135.png“대적자가 누군진 찾아내셨습니까?”

16551095818962.png“기르골을 주목하고 있지만, 아직 아무도 훈련시키고 있지 않더군.”

16551095685135.png“기르골이 그 사람이죠? 배신자 뱀파이어.”

16551095818962.png“넌 만난 적이 없던가?”

16551095685135.png“네.”

16551095818962.png“최초이자 최후로 로드를 배신한 나이트지. 당대 로드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 나타난 로드들까지 죽이기 위해 대적자를 직접 훈련시키기 시작한 놈이다. 배신자 중에서도 악질적인 배신자지.”

16551095685135.png“아직 대적자를 찾아내지 못한 걸까요?”

16551095818962.png“그러겠지.”

칼라인이 붕대를 다 감고 손을 떼자, 서넛은 벗어 두었던 셔츠에 도로 팔을 꿰며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16551095685135.png“찾아내면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대적자도, 대적자를 길러내는 그자도.”

16551095818962.png“그래야지. 이번만큼은 반드시…….”

  * * *

16551095685095.jpg“폐하. 고민이 있나요?”

라틸은 멍하니 턱을 괴고 있다가 유모의 목소리를 듣고서 얼른 손을 내렸다.

16551095685104.png“어? 아니. 왜?”

유모는 ‘그럴 리가’ 하는 표정으로 웃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장난조로 물었다.

16551095685095.jpg“그럼 각설탕이 왜 그새 반이나 빈 걸까요? 여기 이 통 가득 각설탕을 채워 두었는데 말이죠.”

16551095685104.png“어? 그러게. 이거 다 어디 갔어? 왜 그래? 내가 먹었나?”

라틸이 손으로 입가를 더듬거리며 묻자, 유모는 웃음을 터트리더니 라틸이 입조차 대지 않은 커피잔을 들어 라틸에게 내밀었다.

16551095685104.png“이걸 왜?”

얼결에 받아 한 모금을 마신 라틸은 인상을 찌푸리고서 커피잔을 얼른 내려놓았다.

16551095685104.png“으악. 너무 달아.”

16551095685095.jpg“당연하죠. 폐하께서 멍……하게 앉아서 계속 거기에 설탕을 집어넣고 계셨으니까요.”

유모의 지적에 결국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수긍했다.

16551095685104.png“사실은 고민이 있는 게 맞아.”

유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짓더니, 라틸의 뒤로 와 등을 토닥토닥 쓸면서 자상하게 물었다.

16551095685095.jpg“우리 아가 황녀님은 또 뭐가 고민이실까.”

어린 시절, 라틸이 혼자 괴상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달래줄 때와 같은 목소리였다. 라틸은 저도 모르게 따라 웃다가, 옆으로 올라갔던 입꼬리를 도로 내리면서 시무룩 중얼거렸다.

16551095685104.png“난 서넛이 좋아, 유모.”

그 말에 유모는 웃음기를 싹 거두고서 눈을 커다랗게 뜨고 라틸을 쳐다보았다.

16551095685095.jpg“폐하,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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