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방금 내가 한 거야?2021.03.21.
유모가 뭔가 오해를 한 눈치라, 라틸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어? 아니, 아니 아니, 그런 뜻으로 좋단 게 아니라!”
“깜짝 놀랐어요.”
“깜짝 놀란 건 또 뭐래. 서넛 경 인기 많잖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니, 요즘은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지만. 라틸은 어쩐지 자존심이 상해서 뒷말은 생략했다. 얼굴도 잘생겼고 신분도 좋고, 몸은 더욱 좋다. 게다가 이젠 황제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기까지 하니, 그를 아는 영애들이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저는 서넛 경이 후궁보다는 폐하의 최측근으로 남길 바라니까요.”
“최측근이라.”
라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야 할 텐데.”
“고민이 서넛 경과 관련된 건가요?”
라틸은 차마 ‘서넛에게 수상한 점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나 어디 좀 갔다올게.”
“그러면 호위를……”
“아니. 혼자.”
“위험합니다!”
“괜찮아.”
“하지만 저번에도……!”
“나라면서 나타난 사람이 ‘완두콩 다섯 개랑 땅콩 열 개를 바꾸자’란 말을 안 하면 다른 사람이라 생각해.”
“무슨 뜻인가요?”
“아무 뜻 없어. 뜻 있는 말로 하면 추측 가능하잖아.”
얼떨떨한 얼굴의 유모에게 방긋 웃어 보이고서, 라틸은 얼른 잠옷을 벗고 옷장 가장 아래쪽 서랍을 열어 편안한 검은색 셔츠와 바지를 꺼내 입었다. 긴 머리는 하나로 묶어 돌돌 말자, 유모는 ‘못 말리신다니까’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결국 검은 주머니에 돈을 넣고, 무늬 없는 단도까지 직접 챙겨주었다. 황녀일 때부터 라틸은 고민이 많거나 답답해지면 변복하고서 밖으로 나가 수도를 여기저기 돌아다니곤 했다. 이럴 때는 그리 멀리 가지도 않고 주위만 잘 돌아다니다 잘 오는 걸 알기에 유모도 익숙하게 채비를 돕는 것이었다.
“다녀올게.”
유모의 양 볼에 입 맞추는 소리를 낸 라틸은 평상시 입는 망토를 위에 덧입고서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출입이 금지된 뒷문을 통해서 슬쩍 빠져나왔다. * * *
“아트락시 공작의 장남 녀석이 잘만 돌아다니고 있다던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들려온 소리에, 첼러는 황급히 허리부터 굽혔다. 로르드 재상은 도로 허리를 펴라고 손을 젓고서 반쯤 다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일어나라. 질책하자고 부른 게 아니니.”
“실망을 끼쳐드렸습니다.”
“질책하려는 게 아니라니까? 대신관이 다녀갔다니 아마 그자가 치료해 준 거겠지.”
“죄송합니다.”
“되었다. 대신관은 조커 카드나 다름없지. 사기적이야. 대신관이 아트락시 공작놈 장남을 치료해 줄 거라고 자네가 어떻게 생각했겠어?”
로르드 재상의 말은 온화하고 이해심이 가득했지만, 정말로 괜찮다고 생각했다면 이 늦은 시각에 그를 부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로르드 재상은 화가 난단 이유만으로 자신의 심복들에게 해코지하지도 않기에, 첼러는 허리를 펴고 신중하게 재상을 보았다.
“다른 방법을 써 볼까요?”
“아니. 일반적인 방법으론 안 될 거 같다.”
“그러면 달리 생각해두신 방법이 있는지요?”
“이제부터 생각해봐야지. 하여튼 부상을 입히는 방식으로는 안 돼. 또 치료해버리면 그만이니까.”
“예.”
“너도 생각해보아라.”
“예, 재상님.”
로르드 재상이 그만 나가 보라고 손짓하자 첼러는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문으로 다가가던 그는 잠시 주춤하다가 도로 돌아와 재상에게 물었다.
“도련님 도움을 받으면 일이 좀 수월해질 텐데. 게스타 도련님께 도와달라 하면 어떨까요?”
“그 애는 너무 착해. 순하고. 남을 해칠 방법을 연구 중이란 걸 알면 충격받아 기절할 거다.”
“……예.”
* * * 서서히 더워지기 시작하는 날의 밤공기는 어딘가 사람을 아늑하게 만드는 운치가 있었다. 라틸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거리를 걸어가며 복잡하고 어지러운 생각을 어떻게든 쭉쭉 펴보려 노력했다.
‘내가 서넛 경을 괜히 의심하는 걸까. 내가 본 서넛 경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인데. ……젠장. 오빠는 안 그랬어? 오빠도 믿을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아니, 그래도 서넛 경은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오빠한테 회유되지 않았고…….’
그때 바람을 타고 어렴풋이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지? 싸우는 소리 같은데?’
목적을 가지고 나온 건 아니기에 라틸은 호기심이 들자마자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바로 걸어가 보았다. 멀리서 생각했던 것처럼 싸움이 나 있었다. 그것도 두 명이 싸워대는 게 아니라, 패거리끼리 난 싸움. 이미 다들 감정이 격해졌는지, 패거리는 누가 어느 쪽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뒤엉켜서 머리카락을 뜯고 발로 걷어차고 옷을 붙잡고 바닥을 구르는 둥 소위 말하는 개싸움 중이었다.
‘경비는 안 오나?’
라틸은 그 생각을 하다가 근처에서 소시지를 꼬치에 꿰어 파는 노점상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다가가 유모가 챙겨준 돈을 내밀었다.
“저 사람들 왜 싸워요?”
“술 마시고 싸우는 거죠. 주정뱅이들이야 뭐 서로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난리가 나잖습니까.”
상인은 기름이 너무 많이 묻어 번들거리는 소시지를 종이컵 안에 넣더니, 가위로 싹둑싹둑 일곱 조각으로 잘라 라틸에게 건네주었다. 라틸은 컵에 담긴 소시지를 들고서 근처 벽에 누군가 쌓아 놓은 나무 상자 더미로 가 걸터앉았다. 소시지를 하나하나 씹어 먹으면서 싸움을 구경하고 있자니, 그제야 흑마법사니 틀라니 서넛이니 하며 복잡하던 머릿속이 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너 뭐야!”
하지만 그런 모습이 쌈박질 중이던 이들에겐 시비로 보였나 보다. 누군가 경비가 온다고 외치자 가까스로 흩어진 주정뱅이들은,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하이에나처럼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더니 라틸을 발견하자마자 버럭 외치며 다가왔다. 라틸은 소시지를 한 조각 더 입에 넣고서 방긋 웃었다.
“구경꾼.”
그 모습이 주정뱅이들을 더욱 화나게 한 게 분명했다.
“이게 미쳤나?”
“우리가 우스워?”
두 패거리 중 한 패거리가 바닥에 침까지 뱉으며 우르르 다가왔으나 라틸은 태연자약하게 웃고만 있었다. 그들에게서 피냄새가 나기 전까지는.
“!”
코를 통해 폐까지 한 번에 훅 들어오는 피냄새에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반쯤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 순간. 눈앞이 몽롱해지면서 무언가……. * * * 눈을 뜬 라틸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건 또 뭐지?’
아까 분명 소시지를 먹으면서 싸움 구경을 하다가 막 휘말리려던 찰나였는데. 지금 라틸의 주위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길인 건 알겠지만, 주정뱅이들이 싸워대던 가게도, 라틸에게 소시지를 판 노점상인도, 술에 취해 아무나와 싸우고 싶어 하던 이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
라틸은 곧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심지어 라틸은 지금 달려가고 있었다. 전혀 다리를 움직이고 있지 않은데도.
‘이게 뭐야?’
마치 자신이 누군가의 몸 안에 갇혀 있는 느낌. 전에 칼라인의 기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듯 본 적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당시에는 삼자의 입장에서 칼라인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느낌과 달랐다. 자신이 누군가와 한 몸이 되어 그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느끼는 듯했다.
‘대체 뭐지?’
아까 주정뱅이의 기억인가, 생각하는 사이.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나온 손이 라틸을 확 끌어당겼다.
“!”
라틸은, 정확히는 라틸이 느끼는 몸은 골목길 벽에 등을 부딪치면서 작게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비명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몸 주인을 끌어당긴 누군가가 커다란 손으로 입을 막은 탓이다.
“쉿.”
라틸은 진짜로 놀랐다. 라틸, 아니, 몸 주인의 입을 막은 건 칼라인이었다. 지금의 칼라인이 아니라 머리카락이 긴 칼라인.
‘칼라인의 기억인가?’
칼라인의 기억이라면 칼라인이 근처에 있었단 거야? 아니, 그렇다고 쳐도 이건…… 이 구도는 칼라인의 기억이라기보다는, 지금 이 ‘몸 주인’의 기억에 가깝지 않나? 의구심을 가지는 순간. 태풍에 검은 먹물을 뿌린 것 같은 어둠과 함께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아까 라틸이 서 있던 대로를 무언가 빠르게 지나갔다. 다행히 몸 주인도 그 소리가 궁금했는지 눈동자를 돌렸고, 라틸은 대로 전체를 다 채울 정도로 검고 커다란 마차가 미친 듯이 내달리는 장면을 보았다. 사람이 타는 마차라 하기엔 너무 커다란 마차였다. 무엇보다 잠깐 본 흑마. 마차를 이끄는 그 흑마가 땅을 밟고 있지 않았다.
‘저게 대체?’
라틸은 그 마차를 더 보고 싶었으나, 몸 주인은 다른 생각인지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사실 칼라인이 계속 입을 손으로 막고 있었으니, 몸 주인이 마차를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한들 갈 수도 없었겠지만.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그 태풍 같은 소리가 사라지자 마침내 칼라인이 몸 주인의 입에서 손을 떼더니 웃으며 물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라틸은 지금 칼라인과 환상 속 칼라인의 차이를 하나 더 알아차렸다. 이쪽 칼라인은 머리카락이 길 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좀 더 밝았다. 목소리 톤이 높은 게 아니라 분위기가. 지금처럼 어둡고 무겁고 질척이는 느낌이 없었다.
‘칼라인의 과거라 그런가?’
라틸이 의아해하는 동안 몸 주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뭐, 뭘요?” 하고 묻고 있었다.
“누구세요?”
이어지는 목소리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때 뭔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몸 주인’이 고개를 내리자 초록색 사과가 발치를 굴러가고 있었다. 라틸은 ‘몸 주인’이 사과 바구니를 들고 있던 걸 알아차렸다. 칼라인은 허리를 숙이더니 초록색 사과를 주워 건네면서 웃었다.
“이 마을에 흑마법사가 산다고 들었는데.”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몸 주인’은 비명을 지르며 칼라인을 밀어내더니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바구니가 떨어지며 안에 든 사과가 바닥을 굴러가는 게 느껴졌지만, 몸 주인은 그것조차 챙기지 않았다. 연신 뒤를 돌아보며 달린 몸 주인은 어두컴컴한 숲속에 들어와서야 숨을 헐떡거리면서 계속 걸어가다가, 어느 오두막집 앞으로 가더니 문을 열고 들어가며 외쳤다.
“엄, 엄마! 엄마! 또 누가 엄말 찾아!”
오두막 안에는 한 여자가 난롯가에 앉아 부지깽이로 장작을 들쑤시고 있었고, 한 남자는 탁자에 서서 칼로 야채를 다듬고 있었다. 가장 구석진 곳 요람에는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양손에 들고 있다. 평화로운 관경이었다. 하지만 ‘몸 주인’이 외친 소리를 듣자마자, 야채를 다듬던 남자는 칼을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더니 난롯가에 앉은 여자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니까 내가 저딴 건 주워오지 말라 했잖아!”
그러고는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곧 그가 ‘몸 주인’의 멱살을 잡았다.
“아빠, 아빠?”
몸 주인이 놀라 외치거나 말거나, 남자는 “누가 네 아빠야! 저주받은 년!”하고 외치더니 크게 손을 휘둘렀다. 그 순간. * * * 라틸은 눈을 깜빡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다시 소시지가 든 컵을 들고 있었고, 앞에는 주정뱅이들이 화가 나 씩씩거리고 있었다.
“지금 우릴 무시해?”
“우리 무시하냐고!”
라틸은 잠시 그들을 쳐다보다가, 컵을 손안에서 우그러뜨리면서 발을 들어 가장 앞에서 위협적으로 고함을 지르던 주정뱅이의 배를 걷어찼다. 아까 몸 주인이 느꼈던 상황 탓에 순간 덩달아 기분이 나빠진 탓이었다. 이 주정뱅이가, 당장 얼굴을 내려칠 듯 손을 치켜들던 그 남자 같아서. 주정뱅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날아가더니, 반대쪽 벽에 있는 쓰레기통과 부딪쳐 쿠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다 큰 성인이 발에 한 번 차였다고, 뒤로 넘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반쯤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 모습에 다른 주정뱅이들이 술김에도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다. 라틸 역시 놀라서 그들에게 물었다.
“방금 내가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