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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좋은 시도였어, 라나문 (131/367)

131화. 좋은 시도였어, 라나문2021.05.30.

하지만 침을 삼키지 못하는 것도 이상했다. 라틸은 주저하다가 라나문의 눈가에 손을 대고서, 그가 눈을 감은 틈에 침을 소리 나지 않게 삼켰다. 일단 노력은 그렇게 했다. 하지만 착각인 건지 진짜인 건지, 침 넘어가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났다. 라틸은 힐긋 라나문을 보았다. 다행히 라나문은 소리를 듣지 못한 건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행이야. 소리가 들렸다면 민망했을 거야. 라틸은 안심해서 라나문의 눈가 가까이 가져갔던 손을 도로 치웠다. 그 순간. 라나문의 입꼬리 끝이 희미하게 올라갔다.

1655110122011.png“!”

들었구나! 라틸은 황급히 그의 눈가를 다시 가렸다. 하지만 라나문의 입술 끝은 더욱 올라갈 뿐이었다. 라틸은 그 상태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맸다. 뭐 사람이 침 좀 삼킬 수도 있지, 라고 이성이 단호히 항의했지만, 사람 마음이 늘 생각하는 대로 따라가진 않지 않던가.

1655110122011.png“큼. 흠.”

라틸이 헛기침을 하고 있자니, 라나문이 손을 올려 라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의 손이 라틸의 손을 잡고 슬그머니 아래로 내리자, 라나문의 회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었으나 그 눈동자 아래에는 노골적으로 재밌어하는 기색이 보여서, 라틸은 다시 그의 눈을 가렸다. 라나문은 이번에는 라틸의 손을 내리지 않았다.

16551101220119.png“이런 걸 좋아하십니까.”

라틸에게 눈이 가려진 채 느긋하게 중얼거렸을 뿐. 마치 라틸을 상대의 눈을 가려놓고 희롱하길 좋아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투여서, 라틸은 다시 손을 스륵 내렸다. 라틸이 손을 내리자 라나문은 천천히 제 손을 들더니, 라틸의 목 앞부분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의 손길이 라틸의 목을 가볍게 스치고 내려가자 몸의 솜털이 오소소 일어났다. 라틸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목을 뒤로 넘기자, 목덜미를 쓰는 라나문의 손길이 좀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라틸은 천장을 보며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쉬었다 천천히 내뱉었다. 하지만 목을 타고 내려온 라나문이 촘촘하게 채워진 라틸의 단추를 건드리자, 라틸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고서 고개를 저었다.

1655110122011.png“좋은 시도였어, 라나문.”

  * * *

16551101220132.png“우리 클라인 님은 황자님이신데다 폐하께서 총애도 하시니, 국서 자리에 현재 가장 가깝겠군요?”

타시르의 입바른 소리에 클라인은 거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16551101220138.png“넌 말을 참 잘하는군.”

16551101220132.png“제가 황자님과 친해서 다행입니다. 그렇죠?”

16551101220138.png“네가 나랑 친하다고?”

16551101220132.png“절친한 친우 아니었습니까?”

타시르가 넉살 좋게 팔짱까지 끼자, 클라인은 잠시 생각해보긴 했으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16551101220138.png“좋다. 내가 손해지만.”

타시르의 말마따나 요즘 들어 라틸의 총애가 한껏 그에게 몰린 상황이었기에, 마음이 퍽 넓어져 있는 덕이었다. 게다가 타시르는 총애를 받기 전부터 그에게 잘 대했으니, 하렘 내에서라면 가장 친하다고 표현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클라인의 입장이었고, ‘내가 손해’라는 말은 듣는 사람으로서는 충분히 기분이 나쁠 말이었다. 그래도 타시르가 전혀 기분 나쁜 내색 없이 웃자, 클라인의 시종인 바닐은 ‘저 상인이 우리 황자님 노선을 타려나 보다’ 생각하면서 자신도 타시르의 시종에게 호의적으로 미소를 지어주었다. 미소를 주고받는 분위기가 되자 히얼란도 얼른 눈치 좋게 같이 웃었다. 하지만 히얼란은 타시르가 절대로 클라인 노선을 타려는 게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가 아는 타시르는 반드시 국서 자리를 노릴 사람은 아니었다. 국서 자리보다 후궁 자리가 이득이라 판단이 되면, 꼭두각시 국서를 세워도 상관없다고 여길 사람이지. 그리고 지금 하렘 안에서 국서 자리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클라인이 치고 올라오고 있긴 하지만, 외국인인 데다 타리움 내 세력이 부족하다는 큰 제약이 있었다. 그러니 누가 국서가 될지 불확실한 이 상황에서, 타시르가 한 사람과 유달리 친하게 지내면서 다른 후궁들을 적으로 만들 리 없었다.

16551101220132.png“우리 클라인 님은…….”

그런데 클라인에게 온갖 좋은 소리를 하던 타시르가 돌연 어딘가를 보더니 “응?”하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클라인은 타시르의 아부에 한껏 기분이 좋아져서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서넛이 칼라인의 방에서 나오는 걸 보고서 눈살을 구겼다. 클라인은 원래도 서넛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최근에 서넛이 감히 카리센 황실 일에 훈수까지 두자 더 짜증이 나 있었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싫을 만큼. 이 때문에 그는 타시르가 “이상하네요.”라고 중얼거렸지만, 그냥 확 돌아서버렸다.

16551101220138.png“저자는 항상 이상하지. 더 이상해진다 한들 무슨 상관이야. 다른 데 가자. 보기도 싫다.”

그래도 타시르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16551101220132.png“서넛 경은 남 일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지요.”

16551101220138.png“그게 뭐.”

16551101220132.png“그런데 칼라인 님과 친하게 지내니 신기하지 않습니까? 둘이 접점도 없어 보이는데. 신분도 다르고…….”

16551101220138.png“오다가다 어디서 눈 맞았겠지.”

16551101220132.png“부럽네요. 저도 서넛 경과 친해지고 싶은데.”

여전히 별생각 없이 짜증을 내던 클라인은, 타시르가 눈이 가늘어지도록 웃으면서 하는 말에 더욱 불쾌해져서 경고했다.

16551101220138.png“내 친구로 있으려면 서넛 저놈과는 절대 어울리지 마라.”

16551101220132.png“이리 독점욕이 강하셔서야…….”

16551101220138.png“뭐야?”

독점욕? 클라인이 도끼눈을 뜨자, 타시르는 그의 팔짱을 끼더니 서넛이 있는 쪽과 반대 방향으로 황자를 슬쩍 당기며 눈치 좋게 행동했다.

16551101220132.png“가시지요. 우리는 저쪽으로. 그러면 될까요?”

클라인은 흥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면서 타시르가 이끄는 방향으로 걸어갔지만, 걷는 내내 잔소리를 계속했다.

16551101220138.png“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친구로 있으려면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과는 친하게 지내지 마라. 알았어?”

그러다가 돌연 이번에는 클라인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멈추어 섰다.

16551101220132.png“왜 그러십니까?”

이번에는 당겨도 클라인이 끌려오지 않자, 타시르가 팔을 놓으면서 물었다. 클라인은 대답 대신 뒤를 돌아서서 아까 서넛이 걸어간 방향을 쳐다보았다.

16551101220132.png“황자님?”

16551101220138.png“……서넛은 남 일에 안 나선다 했지.”

16551101220132.png“그렇지요.”

16551101220138.png“그런 자가 남 일에 나서면 그게 뭘까?”

16551101220132.png“남 일이 아니겠지요.”

역시 이상하게 여겨져서 클라인은 미간 사이를 더욱 좁혔다. 하이신스에 관한 일은 서넛에겐 완전히 남 일. 남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자가 형님의 일에 나선 건지,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16551101220138.png“남 일이…… 아니다……?”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타시르는 무언가를 알아챈 듯 갑자기 눈웃음을 지었다.

16551101220132.png“서넛 경 관련해서 뭐 신경 쓰이는 게 있으신 모양입니다?”

16551101220138.png“신경 쓰이긴. 무슨.”

클라인은 계속 찝찝한 기분이 들긴 했으나 그게 무엇인지 잘 감이 오지 않자, 애써 넘어가기 위해 몸을 돌려 가던 길이나 마저 가려 했다. 타시르는 그런 클라인의 곁으로 오더니 나란히 걸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16551101220132.png“상담해드릴까요?”

클라인이 옆을 보자, 타시르가 더욱 짙게 웃었다.

16551101220132.png“제가 머리를 잘 굴리는 편입니다. 친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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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방이 서늘한 지하성 안. 틀라는 라나문에게 보낸 괴물이 제 임무를 수행했는지 알 길이 없어 초조하게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우 가면이 계속 정신 사납게 곁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뭔가를 정리하고 있자 애써 태연하게 물었다.

16551101308111.jpg“뭘 보는 거지?”

여우 가면은 손길을 멈추고서 고개를 돌렸다. 순간. 틀라는 표정을 알 수 없는 저 가면이 너무 무섭게 여겨졌다.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저 가면 안에서 그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그게 갑자기 궁금해져서.

16551101308111.jpg“악보입니다.”

가면 아래로 드러난 입술이 미소를 짓자, 틀라는 그제야 조금 안심해서 물었다.

16551101308111.jpg“악보?”

16551101308111.jpg“로드께서 좋아하는 노래가 실린 악보지요.”

16551101308111.jpg“……내가?”

16551101308111.jpg“역대 로드께선 모두 이 노래를 좋아하셨습니다.”

자신이 로드인지 아닌지 불안해하는 틀라에게, 여우 가면의 말은 마치 시험처럼 들렸다.

16551101308111.jpg“그럼 나도 좋아하겠군.”

틀라가 마른침을 삼키셔 마지못해 대답하자, 여우 가면은 더욱 짙게 웃더니 일어서면서 물었다.

16551101308111.jpg“연주해드릴까요?”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틀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여우 가면은 악보를 들고서 한켠에 놓인 피아노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그가 소맷자락을 위로 올리자 상처 하나 없는 매끈한 손이 드러났다. 틀라는 그 모습을 무겁게 바라보았고, 여우 가면은 그 마음보다 더욱 무겁게 건반 여러 개를 동시에 쿵 눌렀다. 틀라는 그 낮은음을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고작 부하의 눈치를 보는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휩쓸리지 말잔 생각을 하고는 있는데, 이상하게도 한 번 눈치를 보기 시작하니 자꾸 휩쓸리게 되었다.

16551101308111.jpg‘나는 로드이니, 날 위해 마련된 부하 따위에게 흔들리면 안 되는데.’

16551101308111.jpg“그만.”

결국 홀로 불쾌해진 틀라가 명령을 내리자, 여우 가면이 의아해 고개를 기웃했다.

16551101308111.jpg“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16551101308111.jpg“난 조용한 게 좋다.”

그래도 틀라가 단호하게 명령하자, 여우 가면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서 건반에서 손을 뗐다.

16551101308111.jpg“그렇군요. 로드께서 싫은 걸 할 수는 없지요.”

그 순순한 태도에, 틀라는 안심해서 생각했다. 그래. 계속 이렇게 하면 돼. 저자는 내가 로드다운 모습을 보일수록 날 더 따를 테니.

16551101308111.jpg“라나문에게 보내신 128호는 죽었더군요.”

하지만 그가 안심을 하자마자 여우 가면의 태연한 목소리가 바로 칼처럼 들이밀어져 그를 휘저었다. 틀라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여우 가면은 피아노 뚜껑을 덮으면서, 반쯤 몸을 돌리며 웃었다.

16551101308111.jpg“안 그래도 흑마법사 숫자가 부족해 다크리처들이 얼마 없는데. 함부로 사용하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옆으로 보인 미소는 어쩐지 비웃음 같아서, 틀라는 화가 났다. 여우 가면이 말하는 방식이 절대로 부하 같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틀라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자, 여우 가면이 피아노에서 일어나 악보를 챙기다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얼른 사과했다.

16551101308111.jpg“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로드께선 인간으로 지낸 기억이 더 많으시니까요.”

그러나 그 사과조차도 조롱처럼 여겨져서, 틀라는 눈길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16551101308111.jpg“……괜찮다. 그럴 수도 있지.”

16551101308111.jpg“그럴까요?”

틀라는 자존심이 상해서 주먹을 쥐었다. 여우 가면이 저렇게 나오는 걸 보니, 분명 자신을 잘못 데려왔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싶어서. 여우 가면이 다시 돌아서서 악보를 챙기는 사이, 틀라는 그 뒷모습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갑자기 분노가 치솟았다. 라나문 그놈이 진짜 로드이건 어쨌건, 그놈도 각성을 안 한 건 매한가지였다. 여우 가면 저놈도 라나문을 당장 데려와서 시험해 볼 수 없으니, 그냥 놔두고 있는 게 아닌가?

16551101308111.jpg‘그래. 내가 설령 가짜 로드라고 해도 저놈 눈치를 볼 일이 아니다.’

확신한 틀라는 분노를 더 참지 못하고, 옥좌에서 일어나 여우 가면 쪽으로 다가갔다. 어떻게든 빼앗긴 기세를 잡아 다시 가져와야 했다. 저 여우 가면을 곤란하게 만들어서. 마침 악보를 다 챙긴 여우 가면도 의아해서 몸을 돌렸다.

16551101308111.jpg“항상 궁금했는데.”

16551101308111.jpg“말씀하시지요.”

16551101308111.jpg“왜 얼굴을 가리고 있지?”

16551101308111.jpg“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이게 규칙입니다.”

16551101308111.jpg“그래. 너희 뱀파이어들은 오래 살다 보면 이름과 얼굴이 바뀌는 경우가 있어서, 상층부는 동물 이름과 가면을 사용해 서로를 부른다고 했지. 아니면 구별이 안 된다고.”

16551101308111.jpg“잘 기억하시는군요.”

미소를 짓는 여우 가면에게 틀라가 명령을 내렸다.

16551101308111.jpg“벗어봐라. 그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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