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내가 가장 좋으시단 거지2021.06.23.
라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진심이야? 클라인이 라틸의 뺨 근처까지 천천히 손을 올렸다.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진 손의 감촉은 피부에 바로 닿진 않았으나, 그것에서 나오는 온기는 확실하게 전해졌다. 곧 다가올 따끈한 손의 감촉을 미리 짐작하자 라틸은 괜히 등줄기가 찌릿해져 왔다. 하지만 뺨보다 입술에 먼저 온기가 닿았다. 말랑한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누르자마자, 라틸은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고 클라인은 라틸을 번쩍 들어올렸다. 어깨에 슬쩍 걸쳐두었던 얇은 망토가 스르륵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으나, 그보다는 클라인의 입술을 빨아들이는 게 더욱 급했다. 라틸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의 허리를 다리로 감싸고 몸을 위로 올렸다. 자연스럽게 라틸의 머리가 클라인보다 더욱 위로 올라오자, 입술을 갈구하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라틸은 그의 은발 사이에 한 손을 파묻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닿는 머리카락의 바삭한 감촉조차 좋았다. 라틸이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위로 들자 클라인은 아프지 않게 잘근거리며 라틸의 목선을 천천히 따라 내려왔다. 라틸은 짧게 탄식했다. 이 와중에도 그는 라틸을 안정적으로 들고 있어서 옷과 옷이 닿는데도 전혀 미끄러지지 않고 있었다. 클라인의 몸은 라틸보다 따뜻했지만, 개중에서도 더욱 온도가 높은 건 그의 입안이었다.
“폐하.”
클라인이 라틸의 목덜미에서 입술을 떼면서 잠긴 목소리로 불렀다.
“이름, 이름 불러도 될까요?”
그의 손이 라틸의 귓바퀴를 간지럽게 문지르다 엄지가 귀 안쪽으로 들어오자, 한쪽 청각이 흐려지면서 몸이 저절로 움찔 떨렸다. 라틸은 그의 목덜미 안쪽으로 손을 넣어 부드러우면서도 탄탄한 등을 문질렀다.
“폐하. 으응?”
라틸이 대답하지 않자 클라인이 재촉하듯 다시 라틸을 불렀다.
‘귀여워.’
라틸은 그의 이마에 대고 마구 자신의 이마를 비벼댔다. 그의 호흡이 자신의 호흡과 섞이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를 감싼 옷감도 아름답고 부드럽지만, 그 옷감들이 감싼 것들이 더욱 아름답고 부드러우리란 생각을 하자 얼굴에 열기가 돌면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아. 아야. 아야야야.”
하지만 분노와 눈물과 실망감이 뒤섞여 만들어 낸 자극적인 분위기는, 취객 하나를 발로 차 건너 도로 벽에 부딪히게 할 만큼 강해진 라틸의 힘이 깨버렸다. 라틸이 들떠서 그의 머리카락을 조금 세게 당기자 클라인이 비명을 지른 것이다.
“아. 미안.”
라틸은 얼른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고 클라인의 위에서 내려왔다. 약간 힘을 주긴 했지만, 머리를 묶을 때 두피를 당기는 정도로만 힘을 준 건데. 클라인이 생각보다 너무 아파하고 있어서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괜찮으냐?”
하지만 꾀병을 부리는 기색은 아니어서 조심스레 묻자, 클라인은 제 머리통을 감싸 쥐고서 입술을 바르르 떨다가 눈가에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항의했다.
“괜찮아 보이십니까?”
“좀 아파 보이긴 해.”
“네, 아픕니다. 이름 부르는 게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시던가요.”
“아니…… 화나서 머리를 뽑은 건 아닌데.”
“무슨 소리십니까. 손에 힘을 제대로 주고 잡초 뽑듯 당기셨습니다.”
라틸이 머쓱하게 웃는 동안에도 클라인은 머리를 감싸 쥐고서 침대를 뒹굴었다. 그러다가 클라인이 감싸 쥐고 있던 머리를 놓는 순간. 그의 손에서 결 좋은 머리카락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내 머리! 내 머리!”
그걸 본 클라인이 눈이 커다래져서 중얼거리자, 라틸은 머쓱해져서 볼을 긁적였다. 갑자기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이후 생활을 하는 데 별문제가 없기에 그러려니 넘어갔는데.
‘흥분해서 힘 조절을 못 한 건가.’
의도치 않게 클라인의 머리카락을 저리 뽑아버리니 너무 미안했다. 마음에 상처를 줬는데 두피에까지 상처를 줘 버리다니.
“클라인.”
클라인이 원망스럽게 쳐다보자 라틸은 조심스럽게 위로했다.
“걱정 마, 머리카락은 새로 나잖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식단에 콩을 챙겨 넣으라고 할게. 그걸 먹으면 머리가 잘 자란대.”
“폐하!”
라틸이 머쓱하게 웃자 클라인은 차마 황제에게 더 화를 내진 못하고 끙 소리를 내면서 애꿎은 카펫만 노려보았다. 여기서 다시 키스를 할 분위기도 아닌 데다, 제정신이 들고 나니 ‘내가 저 얼굴에 홀려서 잠시 이성을 잃었구나’ 싶어서 라틸은 거울 앞으로 걸어가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후궁으로 두고 있으니 내내 구경만 할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클라인을 취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클라인은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으나 라틸에게서 흘러내린 얇은 망토를 챙겨서 탁탁 턴 다음 라틸의 뒤로 다가가 어깨에 걸쳐 주었다.
“절 진짜 후궁으로 대했다면 진즉에 품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이래저래 다시 죄다 억울해졌는지, 그는 세심하게 망토 매무새를 만져 주면서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도 품어주셨겠지요. 제 손가락이…… 폐하의 어깨를 스치는 이런 때라던가요.”
라틸은 거울 너머로 클라인을 보았다. 실망한 표정과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은 아까 키스를 한 사람이 아니라 머리채를 뜯고 싸운 사람 같았다.
“클라인.”
“네, 할 말 있으면 마음껏 해보십시오.”
“역시 콩은 보낼게.”
“폐하!”
시무룩하게 시선을 내리고 있던 클라인이 울상을 지으며 쳐다보았다. 라틸은 얼른 몸을 돌려 그와 마주 서고서, 두 손으로 그의 양 뺨을 감싸 입술을 붕어처럼 만들고 당부했다.
“언젠가는 널 품겠지만 그건 네가 콩을 먹은 후란다.”
클라인의 눈빛이 세차지자, 라틸은 가볍게 웃고서 말을 바꿨다.
“농담이다.”
손을 놓아주자, 그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서부터요.”
“콩부터.”
“…….”
계속 콩 타령을 해댔더니, 클라인은 라틸이 두루뭉술하게 한 말이 영 미덥지 않은 듯했다. 콩이 농담이란 건지, 콩 빼고 농담이란 건지 모르겠단 표정을 풀지 못하고 선 그가 조금 귀여워 보여서, 라틸은 문득 커다란 개나 고양이에게 하듯 그의 궁둥이를 팡팡 두드려주고 싶어졌다.
“클라인.”
“폐하는 지금 제가, 아주 많이 상처받았단 걸 자꾸 잊으시는 듯합니다.”
“클라인.”
“저는 키스 한 번에 기분이 싹 풀리는, 그렇게 마음 가벼운 남자가 아닙니다.”
“클라인?”
“제가 폐하와 형님 사이에 끼어서 휩쓸리니까 막 부표처럼 보이고 그러시나 본데, 저는…….”
“널 품을 거다.”
“!”
“하지만 그게, 네가 네 위치를 의심하는 이런 순간은 아니야.”
라틸이 진지하게 한 말에 클라인은 잠시 라틸의 망토 자락을 잡고서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형님을 제외하고. 그럼 후궁들 중엔 제가 몇 번째로 좋으십니까?”
“이런. 클라인.”
라틸은 클라인의 옷깃을 당겨 그가 허리를 조금 허리를 숙이게 한 다음, 그 입술 위에 가볍게 입술을 누르고서 웃었다.
“당연히 네가 첫 번째지.”
키스 한 번에 기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마음 무거운 남자는, 마음과 달리 입꼬리는 한없이 가벼운 듯 대번에 입술 끝이 위로 치솟았다.
* * * 황제가 나간 뒤. 바닐은 제발 방 안에 싸움의 흔적이 없길 바라며 눈을 질끈 감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바닐이 본 건 우두커니 방 한가운데 선 채 자신 입술 위에 손을 올린 클라인이었다. 떠나겠다면서 바닥에 늘어놓은 옷가지가 아니라. 침대 위에 놓인 황제 인형도 멀쩡. 침대 이불도 빳빳. 거울 깨지지 않았음. 커튼보 무사. 화장대 위의 고가 화장품들 역시 안전. 빠르게 방 안을 눈으로 훑은 바닐은 방문을 살며시 닫으면서도, 만약을 대비해 아주 작게 클라인을 불러보았다.
“황자님?”
클라인은 바로 손을 내리고서 휙 몸을 돌리더니 점잖은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지?”
다행이다. 안 싸우신 게 확실한가 봐. 클라인이 점잖은 척 굴 때는 기분이 좋을 때뿐이었다. 바닐은 손을 가슴 위에 올리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해가 잘 풀린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하지만 딱 그 말을 하자마자 바닐은 어두운색 카펫 위에 우수수 떨어져 있는 은색 머리카락을 발견하고서 눈을 부릅떴다. 황제는 검은 머리이니, 저건 분명 클라인의 머리카락인데. 바닐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 황자를 쳐다보았다. 설마…… 머리채를 저만큼 뽑힌 다음 강제로 진정되신 건가? 황자님이 가엾어요. 바닐이 동정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자, 클라인은 목덜미를 쑥스럽게 문지르다가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뭘 그렇게 기분 나쁘게 봐?”
“황자님…… 선황제 폐하께서 늘 황자님께 그러셨죠. 황자님이 꼭 황자님 같은 여자와 결혼했으면 좋겠다고요. 선황제 폐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것 같아요.”
“아바마마야 당연히 우리 폐하를 보면 기뻐하시겠지.”
클라인이 냉랭한 척 서늘한 척 코웃음을 치면서도 라트라실 황제를 ‘우리 폐하’라고 표현하자, 바닐은 두 사람이 일단 화해를 하긴 한 것 같다고 생각해 안심했다. 완벽하게 화해를 한 건지, 화해하는 기류만 형성한 건진 모르겠지만.
“자.”
바닐은 클라인이 서랍장으로 가서 자줏빛 주머니를 주섬주섬 꺼내오자,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나 얼른 다가갔다. 주둥이가 묶인 주머니는 받아 들고 보니 제법 묵직했다.
“황자님, 여기엔 돈이 들어 있지 않나요?”
바닐은 평소 방 정리를 맡아서 하기에 바로 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아채고서 의아해 질문했다. 뜬금없이 돈주머니를 내밀다니. 역시 카리센에 돌아가시겠단 뜻인가? 거기로 갈 마차를 사는 값?
“그래. 하인들 중에서 입이 무거운 놈들한테 그 돈을 쥐여주고, 이렇게 소문을 내라 해. ‘폐하께서 클라인 님이 후궁들 중에서 가장 좋다 말했대’라고.”
“그런 거짓말을 했다가 들키면…….”
“거짓말이 아니다.”
클라인의 턱이 5cm 정도 허공으로 올라갔다.
“직접 그러셨지. 게다가 날 거의 품어주실 뻔 했는데, 결국 마음을 바꾸셨어. 내가 너무 소중해서 이렇게 싸우면서는 품을 수 없으시단다. 날 너무 거칠게 대하실까 걱정되시는 거겠지.”
이미 거칠었던 것 같은데요. 바닐은 카펫에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보지 않기 위해 인내심을 발휘했다. 반면 내내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던 악시안은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솔직하게 의견을 제시했다.
“그냥 바빠서 둘러대신 게 아닐까요?”
“누가 들어오래. 나가.”
그 빈정 상하는 말에 클라인이 정색을 하고 명령하자, 바닐은 꾸벅 인사하고서 한 손에는 돈주머니를, 한 손에는 악시안의 허리띠를 움켜잡고서 얼른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 클라인은 잠시 귀찮아 죽겠다는 듯 혀를 찼으나, 곧 표정이 풀어져서 침대로 가 누웠다.
아까 바닐이 보았을 때처럼 제 손으로 입술을 몇 번 매만지던 클라인은 웃으면서 그대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