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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제가 연정을 품으면 어떡하실 겁니까? (144/367)

144화. 제가 연정을 품으면 어떡하실 겁니까?2021.07.14.

아무리 유령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도 지금 헤움 황자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를 가엾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다가 공작은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16551104231381.jpg“아주 터무니없는 말도 아닙니다. 좀 극적인 연출을 하고 싶을 뿐, 실제로 아이니는 대리 황제가 될만한 자질이 있거든요.”

다가 공작은 파이프에서 뿜어지는 연기 사이로 헤움 황자의 표정을 살폈다. 연회장을 습격했을 때, 아이니의 힘을 느끼고 달아난 장본인이 헤움 황자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헤움 황자라면, 그의 말을 이해할 가능성이 컸다.

16551104231381.jpg“500년 주기로 악이 부활할 때 악을 무찌르는 존재가 나타난다고 하지요. 제 생각엔 우리 아이니가 그런 존재입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하고 다가 공작이 작게 덧붙인 말에 헤움 황자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다가 공작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16551104231451.jpg[아이니가 행복하다면 얼마든지 죽어줄 수 있지. ……하지만 과연 그렇게 해서 아이니가 행복해질까?]

하지만 이어진 헤움 황자의 말은 그리 협조적이지 못했다. 당연히 황자가 자기 말을 따를 거라 여겼던 다가 공작은 불쾌해져서 미간을 구겼다.

16551104231451.jpg[나는 아이니가 행복해지길 바라네, 공작. 하지만 아이니는 황후가 되어서도 행복하지 않았어. 오히려 나와 함께 지낼 때보다 더 슬프게 살았지.]

16551104231381.jpg“황제가 된다면 행복해질 겁니다. 황후일 때는 황제에게 매이니 행복하지 못했지만, 황제가 된다면 행복해지겠지요.”

16551104231451.jpg[나는…….]

16551104231381.jpg“아버지인 내가 잘 알지 연인이었던 전하께서 잘 아시겠습니까?”

다가 공작의 차가운 질문에 헤움 황자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16551104231451.jpg[그렇겠지.]

다가 공작의 말에 정말 동의한다기보다는 말다툼을 해봐야 소용없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다가 공작은 파이프를 뻐끔거리며 헤움 황자의 표정을 세세하게 살폈다. 그러다 헤움 황자가 다시 한숨을 내쉬자 빈정거렸다.

16551104231381.jpg“마음이 변하셨나 봅니다, 전하. 이미 죽은 목숨, 아이니를 위해 쓰기 그렇게 아까우신지요. 사람의 마음이 빨리 변한다고들 하지만, 죽은 사람도 그럴 줄은 몰랐군요.”

헤움 황자는 다가 공작의 도발에 대응하지 않았다. 다가 공작이 일부러 그를 자극하고 있단 걸 아는데, 굳이 넘어갈 필요는 없었다. 대신 헤움 황자는 대리 황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내내 신경 쓰이던 질문을 했다.

16551104231451.jpg[자네는 아이니를 500년에 한 번 깨어나는 대적자로 여기는군. 혹시, 내가 연회장에서 아이니를 놀란 눈으로 쳐다봐서 그런 건가?]

다가 공작은 순순히 인정했다.

16551104231381.jpg“그날 전하께선 아이니에게 무언가를 느끼셨지요. 눈썰미가 있는 사람은 전하를 물리친 게 그 이상한 타리움 여자가 아니라 우리 아이니였단 걸 알았을 겁니다.”

그 대답에 헤움 황자의 얼굴이 곤란하단 표정으로 변했다. 뚜렷한 표정 변화에 다가 공작은 파이프를 입에서 뗐다. 헤움 황자는 단순히 그의 제안을 거절하는 게 아니었다. 무언가 다른 꺼림칙한 게 떠오른 기색이었다.

16551104231381.jpg“왜 그러시지요?”

16551104231451.jpg[내가 그날 연회장에서 아이니에게 무언가를 느낀 건 맞지만…….]

16551104231381.jpg“그러면 됐습니다. 뒷말은 필요 없습니다.”

16551104231451.jpg[나와 검을 겨룬 그 여자에게서도 소름 돋는 힘이 느껴졌다.]

헤움 황자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나름대로 진지하게 그날의 일을 떠올려 보는 듯했다. 하지만 다가 공작은 ‘참 별 얘기를 다 한다’는 얼굴로 시큰둥하다가, 헤움 황자가 이야기를 마치자 빙그레 웃으면서 파이프를 내려놓았다.

16551104231381.jpg“그 여자에 관해선 묻어버리는 걸로 하지요. 영웅이 둘일 필요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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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다음날. 공작의 하녀는 다가 공작이 아침 세수를 하기 전 늘 마시는 야채를 갈아 만든 주스를 컵에 담아 가져왔다.

16551104231381.jpg“들어가겠습니다, 공작님.”

하녀는 문을 노크한 다음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을 잠에서 깨운 다음 그 음료수를 바치고 빈 잔을 들고 나가는 것. 이 세 가지가 그 하녀가 도맡아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다가 공작은 잠들어 있지 않았다. 창문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창밖에서는 귀여운 새소리가 들려왔으나, 다가 공작이 새소리를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16551104231381.jpg“공작님?”

하녀가 조심스럽게 부르는데도 공작은 꼬았던 다리를 풀면서 손만 뻗었다. 얼른 컵을 쥐여주자 공작은 야채 주스를 한입에 털어넣더니, 빈 컵을 건네고 일어서며 그제야 지시했다.

16551104231381.jpg“집사에게 마차를 준비시키라 해라. 아이니에게 다녀와야겠다.”

공작이 세수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자 하인 세 명이 동시에 달라붙어 공작이 옷 입는 걸 도와주었다. 완벽하게 머리까지 세팅한 공작이 홀로 내려가자 집사가 얼른 다가와 알렸다.

16551104231381.jpg“마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공작님. 윌리가 모실 겁니다.”

이 모든 일은 물 흐르듯 흘러가서,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집사는 처음에는 공작의 지팡이를 들고 조심조심 뒤를 따랐으나, 그가 마차에 오르기 전 결국 걱정스레 묻고 말았다.

16551104231381.jpg“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공작님? 황제 폐하가 주시하고 있으니 당분간은 황후 폐하를 만나지 않을 거라 하셨잖습니까.”

16551104231381.jpg“아이니에게도 당부를 해 두어야 해서 말이다. 본인이 얼마나 대단하고 귀한 존재인지. 그리고 별궁에 있는 동안 공부도 시켜야지. 스승을 구해야겠어.”

다가 공작이 마차에 올라타자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나 다가 공작이 탄 마차는 정문을 반쯤 빠져나가자마자 다시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건너편에서 누군가 말을 타고 이쪽으로 급히 달려오고 있어서였다. 말에 탄 사람은 다가 공작의 마차를 발견하자 얼른 그곳에 말을 세우고 내렸다.

16551104231381.jpg“무슨 일이냐.”

공작은 창문 커튼을 걷고서 물었다. 그는 말을 타고 온 이의 이름은 몰랐으나 얼굴은 얼핏 기억했다. 아이니가 별궁에 데려간 호위 중 하나였다. 그런데 별궁에 있어야 할 호위가 급하게 달려오다니?

16551104231381.jpg“아이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느냐?”

16551104231381.jpg“공작님. 황후 폐하께서…….”

말을 타고 온 사람의 안색이 창백한 걸 보자 공작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마차에서 내렸다.

16551104231381.jpg“아이니가 왜? 쓰러지기라도 했어?”

16551104231381.jpg“사라지셨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공작은 서둘러 마차에 오르며 마부에게 호통을 쳤다.

16551104231381.jpg“빨리 가라! 빨리!”

  * * * 멜로시 영지에서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간 라틸은 함께 식사하는 무리에 낯선 영애가 하나 끼어 있는 걸 발견했다. 황제를 만난다는 생각에 긴장했는지, 아슬아슬하게 과하지 않을 선에서 한껏 치장한 영애였다. 라틸의 눈길이 닿자 백작 부인이 그 귀족 여인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렸다 떼면서 소개해주었다.

16551104231381.jpg“조카딸인 엘리자벳입니다, 폐하.”

귀족 여인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라틸은 인사를 받으면서 ‘저 이름을 어디서 들었더라?’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특이한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멜로시 영지의 엘리자벳을 어디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16551104276223.jpg‘내가 여기서 지낼 때 본 사람은 아닌데.’

라틸이 그 이름을 기억해낸 건 식사 도중 엘리자벳이 서넛에게 한 질문을 들은 후였다.

16551104231381.jpg“오빠는 언제 결혼할 거야?”

16551104276223.jpg‘아아. 엘리자벳. 기억났다.’

라틸은 홀가분해져서 오믈렛 조각을 입에 넣었다. 멜로시 영지의 엘리자벳. 서넛의 사촌 동생. 라틸의 시녀인 애런델이 자신의 오빠와 ‘엘리자벳 양’ 사이에 혼담이 오간다던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서넛을 데려간 적이 있었다. 그때 들은 이름이었다.

16551104276223.jpg‘결혼 문제 때문에 여기서 계속 머무르고 있나 보구나.’

라틸은 오믈렛을 씹으면서 서넛 쪽을 힐긋 보았다. 엘리자벳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리고 나자 이제야 대화가 귀에 제대로 들어왔다. 그러나 사촌과 친한 사이가 아닌 건지 아니면 내키는 화제가 아닌 건지, 서넛은 평소보다 좀 더 무뚝뚝하게 딱 잘랐다.

16551104276241.jpg“아직은 생각이 없는데.”

16551104231381.jpg“마음에 둔 사람은 있어?”

16551104276241.jpg“…….”

16551104231381.jpg“정말로 착하고 괜찮은 내 친구가 있는데. 오빠를 좋아하는 눈치야. 오빠가 괜찮다면 내가 소개해줘도 되는데.”

라틸은 서넛이 이런 일상적인 주제로 잔소리 듣는 걸 처음 보자 어쩐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반면 서넛은 불편한 표정이었다. 이 분위기를 눈치챈 건지 백작 부인이 얼른 나서서 엘리자벳을 달래듯 나무랐다.

16551104231381.jpg“혼담 이야기는 가문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야지.”

정략결혼 핑계를 대고 있지만, 서넛이 이 화제에서 빠져나오게 해주려는 듯했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방긋 웃으면서 절대로 화제를 피하게 두지 않았다.

16551104231381.jpg“제 친구도 혼담을 주고받을 만한 가문이거든요.”

라틸은 엘리자벳이 사전에 그 서넛을 좋아한단 ‘괜찮은 친구’에게 무언가 언질이나 부탁을 받은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서넛이 이렇게 찌르고 저렇게 찔러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엘리자벳은 이번에는 다른 방향으로 접근을 시도했다.

16551104231381.jpg“오빠처럼 매력적인 남자가 미혼인 몸으로 폐하 곁에 늘 붙어 다니면 후궁들께서도 긴장될걸?”

그러나 서넛은 이번에도 아무 대응 없이 식사만 몰두할 뿐이었다. 이에 엘리자벳은 아예 게스타를 향해 “안 그래요?” 하고 묻는 강수까지 두었으나, 게스타도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16551104292387.jpg“서넛 경이 폐하를 연모했다면 후궁으로 들어왔으리란 걸 압니다. 서넛 경이 지원했다면 바로 뽑혔으리란 것도요. 그런데도 지원하지 않았단 건 서넛 경은 폐하께 전혀 마음이 없다는 거지요.”

게스타는 쑥스럽단 표정을 지으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는 서넛을 보며 상냥하게 웃었다.

16551104292387.jpg“서넛 경은 매력적인 남자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서넛 경을 경계하진 않아요.”

16551104276241.jpg“…….”

하지만 사촌의 말에는 내내 반응하지 않던 서넛이 게스타의 말에는 처음으로 반응했다.

16551104276241.jpg“조심성이 없으시군요. 저와 폐하는 하루 대부분을 붙어 다니는데, 나중에 어찌 될지 아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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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틸은 서넛과 엘리자벳의 미묘한 말싸움을 즐겁게 구경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넛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엘리자벳도 제 사촌을 살살 여기저기서 긁던 걸 멈추고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서넛을 쳐다보았다. 서넛이 별말을 한 게 아닌데도 순식간에 주위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황제를 옆에 두고 황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보니 다들 서넛의 말에 당황한 눈치였다. 엘리자벳은 제 오빠를 멍하니 보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옮겨 라틸을 보았다. 혹시 라틸과 서넛 사이에 무언가 미묘한 감정이 오가는데, 자신이 눈치 없는 말을 한 게 아닌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라틸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으나, 서넛은 멈추지 않고 라틸에게 물었다.

16551104276241.jpg“지금은 저와 폐하가 참으로 담백한 사이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니 언젠간 제가 폐하께 연정을 품을 수도 있지요. 그렇게 되면 어쩌시겠습니까,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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