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부부 사이니까 하는 질문인데2021.07.25.
그 질문에 잠이 확 달아났다. 며칠 전 누가 한 질문이 떠올라서. 라틸은 게스타의 손을 쥐었다가 펴길 반복하면서 그의 반듯한 턱선을 보았다. 게스타는 부끄러움이 많은 평소에는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클라인과 같은 질문을 한다는 건…….
“들었어? 누구한테 들었어?”
라틸이 클라인에게 했던 말을 어디서 전해 들은 게 분명했다. 라틸의 질문에 게스타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맞잡은 손을 자꾸 조물조물 거리고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성격 때문에 더 캐묻지 않는 눈치였다. 역시 누구에게 들은 게 분명해. 라틸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얘기가 왜 거기까지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황자님을 가장 좋아하시나요?”
“당시엔…… 클라인이 마음 아픈 일이 있었어.”
라틸은 게스타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으면서 속삭였다.
“사실은 널 가장 좋아한다, 게스타.”
같은 질문을 한 사람이 타시르나 라나문이었어도 같은 대답을 해주었으리란 건 굳이 알려주지 않았다. 물론 칼라인은 예외였다. 그는 연모하는 여자가 따로 있으니까. 게스타는 라틸의 대답에 미묘한 미소를 짓더니, 손을 더욱 힘주어 잡으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곤란한 질문을 해서 죄송해요. 질투가 나서 그랬어요. 빈말이라도 이렇게 말씀해 주셔서 좋습니다.”
빈말이 아니라는 빈말을 하는 대신, 라틸은 그쪽으로 돌아누우며 놀렸다.
“질투했어? 넌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다른 후궁들은 국서가 되고 싶어 온 분들이지만 저는 폐하를 만나고 싶어 여기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이 너무 진지해서 라틸은 짓궂게 웃던 걸 멈추고 게스타의 손만 계속 만지작거렸다.
“날 만나고 싶어 왔어?”
“어린 시절부터 저는 쭉 폐하를 좋아했으니까요.”
“…….”
“전 용기가 없어 감히 폐하의 첫 번째 자리를 바라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이라도, 폐하께서도 절 좋아해 주신다면 그것만으로도 무척 기뻐서…….”
게스타가 목덜미까지 붉어지자 라틸은 조금 감동을 받았다. 라틸이 후궁들을 받아들인 건 그들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라틸은 후궁들 역시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서 지원했으리란 걸 알았다. 이 때문에 후궁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단 생각은 하지 않았고, 후궁들이 사랑을 속삭이더라도 그게 진심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후궁들 중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건 타시르 정도이지만.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라틸은 그저 기분 좋은 말 정도로 여기고 흘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게스타가 이런 말을 하자 감동이 왔다. 게스타는 라틸이 평범한 황녀이던 시절에도 이미 고백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남들보다는 게스타의 고백이 조금 더 진심으로 여겨져서.
“내게 그렇게 말하는 건 너밖에 없다, 게스타.”
“클라인 님은…….”
“클라인도 진심으로 날 좋아하지. 그건 확실히 알아. 하지만 그게 사랑인지는 모르겠어.”
* * * 기르골은 지붕에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워 달을 구경했다. 홀로 음악을 감상하는 것처럼 한 번씩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젓기도 했다. 자신에게만 들리는 어떤 음악이 있는 것처럼. 그러다 일순간 그의 손동작이 우뚝 멈추더니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며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달을 향하던 눈동자는 손톱만큼 옆으로 이동해 자신의 달 감상을 방해한 인기척을 보았다. 여관 입구 앞. 키는 작지만 건장한 덩치의 사람이 마법사들이 자주 착용하는 로브를 둘러쓰고 서 있었다. 기르골은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그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폭발 전문 마법사?”
기르골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워낙 사방이 조용하다 보니 알아듣기 어렵지 않았다. 로브를 쓴 사람은 손에 쥔 커다란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사람을 해친 흉악범이 날 찾는다 들었는데.”
고작 몇 마디 말을 하는데도 지팡이에서는 하얀 불꽃 같은 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마치 사람 키보다 크고 길쭉하게 늘린 대형 스파클라처럼.
“네가 맞구나.”
그걸 본 기르골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기르골이 히죽 웃었다. 내내 지붕에 달라붙어 있던 상체도 스륵 위로 올라왔다. 폭발 전문 마법사가 든 지팡이에서는 불꽃이 더욱 위협적으로 번쩍거렸지만, 기르골의 얼굴에는 그저 만족스러워하는 웃음만 걸려 있었다. 폭발 전문 마법사는 지체 없이 지팡이를 두 손으로 넓게 잡고서, 지팡이 몸체를 얼굴 가까이 붙이며 끝을 기르골을 향해 겨누었다. 기르골은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대는 도박은 안 하는 게 낫겠다.”
기르골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법사의 지팡이 머리 부분에 고였던 불꽃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기르골을 향해 겨눈 끝을 통해 쏘아졌다. 눈 깜짝할 사이 번쩍이던 빛은 기르골의 코앞에 도착해 그의 머리카락을 마구 흩날리게 만들었다. 굉음을 내며 발밑의 지붕이 무너지고 사방의 나무가 듬성듬성 사라졌다. 뿌옇게 피어오른 연기 때문에 기르골의 모습은 아예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마법사는 지팡이를 내리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여관에서 자신을 찾는 게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단 여관 주인의 말을 듣고서 많이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는 상대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낮에 와도 질 텐데. 하필 또 밤에 왔네.”
바로 뒤에서 스산한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무언가가 그의 목을 물어뜯었다. * * * 수도로 돌아온 라틸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집무실로 걸어가며 마중 나온 시종장에게 물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별일은 없었습니까?”
“예. 평화로웠습니다. 폐하의 이번 생일 연회에 관한 문의가 많긴 했습니다. 이쯤이면 이미 준비가 한창이어야 하는데, 전에 중단시키신 후로 별말씀이 없으셔서요.”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장갑을 벗어 다른 시종에게 건넸다.
“카리센에선 연회 도중에 좀비가 나타났고. 우리 쪽에선 연회 도중에 카리센 대리 공사가 죽었습니다. 할까 말까 계속 생각은 해 봤는데, 역시 이번은 넘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여러모로 상황이 좋지 않으니 후궁들을 데리고 식사만 할 겁니다.”
라틸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간 다음 그 외 다른 일들을 보고 받고, 급한 순서대로 안건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속도가 빠르진 않았다. 라틸은 자신이 제왕학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즉위한 걸 알고 있었고, 조금만 실수를 해도 그 점을 공격받으리란 점도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하나하나 선대의 사례를 찾아보고 여러 관리들의 조언을 들으면서 처리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참 그간의 안건을 살피며 업무에 몰두해 있을 때였다. 잠깐 기지개를 켜고 있자니, 옆에서 내내 기회를 엿보던 시종이 슬쩍 라틸에게 말을 걸었다.
“폐하. 실은 타시르 님께서 폐하를 두 시간이나 기다리고 계십니다.”
라틸은 팔을 내리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타시르? 그 얘길 왜 지금 하느냐.”
“타시르 님께서 절대로 방해하지 말라 하셔서요.”
“그래도 그렇지.”
시계를 확인한 라틸은 시종의 융통성 없음을 탓했다. 시종은 더욱 죄스러워하며 쩔쩔맸다.
“폐하께서 가장 기분이 좋을 때 불러야 한다고, 절대로 방해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이미 타시르가 두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시종을 더 탓해봐야 소용이 없다 싶자, 라틸은 타박하길 멈추고서 서류를 덮으며 지시했다.
“들어오라고 해.”
시종이 나가자 잠시 뒤 타시르가 안으로 들어왔다. 검은 정장 차림을 하고서 평소처럼 커다란 목걸이와 귀걸이로 화려하게 치장한 그는, 아름다웠지만 권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느긋한 분위기와 달리 그의 손은 아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천으로 덮은 커다란 무언가를 질질 안으로 끌고 들어오고 있었다. 라틸은 펜을 잉크병에 꽂아두다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게 무엇이냐?”
그것은 겉으로 보아서는 무엇인지 쉽사리 짐작이 가지 않았다. 타시르는 히죽 웃으면서 그것에 슬그머니 손을 기대고 서서 물었다.
“뭐 같습니까?”
“이젤?”
“…….”
“맞구나.”
타시르가 여우 같은 미소를 짓고서 재미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자, 라틸은 웃으면서 시종들에게 나가라 손짓했다. 시종들이 물러나자 타시르가 라틸의 책상 곁으로 이젤을 끌고 오면서 계속 구시렁댔다.
“깜짝 선물을 하는 보람이 없네요. 바로 알아맞히시고.”
“선물이야?”
“곧 폐하의 생일이니까요.”
“봐도 돼?”
라틸의 질문에 타시르가 이젤에서 손을 떼고서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얼마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듯. 라틸은 일어나서 천을 들춰보았다. 안에서 나온 건 라틸을 그린 초상화였다. 궁정 화가들이 그린 라틸의 초상화처럼 섬세하고 기술적인 아름다움은 없었으나, 꽤 잘 그린 초상화.
“네가 그렸어?”
라틸이 묻자 타시르가 뻐기듯 가슴을 펼치며 턱을 들어올렸다.
“마음에 드십니까?”
“너 그림 잘 그리는구나?”
라틸은 활짝 웃고 타시르를 본 다음 다시 초상화를 바라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네 생일에 나도 그림 그려줄게.”
그 말에 타시르는 입은 웃는 것처럼 하면서 눈썹을 찡긋 구겼다.
“혹시 선물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 마음에 든다.”
“마음에 안 드시는 것 같은데.”
“아니, 정말로 마음에 들어. 너야말로 네 선물에 자신 없느냐? 같은 선물을 해준다는데 왜 그러지?”
“저야 그림을 잘 그리니 그림 선물이 가능하지만, 폐하가 그림을 잘 그린단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그 말에 라틸은 하하 웃어넘겼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 너도 남한테 생일 선물할 정도로 잘 그리진 않아, 하고. 어쨌든 선물해 준 당사자 앞에서 할 말은 아닌지라, 라틸은 적당히 고마움을 표시하고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 청한 다음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런데 소매를 걷고 펜을 챙기면서 보니 여전히 타시르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라틸을 빤히 보고 있었다. 딱 보아도 꿍꿍이가 가득한 얼굴인지라 라틸은 도로 펜을 내리고서 물었다.
“뭐야. 왜 그렇게 보는데. 더 할 말 있느냐?”
그 질문에 타시르는 같은 질문으로 답했다.
“부부 사이니까 폐하, 좀 격의 없는 질문을 드려도 될지요?”
좀 찝찝하긴 했으나 라틸은 그러라고 했다. 타시르는 라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격의 없이 질문을 던졌다.
“우리 폐하께서는 예술적인데 조금 야한 그림을 좋아하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