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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딱 보면 압니다 (148/367)

148화. 딱 보면 압니다2021.07.28.

왜 이런 질문을 하지? 저렇게 멀쩡한 그림을 선물해 놓고? 라틸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1655110499648.png“잘 그리면 좋겠지.”

그러자 타시르는 손뼉을 딱 치더니 평소보다 더 여우처럼 웃으며 라틸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가 속삭였다.

16551104996485.png“사실 초상화는 눈속임이고 저 안쪽에 진짜 선물이 하나 더 있답니다.”

1655110499648.png“그거 야한 그림이구나.”

라틸이 대번에 알아듣고서 묻자, 타시르는 액자 귀퉁이에 달린 보석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16551104996485.png“여길 누르면 나옵니다. 혼자 있을 때 보시지요.”

그 말을 하자마자 타시르는 더 이상 황제를 방해할 수는 없다면서 얼른 밖으로 나갔다. 홀로 방에 남게 된 라틸은 큼큼 헛기침을 하고서 타시르가 준 초상화를 빤히 보았다. 그냥 보아서는 멀쩡한 초상화. 하지만 액자 귀퉁이에 확실히 장식용 보석 하나가 달려 있긴 하다. 라틸은 괜히 주위를 한 번 더 불러본 다음, 얼른 몸을 반쯤 일으켜 보석을 꾹 누르고 도로 의자에 앉았다. 대체 무슨 그림이기에 혼자 보라고?

1655110499648.png“…….”

하지만 기대하며 쳐다봐도 초상화는 그냥 초상화였다.

1655110499648.png‘뭐야. 농담이었나?’

타시르가 안쪽에 무슨 그림을 숨겨놓은 걸까 기대했던 라틸은 실망해서 도로 의자에 앉아 펜을 쥐었다.

1655110499648.png‘하긴. 타시르라면 이런 장난을 치고도 남을 사람이지.’

그러나 딱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라틸은 액자 쪽에서 ‘기긱 기긱’ 하고 작은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1655110499648.png‘음?’

라틸은 몸을 일으키고서 옆을 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초상화 그림이 3/4쯤 돌아가 있었다. 갑갑할 만큼 느린 속도로 초상화가 돌아가면서 안쪽의 다른 그림과 위치를 바꾸고 있던 것이다.

1655110499648.png‘아, 이래서 버튼을 누르라 했구나.’

라틸은 신기해하며 책상에서 일어나 이젤 앞으로 가 섰다가 ‘으악’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1655110499648.png‘타시르! 이 인간이 진짜!’

멀쩡한 초상화와 자리를 바꾼 그림은 유혹하는 자세로 침대에 누워 있는 타시르의 그림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림 속 타시르가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밑에 쓰여 있는 작은 문구. -과장하지 않았습니다. 의심스러우시다면 확인 가능합니다. 얼굴에 열이 확 올라와서 라틸은 맙소사, 하고 작게 욕을 뱉었다. 누가 봐도 과장한 게 분명하도록 그려 놓고서 과장한 게 아니라니. 만약 이게 과장한 게 아니라면 타시르는 본인이 전에 한 말처럼 보물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거였다. 아니, 이게 진짜라면 그는 국보로 삼아 마땅했다. 라틸은 너무 남사스러워서,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그림을 빤히 쳐다보다가 손부채질을 했다.

1655110499648.png“어휴, 얘는 뭐 이런 걸 선물로……. 어휴.”

그 순간. 뒤에서 “폐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 라틸은 황급히 온몸으로 그림을 가리고 섰다. 놀란 라틸은 몸으로 그림을 가리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문 뒤에서 난 소리였다. 안심을 하긴 했지만 아까 너무 놀라서인가.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뛰어와서, 라틸은 새된 목소리로 “왜 그러느냐.” 하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면서도 손가락은 미친 듯이 액자에 달린 버튼을 눌러대고 있었다.

16551105025703.png“서넛입니다. 급히 보고 드릴 일이 있어 왔습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온 서넛의 목소리에 라틸은 더욱 조급히 버튼을 눌러댔다.

1655110499648.png‘젠장, 바뀌어라 바뀌어라 바뀌어라!’

하지만 처음 그림이 돌아갈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그림은 아주 느릿하게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답답할 정도로 느긋하게.

1655110499648.png‘타시르, 진짜!’

16551105025703.png“폐하? 괜찮으십니까?”

문 뒤에서 서넛이 다시 부르자, 라틸은 결국 천으로 그림을 도로 덮은 다음 황급히 책상 앞으로 가 앉고서 들어오란 표시로 종을 쳤다. 곧 문이 열리고 서넛이 들어왔다. 정말로 급한 소식인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라틸은 아직도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애써 태연한 척 물었다.

1655110499648.png“그래, 무슨 급한 일이지?”

그 바람에 평소 서넛에게 농담처럼 써주던 기사 말투도 쓰지 않았지만, 라틸은 경황이 없어 눈치채지도 못했다. 반면 서넛은 라틸이 목덜미까지 빨개진 데다 손가락과 다리를 계속 달달 떨어대자 놀라서 가까이 다가갔다.

16551105025703.png“폐하, 괜찮으십니까?”

얼마나 빠르게 다가왔던지 순간 액자에 덮어둔 천이 약간 흘러내릴 정도였다.

1655110499648.png“!”

라틸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가 천이 아주 약간만 움직일 뿐 제대로 걸려 있자, 안도해서 도로 의자에 앉았다.

1655110499648.png“괜찮다. 그래, 무슨 일이지?”

16551105025703.png“그리 안 괜찮아 보이십니다. 얼굴이 붉으신데요.”

1655110499648.png“괜찮아. 그냥…… 매운 걸 먹어서 그래.”

서류로 가득한 책상을 본 서넛은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라틸이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걸 알아차렸기에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순순히 원래의 목적을 밝혔다.

16551105025703.png“아이니 황후가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급보로 받아 자세하게는 듣지 못했지만요.”

1655110499648.png“아이니 황후가?”

라틸은 뺨을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두 손으로 얼굴을 연신 누르며 물었다.

16551105025703.png“예.”

1655110499648.png“다가 공작이 꾸민 짓인가?”

16551105025703.png“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다가 공작 쪽도 당황해서 황후를 찾아다닌다고 합니다. 하이신스 황제 쪽에서도 찾아다닌다고 하고요.”

1655110499648.png“납치일까? 아니면 그냥 독자적인…….”

말하다 보니 라틸은 무언가 기억나는 바가 있어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인지 카리센에 머물 때, 아이니 황후가 칼라인에게 보내던 그 기묘한 집착이 떠올라서. 라틸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이 일과 그 일이 혹시 연관이 있진 않겠지?

16551105025703.png“폐하?”

라틸이 갑자기 미간을 구기고 말을 멈추자 서넛이 라틸을 불렀다. 라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을 저었으나 여전히 그 생각에 잠겨 말을 잇진 못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카리센의 황후가 타리움의 후궁이 자신의 전생 연인이라면서 가출해 달려오는 건 말이 안 된다. 말이 안 되는데…… 그 말이 안 되는 행동을 아이니 황후는 계속했다. 칼라인과 엮이지만 않으면 멀쩡한, 아니, 멀쩡하다 못해 제법 침착하고 점잖은 황후인데 유독 칼라인과 엮이면 자제심이 떨어지곤 했지.

1655110499648.png“……아냐.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겠지.”

16551105025703.png“무슨 말씀이십니까?”

1655110499648.png“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이니 생각을 하다 보니 다시 마음이 가라앉았고 라틸의 말투도 평소처럼 돌아왔다. 라틸은 굳이 서넛에게 남의 나라 황후가 이상하더란 말을 하는 대신 적당히 고개만 끄덕였다.

1655110499648.png“다가 공작이 꾸몄든, 3자의 습격이든, 독자적인 가출이든, 당장 우리가 뭘 해줄 건 없을 겁니다. 카리센과 타리움 사이엔 거리가 있으니, 어쩌면 이 소식이 전해지는 동안에도 이미 황후를 찾았을지도 모르고.”

16551105025703.png“그렇지요. 아, 그리고 여기. 전서조로 서신이 왔습니다. 라우라 씨가 전하러 오다가 다른 일이 생겨서 대신 가져왔습니다.”

볼일을 다 마쳤는지 라틸의 책상 위에 여러 통의 편지를 내려놓은 서넛은 꾸벅 인사를 하고서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아까 위태롭게 한 번 흔들렸던 천이 결국 스르륵 아래로 툭 떨어졌다. 라틸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으나 이미 서넛은 그림을 본 후였다. 라틸은 얼음이 되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넛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서넛은 양 눈이 호두알처럼 변해서 그림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1655110499648.png‘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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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틸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기계가 돌아가고 그림 두 개의 위치를 바꾸면서 미약하게 진동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아니면 제자리에 잘 걸어둔 덮개가 혼자 떨어질 리가! 하지만 이 와중에 덮개가 떨어진 원리 따위는 소용이 없었다. 라틸은 입술을 잘근잘근 물면서 빠르게 변명했다.

1655110499648.png“그냥 타시르가 장난친다고 갖다준 거다. 절대로 내가 보고 싶어서 그리라고 한 게 아니고. 내가 이런 걸 좋아하고 그런 것도 아니고.”

분명 놀리겠지. 엄청나게 놀려댈 거야. 아주 제대로 건수를 잡았으니, 서넛 성격이라면 분명 라틸이 죽고 난 다음 장례식에서도 이 이야기를 꺼낼지도 몰랐다. 아니면 비석에 새기거나. 그래, 저 인간은 분명 비석 아래에 작게 새겨둘 거다. ‘라트라실 황제, 후궁의 알몸을 그려 액자에 두고 가끔 보며 업무를 하시다’ 이런 식으로. 그러고서 자기 후손들에게 읽어보게 하겠지. ‘내 주군은 이렇게 음흉한 사람이었단다.’ 하고 설명하면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라틸은 서넛의 등을 떠밀었다.

1655110499648.png“나가. 볼일 다 봤으니 나가.”

그러나 서넛은 나가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힘주어 딱 버티고서, 굳이 손가락을 뻗어 그림의 한 가운데를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16551105025703.png“이건 가짭니다.”

1655110499648.png“나가!”

16551105025703.png“그림이 미화되었습니다. 딱 봐도 압니다. 그자는 저런 체형일 수가 없습니다.”

1655110499648.png“나가라고!”

  * * * 목덜미부터 어깨를 화염 거인이 쥐어뜯어내는 듯한 통증에 마법사는 몸을 데굴 굴렀다. 숨을 헐떡이면서 몇 번을 구르자 이마에 차가운 벽이 닿았다. 마법사는 눈을 뜨고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건물의 기둥과 벽 일부 정도만 남아 있는 폐가였다. 이미 바닥을 뚫고 풀이 올라온 집. 어디지? 의아했지만 일단 살아 있다는 데 만족하며 마법사는 부서진 벽을 꽉 잡고 후들후들 떨리는 몸을 일으켰다. 지팡이가 사라졌단 걸 알았지만 지금은 지팡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마법사는 자신의 목을 물어뜯은 그 괴물 같은 하얀 머리를 떠올리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피했는지, 언제 뒤에 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건 사람의 속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다시 목덜미가 지끈거려온다. 마법사는 목 부근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에 거칠한 피딱지가 느껴졌다. 그 사이로 움푹 들어간 상처까지.

16551105117373.jpg“제기랄.”

욕설을 뱉은 마법사는 손을 내리고 건물 잔해에 주저앉아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그 하얀 머리가 사람이 아니라면 이 일을 어디에 보고해야 하지? 아카데미에는 지팡이를 새로 만들면서 보고하면 될 것이다. 그럼 국가 기관에는? 신전에도 알려야 할까? 알린다면 뭐라고? 그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뒤에 왔긴 했지만 사실 그 외 괴물이라 할 부분을 본 건 아니다. 속도가 사람 같지 않았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가 과장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자는 속도나 공간 관련 마법사일지도 몰랐다. 아직 그런 마법사를 본 적은 없지만, 없으리란 법도 없지 않나. 그리고……. 마법사는 생각하길 멈추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공격을 받아서인가. 아니면 그자에게서 이상한 병이라도 옮은 건가. 온몸이 따끔거리고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조금씩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직 주위는 어두웠지만 이동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의원부터 찾아가자. 마법사는 그렇게 결정하고서 발을 옮겼다. 온몸을 달군 모래로 비비는 양 점점 몸이 거슬거슬하고 따가워지고 있었다. 몸살이 심하게 난 게 분명하니 얼른 누워서 쉬고 싶었다. 그 순간. 산 너머로 빨간 해가 머리를 내미는데, 갑자기 몸을 비비는 모래 알갱이의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16551105117373.jpg“으아악!”

마법사는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을 뒹굴다가 본능적으로 햇볕을 피해 폐가 안으로 들어갔다. 지붕이 없어 햇볕을 온전히 피하진 못했으나 그는 가까스로 벽에 등을 붙이고 기대어 섰다. 그늘에 서자 그 뜨겁고 따가운 감각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마법사는 숨을 헐떡이면서 이게 무슨 일인지 생각하다가 자신의 팔을 보았다. 뜨거운 모래에 비빈 느낌이 그저 환상이 아닌 듯 정말로 팔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16551105117373.jpg“이게, 이게 대체……?”

마법사가 기댄 벽 뒤쪽에서 그 대답이 들려왔다.

16551105117373.jpg“이대로 두면 그대는 괴물도 사람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가 되겠지. 이성을 잃고 떠돌아다닐 거야. 우리의 위대한 폭발 전문 마법사가 반쪽짜리 괴물이 될 줄이야.”

마법사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벽 뒤로 돌아갔다. 그곳에 하얀 머리 남자가 앉아 있었다. 태연히 벽에 기대어 서서 긴 다리를 쭉 펼친 채.

16551105117373.jpg“너……!”

분노하려는 그에게, 남자는 ‘쉿’ 하고 입술 앞에 검지를 가져다 대더니 큰 비밀을 알려주려는 듯 충고했다.

16551105117373.jpg“조용. 마법사가 반쪽짜리 뱀파이어가 됐단 걸 들키고 싶어?”

16551105117373.jpg“뱀파이어라니…….”

마법사의 눈이 커다래졌다. 지금 저자가, 저자가 자신이 뱀파이어가 됐다고 말하는 건가? 마법사가 숨만 헐떡거리고 있자 기르골이 빙그레 웃고서 몸을 일으켰다.

16551105117373.jpg“내가 시키는 걸 제대로 해오면 원래대로 돌려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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