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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겉모습이 무뚝뚝할 뿐 뇌까지 딱딱하진 않다 (154/367)

154화. 겉모습이 무뚝뚝할 뿐 뇌까지 딱딱하진 않다2021.08.18.

라틸은 자신의 말을 도로 싹싹 주워 담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어졌다. 도미스 얘기는 왜 꺼낸 거야? 속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그 이름을 꺼내서 뭐 좋은 말을 들을 거라고. 칼라인이 무어라고 말을 하든 불편할 화제가 아니던가.

16551106330611.png“제가 만난 사람은 도미스가 아니었습니다.”

역시나. 칼라인은 예상대로 부정했으나 라틸은 대답을 듣자마자 더욱 언짢아졌다. 내 눈으로 도미스를 만나는 걸 보았는데 왜 거짓말하지? 이런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16551106330616.png“솔직하게 말해도 되는데, 칼라인.”

16551106330611.png“누가 주인께 그런 말을 했습니까? 제가 도미스를 만났다고?”

16551106330616.png“내 정보원을 네게 알려줄 수는 없지.”

16551106330611.png“누가 전했든 멍청한 사람이로군요.”

16551106330616.png“……멍청?”

16551106330611.png“도미스가 누구인지도 모르고서 주인께 헛소리를 해서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칼라인이 말하는 멍청한 사람도, 헛소리를 한 사람도 모두 라틸이었다. 칼라인은 본의 아니게 라틸을 연거푸 공격했다. 입안에서 홍차의 쓴 뒷맛이 확 올라왔다. 라틸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빈정거렸다.

16551106330616.png“왜, 나한테 네 이야기를 해 준 사람도 도미스 얼굴을 알 수도 있지. 굉장한 미녀라면서. 기억에 남을 거 아냐.”

16551106330611.png“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16551106330616.png“그러던데?”

칼라인은 홍차에 손도 대지 않았다. 라틸은 그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홍차를 마시지 않았을 뿐인데. 라틸은 이것조차 기분이 나빠졌다. 라틸의 얼굴 근육 여기저기가 씰룩였다. 칼라인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16551106330611.png“주인. 주인은 도미스의 얼굴도 모르잖습니까.”

16551106330616.png“…….”

16551106330611.png“그런데 남의 말만 믿고 제 말은 믿지 않을 겁니까?”

남의 말이 아니라 내 눈을 믿는 거야, 칼라인. 라틸은 그렇게 생각하고서 괜히 칼라인의 찻잔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칼라인이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내리자 라틸은 터무니없이 지시했다.

16551106330616.png“다 마시고 가. 배 아픈 거 아니면.”

16551106330611.png“의외로 속이 좁으시군요.”

16551106330616.png“이제라도 알았으니 지금부터라도 세심하게 날 살피도록 해.”

16551106330611.png“!”

16551106330616.png“홍차는 다 마시고 가.”

라틸이 벌떡 일어나자 칼라인은 한 번에 홍차를 입에 털어 넣었다. 라틸은 입술을 꽉 다물고서 이마를 구겼다. 기분이 정말로 이상했다. 복잡했다. 칼라인이 저렇게 나오자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안도가 되기도 했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건 싫었다. 하지만 저렇게 나온다는 건, 일단 후궁을 그만둘 생각은 없단 게 아닐까?

16551106330616.png“홍차 다 마시고 빨리 가. 지금은 더 얘기하고 싶지 않네. 나중에 마저 이야기하지.”

16551106330616.png‘이 화제로 할 말이 더 있는진 모르겠지만.’

16551106330611.png“다 마셨습니다.”

16551106330616.png“그럼 가. 피로하군.”

중얼거린 라틸은 침대로 가서 일부러 털썩 드러누워 버렸다. 사실은 전혀 피곤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칼라인은 순순히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침대 가로 천천히 다가와서는 라틸을 내려다보았다.

16551106330616.png“나가라 했다, 칼라인.”

그 무엄한 태도에 라틸은 미간을 구기고서 재차 명령을 내렸다. 칼라인은 이번에는 지시대로 두 걸음을 느리게 물러나 섰다. 하지만 나가지는 않았다. 라틸은 인상을 찡그리고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16551106330616.png“안 나갈 거냐.”

16551106330611.png“생일 선물로 무엇을 가지고 싶으십니까?”

지금이 생일 선물 이야기할 때냐고, 라틸은 속으로 버럭 외치다가 고개를 저었다.

16551106330616.png“지금은 생일 선물 따위 얘기할 기분이 아니다.”

16551106330611.png“그러면 제가 임의로 고르겠습니다.”

16551106330616.png“마음대로 해라. 그게 내 마음에 들진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칼라인도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방 안을 찬찬히 감돌던 홍차 향까지 주르륵 빠져나갔다. 라틸은 이마에 팔을 올리고서 자신을 질책했다. 도미스 얘기는 왜 물어본 거야, 바보같이. 칼라인이 나가자 분노는 빠르게 가라앉았지만, 그 자리를 수치심이 차지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이신스가 아이니와 결혼할 때도 나름 잘 참아냈다. 술과 시간과 여러 상황의 힘을 좀 빌긴 했지만. 그래도 잘 참아낸 건 분명했다. 그런데 칼라인은…… 솔직히 아직 하이신스만큼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방금은 왜 이렇게 감정에 휩쓸리듯 대응했던 걸까. * * * 라틸과 비슷한 의구심을 칼라인 역시 품게 되었다. 칼라인은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밤의 회랑을 홀로 걸어가며 몇 번이나 라틸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라틸은 누군가 자신에게 칼라인이 도미스를 만났단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했지만, 그게 이상했다. 도미스는 500년 전의 사람. 도미스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아는 인간은 없었다. 부하 뱀파이어들 중엔 있겠지만, 그들이 라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리도 없었다.

16551106330611.png‘혹시 주인이 직접 보았나?’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라틸 역시도 도미스의 얼굴을 모르긴 마찬가지일 테니.

16551106330611.png‘몇백 년을 함께한 부하라도 배신은 할 수 있지. 그들 중 누군가 주인에게 알려주었을 수도 있긴 하지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칼라인은 우뚝 멈추어 섰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라틸의 침실이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평소에는 아주 느리게 뛰는 심장이 좀 더 속도를 높였다.

16551106330611.png‘혹시 주인이 직접 보았나? 주인이…… 전생의 기억을 찾아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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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다음 날 아침. 라틸은 평소 일정처럼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으나, 그 사이에 이상한 명령을 하나 섞었다.

16551106330616.png“빨간 머리에 초록색 눈. 굉장히 화려하게 아름다운 여자. 이름은 도미스. 나이는 나랑 비슷한 정도고. 찾아봐. 수도 안에 있을 거야. ……어제는 흑사신단 본사 맞은편에 있는 식당에 있었대. 게시판 같은 데서 공개적으로 찾진 말고.”

라틸의 지시가 영 뜬금없다고 여겼으나 시종은 의문을 제기하진 않았다.

16551106418937.jpg“예. 찾는 대로 바로 보고하겠습니다.”

시종이 공손히 대답하고 나가자 라틸은 덤덤한 얼굴로 펜을 쥐었다. 그러나 심장은 콩닥콩닥 뛰었다. 도미스를 찾아서 뭐 하려고? 칼라인이랑 주선이라도 해 주려고? 그런 것도 아니면서 왜 찾는 거야? 아니야. 찾아봐서 나쁠 것도 없어. 칼라인은 내 후궁이잖아. 도미스는 내 후궁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위치 좀 파악해 둔다고 뭐 어때. * * * 라틸이 도미스의 기억을 찾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그 애틋한 정도 다시 떠올리는 걸까. 감정은 기억을 따라가는 걸까 아니면 심장에 남아 있는 걸까. 칼라인은 느리게 뛰는 심장 위에 손을 올리고서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16551106330611.png“주인…….”

도미스의 기억을 찾으면 라틸이 무어라고 할지 너무나 궁금했다.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도미스의 속을 썩인 대가를 지금에서야 치르는 거라고 놀려대지 않을까? 아니면 그저 마음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손을 잡아줄까? 칼라인은 그 자리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그저 그렇게 웃고만 있었다. 행복한 기대로 가득 찬 상념은 서넛이 찾아오고서야 잠시 멈출 수 있었다.

16551106418946.png“이걸 봐주십시오.”

서넛은 검은 천으로 싸서 들고 온 길쭉한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을 탁상 위에 내려놓고 천을 들추자 안에서 부서진 검이 나왔다. 임시 검집으로 날 부분만 추가로 감싸 둔 우스운 모양새였으나, 손잡이에 세공된 문양이 정교하고 섬세한 것이 딱 보기에도 값비싼 보검 같았다.

16551106330611.png“비싸 보이는군.”

16551106418946.png“가문의 보검입니다.”

너희 가문의 보검을 왜 나한테? 칼라인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서넛이 검날에 덧대둔 임시 검집을 빼며 덧붙였다.

16551106418946.png“폐하께서 부러뜨리셨습니다. 한번에요.”

16551106330611.png“점점 더 강해지시는군.”

16551106418946.png“이러다가 갑자기 각성하는 겁니까? 어느 순간에 갑자기?”

질문을 던진 서넛은 심란한 눈으로 검을 바라보다가, 다시 임시 검집을 날에 끼워 넣었다. 칼라인은 서넛이 부서진 검을 검은 천으로 도로 싸는 걸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16551106330611.png“그냥 되는 건 아니고. 조건이 있지.”

16551106418946.png“조건이라니요?”

16551106330611.png“성장통과 결단.”

16551106418946.png“성장통? 몸이 아픈 겁니까?”

16551106330611.png“아니. ……마음이.”

시련이나 역경을 극복해야 한단 뜻인가? 칼라인의 설명은 두루뭉술해서 바로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칼라인이 더 설명할 마음이 없어 보였기에 서넛은 그 이상 질문하진 않았다. 그는 가만히 검은 천을 이리저리 움직여 검만 꼼꼼히 쌌다. 그래도 결국 질문 하나는 하고 말았다.

16551106418946.png“그러면 평생 마음 아플 일이 없으면 폐하께서 각성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겁니까?”

16551106330611.png“그런 로드는 없었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16551106418946.png“폐하께서 각성하지 않으신다면 좀비나 흑마법사, 뱀파이어 같은 어둠에 속한 존재들이 더 늘어나지 않고요?”

16551106330611.png“그런 로드가 없었기에 딱 잘라 말하기 어렵군.”

서넛은 마음이 좋지 않아졌다. 라틸이 각성을 하면 자신과 유대감이 강해질지 모른다. 이건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라틸이 각성할 만큼 마음에 성장통을 겪을 일은 없길 바랐다.

16551106418946.png“알았습니다.”

어쨌든 본론은 다 마쳤기에 서넛은 검을 챙겨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의 은밀한 친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알 테지만, 그래도 황제의 근위기사단장과 후궁이 너무 친밀하게 굴면 야심을 가지고 결탁한 것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16551106330611.png“잠시.”

그러나 밖으로 나가려는 서넛을 칼라인이 갑자기 붙잡았다. 서넛은 문고리를 잡은 채 칼라인을 돌아보았다.

16551106418946.png“무슨 일이십니까?”

칼라인은 입이 무거웠다. 그가 먼저 서넛을 붙잡았다면, 무언가 심각하고 신경 쓰이는 정보가 떠올라서가 분명했다, 하지만 칼라인이 뱉은 질문은 엉뚱하고 지극히 사적이었다.

16551106330611.png“곧 주인의 생일이지. 생일 선물을 줘야 하는데.”

16551106418946.png“그런데요.”

16551106330611.png“뭘 드리는 걸 좋아할까. 너는 오래 같이 있었으니 알겠지. 주인께서 무슨 선물을 좋아하시지?”

16551106418946.png“…….”

서넛은 제대로 대답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반, 거짓말로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반이어서, 입을 다물고 입꼬리만 경직된 채 올렸다. 칼리인에게 제대로 알려줘서 그가 라틸의 총애를 받게 되는 것도 싫었고, 칼라인이 라틸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싫었다. 그렇지만 근위기사인 그가 황제의 후궁에게 황제가 뭘 좋아하는지조차 알려주지 않았다가는…….

16551106330611.png“서넛?”

칼라인이 그를 재촉했다. 거짓말을 하건 진실을 대답하건 뭐라도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서넛은 고민 끝에 거짓말을 선택했다.

16551106418946.png“왕반지를 좋아하십니다.”

16551106330611.png“왕반지?”

16551106418946.png“예. 모양이나 디자인은 다 필요 없고, 그저 가운데 박힌 알이 크고 화려하면 다 좋아하시지요. 무기로 삼아도 될 정도로 커다래야 합니다.”

칼라인의 표정이 이상하게 뒤틀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하는 표정. 칼라인도 라틸의 평소 치장에 대해 모를 리가 없으니 의구심을 느낄 만도 했다. 그래도 서넛은 자신의 거짓말을 밀고 나갔다.

16551106418946.png“좋아하시는 게 맞습니다. 평소엔 거추장스러우니 안 하실 뿐이지요. 보석함에 넣어두고서 소중히 대하실 겁니다.”

서넛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되는대로 아무 말이나 뱉었으나, 그러면서도 칼라인의 눈치를 살폈다. 칼라인과는 앞으로도 계속 알고 지내야 하기에 이런 대답을 해도 좋을지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칼라인은 전혀 의심하는 기색 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평소보다 좀 더 밝게 서넛의 어깨를 두드렸다.

16551106330611.png“그러면 반지로 사면 되겠군. 네게 큰 도움을 받았다, 서넛.”

16551106418946.png“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16551106330611.png“당연하기는. 거절할 수도 있는데 내 말을 들어준 거 아닌가. 걱정 말게. 주인께 선물을 드리면서, 자네가 내게 조언해 준 선물이라고 꼭 말씀드리지.”

16551106418946.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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