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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화. 깨지는 꼴을 못 봤어요 (172/367)

172화. 깨지는 꼴을 못 봤어요2021.10.20.

16551116601551.jpg‘그 하얀 머리 남자. 누구였을까.’

용병 단원들이 식사를 하는 건지 명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음침하게 앉아 있는 사이. 아이니는 홀로 수프를 꾸역꾸역 떠 마시면서 어제 나타난 낯선 방문자를 떠올렸다. 섬세한 천사 같은 얼굴과 잔혹한 분위기, 원래도 붉은색이라 흠칫했는데 흰자위가 빨갛게 변하자 더욱 무시무시해 보이던 눈. 그토록 강한 칼라인을 웃으며 상대하던 강함까지. 게다가 그녀가 도미스라는 걸 알아보면서도 개의치 않던 태도는 또 어떻고.

16551116601551.jpg“괜찮아?”

그렇게 멍하니 있자니, 어제 그녀의 비명을 듣고 올라왔던 뱀파이어 용병 하나가 앞자리 의자를 당겨 앉으며 물었다.

16551116601551.jpg“어제 만난 그 사람. 아니. 뱀파이어. 그자 생각을 했어.”

아이니가 무거운 분위기로 중얼거리자 뱀파이어 용병이 한숨을 내쉬었다.

16551116601551.jpg“내가 누군지 봤더라면 좋았을걸.”

비명을 듣고 올라오긴 했으나, 방 안에 들어오기도 전에 문짝째 깔려 뒤로 넘어가 버렸다. 그 탓에 용병은 하얀 머리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16551116601551.jpg“그러게.”

아이니는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두 팔을 꽉 감싸 안았다.

16551116601551.jpg‘그 눈빛.’

죽이러 찾아왔으나 분노도 원한도 보이지 않던 그 붉은 눈을 떠올리자 새삼 팔에 소름이 돋으며 몸이 떨렸다. 용병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다.

16551116601551.jpg“불편하겠다.”

16551116601551.jpg“어?”

16551116601551.jpg“로드로 강했던 기억은 있는데 지금은 약하니까. 불편하겠다고.”

16551116601551.jpg“……그러게.”

중얼거린 아이니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약하다. 어색하게 느껴지는 단어에 입안이 썼다. 칼라인은 그녀에게 도망가라고 했다. 도망가고 싶진 않다. 하지만 정말로 그 하얀 머리가 다시 돌아온다면? 그땐 어쩌지? 그리고 그자는? 그 하얀 머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 * * 그 하얀 머리, 기르골은 춤을 추면서 숲을 걸어가고 있었다. 한 손에는 개를 산책시키는 데 쓸 법한 산책 줄을 쥔 채, 얼마나 신이 나는지 그는 흙과 나뭇잎으로 가득한 바닥이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이라도 되는 양 움직이고 있었다. 나름대로 귀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경쾌한 춤을 위해 동원된 마법사 자이오르는 저 모습을 보며 웃을 수 없었다. 기르골이 손에 쥔 산책 줄 끝에는 자이오르의 목이 연결되어 있었고, 기르골은 그에게 ‘오르골’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 말은 기르골이 산책 줄을 당기면 자이오르는 휘파람을 불어서 기르골이 춤을 잘 추도록 배경음을 깔아주어야 한단 뜻이었다. 그러다 기르골이 산책 줄을 두 번 당기면 노래를 바꿔야 했고, 세 번 당기면 노래를 멈춰야 했다. 자이오르는 이를 갈았다. 난데없이 붙잡혀 끌려가는 것도 싫었지만, 감히 황자의 측근인 자신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데는 정말로 화가 났다.

16551116601551.jpg“오르골!”

혼자 잘 노는가 싶던 기르골이 세 번 그를 당기며 부르자, 자이오르는 양 볼이 빠져라 휘파람 부르던 걸 멈추고 불만에 가득한 눈으로 미친 뱀파이어를 쳐다보았다. 기르골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낭떠러지 가장 끄트머리에 서서 두 팔을 벌린 채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16551116601551.jpg“저걸 봐.”

기르골의 제안 같은 명령에 자이오르는 순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 아래로 안개 사이에 커다랗고 새까만 성이 보였다. 여기에 성이 있다고? 자이오르는 순간 놀라서 눈을 비볐다. 저 아래는 절벽이었다. 그런데 까마득한 절벽 사이로 성이 있다고? 놀란 마음이 가시기도 전에 기르골이 산책 줄을 한 번 당기며 웃었다.

16551116601551.jpg“행진곡으로 연주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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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분무기에 물을 꽉 채운 라틸은 선인장을 향해 분노를 담아 물을 뿌려댔다. 물을 너무 많이 뿌려대서 선인장이 샤워를 한 모양새가 되자, 라틸은 그제야 물 주던 걸 멈추고 손수건을 꺼내 물기를 조금 닦아냈다. 작업을 마친 라틸은 축축해진 손수건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 벽에 기대어 쪼그려 앉았다. 기분이 너무 나빠서 견디기 힘들었다.

16551116635073.png“내가 겁내지 않으면 올 거라고?”

일부러 소리를 내어 화난 티를 내보았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라틸은 주먹으로 벽을 쾅 내리쳤다.

16551116635073.png“내가 겁내는 거 같아? 내가 무서워하는 거 같냐고.”

하지만 중얼거려 봐야 대답해주는 이는 여전히 없었다. 라틸은 씩씩거리면서 자신의 신발 끝만 초조하게 쳐다보았다. 자신이 대체 어떻게 해야 했던 걸까. 자신의 후궁이 뱀파이어란 걸 알게 된 상황에서 얼마나 더 침착해야 했던 걸까. 호위 한 명 없이 그와 독대하면서 정체를 추궁한 것만으로도, 라틸은 자신이 꽤 큰 인내심을 발휘했다고 믿었다. 어느 황제가 뱀파이어로 의심받는 후궁을 혼자 만나서 ‘너 뱀파이어니?’라고 물어본다고. 그때. 머릿속에 좋지 못한 생각이 떠오르고 지나갔다.

16551116635073.png‘혹시…… 내가 무서워서 자리를 비켜준다는 건 다 핑계고. 그냥 후궁에 자기 자리를 남겨두고서 자연스럽게 도미스를 찾아간 거 아니야?’

라틸은 벌떡 일어섰다. 칼라인과 서넛이 뱀파이어란 걸 알게 된 후. 라틸은 가짜 도미스이니 진짜 도미스이니 하는 문제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진실이 궁금하지 않아졌다. 하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역시 확인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녀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16551116601551.jpg“폐하?”

라틸이 빠른 걸음으로 방에서 나오자, 방 앞에서 대기 중이던 부기사단장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라틸을 불렀다.

16551116601551.jpg“어디 가십니까?”

16551116635073.png“확인할 게 있다.”

라틸은 나오면서 낚아채 온 재킷을 도로 걸치고서 회랑 밖으로 뛰듯이 나갔다. 그런데 돌길을 빠르게 걸어가고 있자니, 저만치 성기사들 무리에서 대신관이 라틸을 불렀다.

16551116662236.png“폐하!”

라틸이 발길을 멈추자 대신관이 얼른 이쪽으로 달려왔다. 이 와중에 그는 아주 밝은 얼굴이었다. 바로 앞으로 온 대신관은 활짝 웃으면서 인사했다.

16551116662236.png“오늘 날씨가 정말 좋지 않습니까?”

라틸은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대신관의 보라색 눈동자가 평소보다 연해 보인단 걸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정말이었다. 칼라인이 사라진 후 열이 받아서 날씨까지 우중충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하늘은 쨍하니 참 맑았다.

16551116635073.png“그러네.”

그렇다고 여기서 같이 웃으면서 “날씨 좋다 날씨!” 하고 웃을 정신은 아니라, 라틸은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대답하고 보니 괜히 애꿎은 대신관한테 화풀이를 한 기분이라, 라틸은 억지로 웃으면서 그의 등을 두드렸다.

16551116635073.png“운동해 운동.”

그러고서 돌아서는데, 대신관은 들고 있던 아령을 성기사에게 건네고는 라틸의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계속 말을 걸었다.

16551116662236.png“폐하. 폐하. 곧 폐하 생일이지 않습니까.”

16551116635073.png“운동 안 하고 왜 따라와?”

16551116662236.png“운동은 폐하가 가시고 하면 되죠.”

16551116635073.png“그건…… 그러네. 그런데 내 생일이 왜? 너도 선물 얘기하려고?”

16551116662236.png“네!”

대신관은 밝게 외치더니 반쯤 장난스럽게 고자질했다.

16551116662236.png“다른 사람들은 뭘 준비하나 알아보려 했는데요, 다들 안 가르쳐주지 뭡니까. 타시르 님은 저더러 폐하 앞에서 헐벗고 운동하라는데 이게 말이 되나요.”

16551116635073.png“!”

16551116662236.png“폐하?”

라틸은 순간 타시르 머릿속에 있던 대신관이 떠올라서, 큼큼 헛기침을 하고 충고했다.

16551116635073.png“타시르 말은 반은 흘려들어.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밖에서 운동할 때도 옷은 입고하고.”

16551116662236.png“예?”

라틸은 다시 대신관의 어깨를 두드리고서 돌아섰다.

16551116662236.png“폐하, 폐하.”

하지만 대신관은 굳이 라틸을 또 쫓아오며 불러댔다. 그러고서 옆에서 계속해서 밝게 말을 걸어대자, 라틸은 차마 ‘마음이 복잡하니 나중에 얘기하자’ 말은 못 하고 고개만 끄덕이다가 물었다.

16551116635073.png“맞다, 자이신.”

16551116662236.png“네.”

16551116635073.png“네가 그린 부적 말이다. 정말 효과가 있는 거냐?”

16551116662236.png“그럼요. 그러니 괴물이 나타나기 전에 제 부적을 전부 파낸 게 아니겠습니까.”

16551116635073.png“그렇지.”

괴물이 혼자 들어온 건지 누군가 들여보낸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타이밍에 부적이 다 파헤쳐진 걸 보면 분명 누군가 일부러 파긴 했다. 우연이라고 말하려고 해도 한두 개가 사라진 거였어야지. 호숫가 주변의 부적을 죄다 다 파헤쳤으니, 절대로 우연일 리가 없었다. 그 질문을 하는 사이. 어느새 라틸은 하렘 밖으로 나가는 정문 앞까지 도착했다. 대신관은 여기까지만 배웅할 생각인지 정문 앞에 아슬하게 우뚝 멈춰 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라틸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16551116635073.png“자이신, 혹시 너는 대신관으로서 나쁜, 아니, 나쁘진 않은데 사람은 아닌 존재가 곁에 있으면 정체를 알 수 있느냐?”

대신관은 정문과 이어진 벽에 팔을 괴고서 손 흔들 준비를 하다가, 라틸의 질문에 팔을 내리더니 고개를 기웃했다.

16551116662236.png“글쎄요. 일일이 확인해 본 적은 없어서요. 하지만 감이 오는 이들은 있습니다. 많이 아는 편일 겁니다.”

16551116635073.png“확실해?”

서넛이랑 칼라인에 대해서 한마디도 한 적 없잖아. 라틸은 떨떠름해서 대신관의 굵고 탄탄한 팔 근육을 쳐다보았다. 대신관의 안목이 의심스러운 동시에 기대감도 들었다. 정말로 사악하고 나쁜 존재라면 대신관이 알아차렸을 건데. 알아차리지 못했단 건 서넛과 칼라인은 뱀파이어여도 나쁜 뱀파이어는 아니지 않을까?

16551116635073.png‘그런데 뱀파이어도 나쁜 뱀파이어와 착한 뱀파이어가 있나? 있다면 뭘 기준으로 구분하는 거야?’

라틸은 멍하니 대신관의 팔 근육을 엄지로 꾹꾹 눌렀다. 그래. 생각해보니, 대신관이 산책을 하다가 가끔 이상한 느낌이 난단 이야기를 하긴 했다.

16551116662236.png“폐하. 혹시 호수에서 괴물이 나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16551116635073.png“어?”

16551116662236.png“호수에 묻은 부적은 분명 사람이 파낸 거니까요. 혹시 제가 그자들을 찾아낼 수 있나 궁금하신 건지요?”

16551116635073.png“아아. 그래.”

그걸 물으려던 건 아니지만 그것도 궁금한 건 맞지.

16551116635073.png“흑마법 관련된 괴물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맞는데. 사람이면서 그들과 손잡은 이들도 분명 있는 게 확실해. 전에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말이다. 그때 너도 습격받지 않았더냐.”

16551116662236.png“그렇지요.”

대신관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라틸은 ‘칼라인 어디 갔어 칼라인!’ 하고 있던 자신이 좀 부끄러워졌다. 물론 조사에 관련된 사안은 계속 보고 받고 있고 진두지휘도 하고 있었다. 그 일을 다 제쳐두고 넋 놓고 있진 않았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내내 ‘칼라인 어디 갔어!’를 외치고 있었다. 새삼 그게 민망했다. 어쩌면…… 칼라인에게 ‘네가 위험하지 않단 증거를 보여줘’라 요구할 게 아니라, 그를 제대로 감옥에 가두고 추궁해야 했던 건 아닐까?

16551116635073.png‘아니야. 칼라인은 날 구하기 위해 궁전에서 몸소 나가기까지 했다. 칼라인이 이 일과 관련 있는 뱀파이어라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할 필요는 없어.’

그때였다.

16551116662236.png“실은 정확한 건 아닌데요.”

라틸의 어두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신관이 웬일로 조금 자신감 없는 소리를 내더니, 벽에 괴었던 팔을 풀고 라틸의 앞으로 다가왔다.

16551116662236.png“사악한 존재가 만지면 색이 검게 변하면서 깨져버린단 돌이 있습니다.”

그 말에 라틸은 흠칫했다.

16551116635073.png“지금?”

16551116662236.png“여러 개 있는데 다른 건 이쪽에 없고요. 지금은 두 개만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가지고 다니고 있지요.”

라틸이 놀라 쳐다보자 대신관은 더욱 자신 없어 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6551116662236.png“아니, 그런데요, 이건 저처럼 확실한 게 아니어서요. 정말로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가 서려 있다’면서 전해지는 전설 같은 겁니다. 온갖 사악한 데 가져다 대봤지만 깨지는 꼴을 못 봤어요.”

말을 마친 대신관은 왼쪽 귀에서 작은 귀걸이를 떼서 라틸에게 내밀었다.

16551116662236.png“이거요.”

두 개를 가지고 다니고 있다 했지. 그럼 오른쪽 귀에 건 귀걸이가 또 다른 돌인가? 라틸은 생각하면서 귀걸이를 받아들었다. 순간.

16551116635073.png“!”

돌이 그대로 바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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