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난 이제 네가 무섭지 않아2021.12.12.
‘왜 저렇게 쳐다보지?’
그 시선은 라틸이 보기에도 아주 이상할 정도였다. 호감이라 하기에도 적의라 하기에도 맞지 않았다. 삼자의 시선에서 보는 라틸에게도 그렇게 여겨지는데. 당사자인 도미스가 그 시선을 받고 흠칫하지 않을 리 없었다.
“칼라인 씨……?”
도미스가 조심스럽게 중얼거렸고, 기르골은 웃으면서 도미스에게 다가오다가 칼라인의 표정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그의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아니, 자넨 왜 이러고 있어?”
대답하기 전. 두 번째 마차에서 연한 보라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천천히 마차 밖으로 나왔다. 부축을 받아 마차 밖으로 나온 그녀는 내리자마자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기르골과 칼라인을 발견하자 입가에 환한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칼라인. 기르골. 뭐 하고 있어?”
풍성한 치마에서 바삭거리는 소리를 내며 걸어온 그 여자는 친근하게 칼라인과 기르골에게 말을 걸고는, 도미스를 이제야 발견한 것처럼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는 하녀야? 왜 이러고 섰어?”
그 여자를 본 도미스는 순간 ‘엄마랑 비슷하게 생겼네.’라고 생각했으나, 그 이상 여자에게서 자기 양모를 떠올리진 않았다. 도미스의 양부모는 라틸이 아주 잠깐 봤을 뿐이지만 영주에게 ‘귀한 손님’ 대접을 받을 정도로 신분이 높거나 부유하지는 않아 보였다. 그렇기에 도미스도 양모를 닮은 여자를 보면서도 그 여자와 양모를 연관 지어 생각하진 못하는 눈치였다. 라틸 역시도 도미스처럼 저 여자가 도미스의 양부모와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라인과 기르골이 대답하기 전.
“안야, 너 또 장갑을 두고 내렸잖아.”
다정하게 잔소리를 하며 마차에서 뒤따라 내리는 한 여자의 모습이 도미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고귀해 보이는 여자를 힐긋거리던 도미스의 고개가 빠르게 마차 뒤편으로 돌아갔다. 우아한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진주가 박힌 하얀 장갑을 든 채 막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내리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남자……. 라틸은 너무 변한 그들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으나, 도미스는 두 사람을 한번에 알아보았다.
[엄마? 아빠?]
‘그 도끼 휘두르던 아빠? 그 아빠 말하는 건가?’
라틸은 도미스의 생각을 들으면서도 저 두 사람이 도미스의 양부와 양모란 걸 의심했으나,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도미스의 말이 맞단 걸 알아차렸다. 양부와 양모의 눈이 순간 커다래졌다가 다시 원래 크기로 줄어든 탓이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도미스 쪽에서 시선을 돌리더니, 양딸을 못 본 척 다시 자기들의 친딸을 불렀다.
“안야. 장갑 가져가야지.”
처음부터 제 부모의 표정을 보았더라면 이상한 점을 눈치챘을 것이지만, 안야는 칼라인을 쳐다보느라 부모의 당황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안야가 칼라인을 향해 웃어 보이고서 돌아섰을 때는 양부모 모두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다.
“왜 꼭 장갑을 끼고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어.”
“안 끼잖아. 잘 챙기기라도 하란 거야.”
“안 끼는데 왜 들고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린 안야는 장갑을 한 쪽만 끼면서 가까스로 울음을 참고 서 있는 도미스에게 지시했다.
“내 짐은 깨지기 쉬우니까 조심해서 옮기도록 해.”
도미스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안야의 인상이 구겨졌다.
“뭐야. 나 하녀한테 지금 무시당한 건가?”
양부의 표정이 도끼를 휘두를 때처럼 험악해지자 도미스는 가까스로 끊어질 듯 말듯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네…… 아가씨.”
* * * 안야의 짐을 옮겨둔 도미스가 힘없이 복도를 걸어가고 있자니, 다른 일을 하고서 지나가던 하녀 안야가 다가와 물었다.
“왜 그래? 손님들이 너한테 뭐라고 그래?”
“양부모님이 왔어.”
“양부모? 아, 전에 널 쫓아냈다는? 갑자기 그 사람들이 왜? 널 찾으러 왔대?”
“아니. 그 귀한 손님이 양부모였어. ……그 사람들 친딸이랑.”
“친딸? 나랑 이름 같다던?”
도미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야가 기가 막혀서 무어라 하려 했다. 하지만 복도 계단에 그 양부모와 안야가 올라오는 바람에, 도미스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하녀 안야가 그들을 차갑게 쳐다보는 걸 팔을 잡고서 빠르게 고개를 저어 말렸을 뿐. 그들이 오자 도미스는 황급히 그 자리만 피했다.
“잠시만, 거기.”
그러나 기껏 자리를 피해 주었는데, 계단을 내려가려는 도미스를 양모가 따라 나왔다. 도미스는 희망을 가지고 양모를 보았으나 양모는 무뚝뚝한 얼굴로 “심부름시킬 게 있는데.”라며 물을 떠다 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기르골과 칼라인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곧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마님.”
도미스는 절망적으로 중얼거리고서 황급히 그 자리를 피했다. 그러고서 부엌으로 가 물을 뜨고 나오는데, 뜻밖에도 돌아서자 양모가 보였다. 놀란 도미스에게 양모가 ‘이쪽으로’ 하고 손짓으로 알리더니, 인적이 없는 곳으로 가 무뚝뚝한 표정을 풀었다.
“도미스. 내 딸.”
심지어 양모는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도미스의 얼굴을 두 손으로 더듬어 보더니 사정을 설명했다.
“알고 보니 친척 중에 아주 부유한 사람이 있었나 봐. 그 사람의 가신들이 우리를 찾아냈어. 우리가 직계 친척이 아니어서 연락을 바로 할 수 없었대.”
“……잘 지내시는 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그래. 우리는 아주 잘 지내.”
양모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고는 도미스를 보며 웃었다.
“너도 건강히 컸네. 잘 지내는 거 같아서 다행이다.”
[난 잘 지내고 있지 않아요. 같은 방을 쓰던 하녀들이, 같이 식사하던 하인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실종될지 몰라요. 다음엔 내가 사라질 수도 있고요. 그런데 어떻게 잘 지내겠어요.]
양모는 도미스의 문드러지는 마음은 읽지 못했다. 어쩌면 읽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계속 도미스가 잘 지내서 마음이 놓인다고만 했다. 그러더니 도미스가 들고 있던 물잔을 집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죽겠단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안야도 참 잘 컸어. 누가 봐도 귀족 아가씨거든. 안야가 지나가면 모두 당연히 귀족인 것처럼 대해.”
“…….”
행복하게 웃은 양모는 다시 도미스를 보더니 슬픈 표정이 되어 말했다.
“너한텐 미안하지만…… 네가 한때 언니였단 이야기는 안야한테 혹시라도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안야는 어렵게 큰 기억이 전혀 없거든. 네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르골과 칼라인이 우리를 찾아와서.”
기르골. 칼라인. 두 사람의 이름에 도미스는 심장이 물기 하나 없이 쪽 빨리는 느낌을 받았다. 도미스가 그들에게 필요한 만큼 특별하지 않단 말을 남기고 떠난 그들이 찾아낸 ‘특별한 사람’이 동생인 안야였다니. 양부모도 칼라인도 기르골도 모두 안야에게 가버리다니. 동생은 아무 잘못이 없단 걸 알지만, 그런데도 너무 서글펐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정해진 양의 행운이 있어서, 안야가 그 모든 걸 가져가는 바람에 자신은 부스러기조차 가져가지 못하는 것 같아서. 양모는 다시 눈물을 찔끔 닦았다.
“네 아빠 몰래 다시 널 찾으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어. 마지막에 들은 소식은 네가 배를 타고 떠났단 거였단다.”
“그 자리는…….”
“자.”
양모가 망토 사이로 손을 넣더니 한 움큼 되는 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그녀는 도미스가 주머니를 받아들지 않자, 그녀가 든 쟁반 위에 주머니를 올리고서 안에서 내용물을 조금 꺼내 보여주었다. 다양한 색상의 보석들이 차르르 쟁반 위로 굴러떨어졌다.
“안야는 귀족으로만 살아와서 프라이드가 강해. 우리 과거를 알면 자존심에 상처가 날 거야. 게다가,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어차피 너는 우리 핏줄이 아니니 유산을 상속받을 수도 없어.”
“그런 거 생각하지도…….”
“하지만 너도 내 딸이었어. 그렇지?”
“!”
“네가 안야에게 상처만 주지 않는다면 내가 조용히 널 도울게. 힘든 일이 있거든 내게 말하렴.”
이윽고 양모는 자신의 새로운 집 주소를 알려주더니, 주위를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재차 당부했다.
“네 아빠가 알면 화를 낼지 모르니까, 찾아와도 꼭 나만 찾아야 한다. 알았지?”
도미스는 고맙기도 하고 서럽기도 한 오묘한 마음에 끅끅 울기 시작했다. 양모가 그 눈물을 닦아 주려는 순간.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쪽에는 칼라인이 서 있었다. 칼라인을 발견한 양모는 잠시 당황한 듯하더니 웃으면서 “자네였나.”라고 말했고, 칼라인은 도미스 쪽을 눈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는 사이인가 봅니다.”
“아. 예전에 우리가 데리고 있던 하녀라네. 이 집에 와 있을 줄은 몰라서.”
양모는 도미스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던 손수건을 집어넣고 웃으면서 그 자리를 피했다. 양모가 가버리자 도미스는 더 슬퍼져서 칼라인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칼라인. 도미스 안아줘. 도미스 끌어안고서 힘내라고 해줘!’
라틸은 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칼라인은 도미스를 끌어안아 주는 대신, 아까 마차에서 내려 몇 년 만에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혼란스러워하는 표정. 이윽고 그 표정은 ‘이 사람을 위로해주고 싶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걸 눈치챈 도미스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전 괜-.”
“네가 우니 기분이 나쁜데.”
하지만 괜찮다는 말은 칼라인의 차가운 목소리에 끊겨버렸다. 도미스가 멍하게 “네?” 하고 되묻자, 칼라인은 창백하고 긴 손가락을 뻗어 쟁반 위에 흐트러진 보석을 손가락으로 툭 굴리고서 중얼거렸다.
“너처럼 우는 모습이 기분 나쁜 사람은 처음이로군.”
* * *
“주둥이, 주둥이, 요 주둥이!”
화난 라틸은 칼라인의 얼굴을 향해 두 손을 뻗어, 그의 양 볼을 밀가루 반죽처럼 꽉 눌렀다.
그러자 눈앞에서 초록색 눈동자가 연한 금색 속눈썹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어. 손이 움직이네.”
라틸은 당황해서 칼라인의 양 뺨을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황급히 손을 내리고 외쳤다.
“칼라인?”
게다가 손만 움직여지는 게 아니었다. 이곳은 도미스가 칼라인에게 심한 소리를 듣는 정원 뒤편이 아니라, 라틸의 침실이었다. 어느새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자기가 멋대로 얼굴을 매만져 놓고서는 자기가 더 놀라 고함을 지르자, 칼라인은 당혹스러워하며 물었다.
“방금 뭐였습니까, 주인?”
“아니, 난 손이 안 움직일 줄 알고. 현실이 아니니까.”
“?”
“아니, 근데 넌 여기 어떻게 왔어?”
칼라인이 눈짓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활짝 열려 커튼이 펄럭거리는 창문. 어마어마하게 높아서 ‘사람’은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그 창문.
“이젠 사람 흉내 낼 생각도 없구나.”
라틸이 허망하게 중얼거리고 있자니, 칼라인이 침대 가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악몽을 꾸셨습니까?”
자신을 피해 제멋대로 사라져 놓고서는. 돌아오라고 몇 번이나 말해도 안 돌아와 놓고서는. 마치 어제도 보고 오늘도 본다는 듯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그 태평한 모습을 잠시 노려보다가, 라틸은 대답 대신 칼라인의 양 뺨을 다시 감싸 잡고서 애원했다.
“칼라인. 이마 한 대만 때리게 해줘.”
“!”
사실 만나면 하고 싶은 다른 얘기가 많았는데. 지금은 다른 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그러다 칼라인이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과거의 기억에서 완전히 깨어난 라틸은, 그의 멱살을 쥐고 잡아당겨 차가운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숨결이 오가는데도 그의 입안은 차가워서, 마치 시린 얼음에 혀를 대는 느낌이었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라틸의 허리를 자신의 몸쪽으로 꽉 당기자, 얇은 잠옷 위로 그의 옷 감촉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라틸은 그의 얼굴을 손에 단단히 쥐고서 입맞춤을 퍼붓다가, 칼라인이 흥분한 게 느껴지자마자 입을 떼고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봐라. 난 이제 네가 무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