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포도 향을 좋아하시는지2021.12.19.
생각하고 나니 좀 부끄럽다. 이런 사소한 거로 황제가 된 걸 뿌듯해하다니. 물론 행복은 소소한 데서 찾는 거라지만, 그래도 황제가 된 행복은 이런 데서 찾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괜찮아. 나 혼자 생각하는 거잖아.’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섯 남자가 모두 라틸만 보고 있었다. 황제가 자기들을 보고 갑자기 멍하게 서 있자 의아한 표정들.
‘정말로 저 남자들이 내 속마음을 읽지 못해 다행이야.’
라틸은 안도하면서,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고 가장 상석에 있는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다들 나와 있었네.”
‘미치겠네. ‘다들 나와 있었네’라니. 너무 어색하게 말했잖아!’
개개인을 볼 때는 아무렇지 않은데. 왜 단체로 모여 있으니 상대하기 민망해지는 거지? 얼굴에 오르는 열기에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하고 있자니, 타시르가 자연스럽게 일어나 의자를 빼주었다.
“폐하를 빨리 보고 싶어서요.”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말까지 받아 주자, 라틸은 고마워서 그를 보며 웃었다. 그 고마운 마음은 라나문이 어색하게 팔을 내리는 걸 보자 또 다른 괴로움으로 변했지만.
‘쟤도 내 의자를 빼주려 했나 봐.’
라틸은 자신이 실수한 게 아닌데도 덩달아 민망해졌다. 하지만 타시르는 아무렇지 않게 라나문의 의자까지 조금 빼내 주고는 방긋 웃고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라틸은 보고 있으면 라나문이 더 민망할까 봐 일부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후궁들도 라틸이 앉자 다들 착석하고 있었다. 다행히 라나문은 타시르 때문에 손이 허공을 저어도 아무렇지 않은 듯, 근처에 서 있는 하인에게 음식을 가져오란 눈짓만 보낸다. 미리 대기하던 하인들이 한가득 접시를 올린 웨건을 끌고 오자, 순식간에 주위가 침 고이는 향으로 가득해졌다. 평소보다 잘 차려입은 하인들이 길고 커다란 테이블에 접시를 올리는 사이, 라틸은 흐뭇하게 웃고만 있었다. 하인들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나자 라틸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눈으로 확인하고서 포크를 쥐었다. 그런데 곁에서 도와주는 하녀에게 그 음식을 집어달라 말하려다 보니, 후궁들이 음식을 먹지 않고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만 있었다.
‘왜? 왜 안 먹고?’
노골적인 시선들이라, 라틸은 민망해져서 슬그머니 포크를 내렸다. 왜 저렇게들 쳐다보지? 알 수가 없었다.
‘아. 혹시 내가 연설이라도 한마디 할 거라 생각하나?’
생각해 보니 선황제가 이런 자리가 생기면 꼭 짧은 연설을 하긴 했다. 모두 사이좋게 지내라던가, 다 같이 식구라던가 이런 식으로. 당연히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고, 라틸 역시도 흘려들었다. 자신의 경험을 떠올린 라틸은, 자신이 이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하든 듣는 사람은 지겨우리란 걸 짐작하고서 후궁들을 향해 먹으란 손짓을 해 보였다.
“다들 식사하지.”
그런데 게스타는 식사를 하는 대신 배시시 웃더니 뒤쪽에 서 있는 자신의 시종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신호를 받은 게스타의 시종 트리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다가오자, 게스타는 그것을 받은 다음 라틸에게 다가와 내밀었다.
“폐하. 이거…….”
아. 아까는 선물을 주려고 다들 쳐다본 거구나. 라틸은 그제야 몇몇이 아직 선물을 주지 않았단 걸 떠올리고 웃으면서 인사했다.
“고맙다, 게스타.”
그러나 선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게스타는 라틸이 상자를 받자 작게 속삭였다.
“제가. 제가 끼워드리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선물이 장신구인가?’
“그래.”
뭔지 모르면서도 고개를 끄덕인 라틸은 약간 딱딱한 포장을 끄르고 상자 뚜껑을 열었다. 옆에서 클라인이 “시키는 것도 많네.”라고 빈정거리긴 했으나, 그는 라틸이 째려보자 바로 입을 다물긴 했다. 라틸은 완전히 상자를 연 다음 안에서 나온 영롱한 목걸이를 보고 감탄했다.
“와. 정말 예쁘다, 게스타.”
그러고서 활짝 웃는 얼굴로 게스타를 쳐다보자, 게스타가 두 손을 수줍게 뻗으며 물었다.
“제가 해드려도 될까요?”
“응.”
고개를 끄덕인 라틸은 머리카락을 위로 올리면서 목 뒤가 게스타를 향하게 몸을 돌렸다. 그러고 있자니 게스타가 상자에서 목걸이를 집는 게 희미하게 보였다. 이윽고 그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목 부위에서 조심조심 움직이는 게 느껴져서 라틸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손가락이 잔잔하게 떨리는 게 느껴져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라틸이 웃는 소리를 들은 게스타가 더욱 허둥지둥 손을 움직이다가 손가락이 목을 스치자, 라틸은 달콤한 전기가 목부터 허리를 빠르게 지나가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등을 움찔했다.
“폐, 폐하. 혹시 아프셨나요?”
거기에 놀란 게스타가 물었으나, 그의 손길이 짜릿해서 그랬단 말을 할 수 없어서 라틸은 고개만 저었다.
‘칼라인 피부를 요 며칠 너무 많이 만졌나 봐.’
열기가 있는 손가락에 자신도 모르게 반응해 버리다니. 게다가 게스타. 얘는 몸이 약한 순둥이면서 손은 왜 저렇게 크고, 손가락은 왜 그렇게 단단한지. 게스타가 아까보다 좀 더 빨리 목걸이를 걸어주고 물러서자, 라틸은 어색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인사했다.
“고마워. 예쁘다, 게스타.”
하지만 게스타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도 전에 클라인이 재차 시비를 걸었다.
“고작 목걸이가 선물이라니.”
‘아니, 쟤는 왜 또?’
라틸은 눈썹을 구기고 클라인을 보았으나, 클라인은 게스타에게 시비를 거는 게 주목적이 아니었는지 일어서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 쟤도 선물을 주려는 건가 보다. 라틸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성큼성큼 걸어온 그가 라틸의 곁으로 오자마자 한 건 겉옷을 벗는 거였다.
‘옷은 왜?’
뜬금없는 탈의에 당황한 라틸은 옷깃에 가려져 있던 그의 목 부근에 예쁜 리본이 매어져 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뭐야?’
의아해서 쳐다보자, 클라인은 픽 웃더니 리본의 한쪽 끝을 라틸에게 건네며 당당하게 말했다.
“제 선물은 접니다, 폐하.”
“…….”
어떤 선물을 주어도 아주 기뻐하면서 받자고 생각을 하긴 했는데. 이건 좀. 라틸은 당황해서 리본 끄트머리를 들고 있었으나, 클라인이 웃으면서 계속 쳐다보자 어쩔 수 없이 리본 끝을 잡아당겼다. 자, 해준다. 해줘. 그러나 리본이 풀리는 순간.
“!”
클라인의 입술이 라틸의 뺨으로 다가오더니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고 물러났다. 라틸은 놀라서 클라인의 눈동자를 보다가, 클라인이 눈웃음을 짓자 덩달아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튼 웃긴 애라니까.
“자요.”
하지만 선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클라인이 갑자기 품 안에서 리본을 단 열쇠를 꺼내 내밀자, 라틸은 웃다가 얼결에 그걸 받아들었다.
“무엇이냐?”
뜬금없이 웬 열쇠? 설마 이번에는 이 열쇠로 자기 마음을 따고 들어오라 하는 거 아냐? 라틸은 떨떠름하게 생각했으나, 클라인의 말은 라틸이 예상한 범위와 전혀 달랐다.
“별장 열쇠입니다. 카리센 유명 휴양지에 있는.”
“!”
“다음에 같이 가시지요.”
라틸이 놀라 쳐다보자, 클라인은 자기 선물이 최고란 듯 뿌듯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게스타 쪽을 보게 되었다. 게스타는 클라인이 뭘 주든 상관없다는 듯 조용히 스테이크를 자르고 있었는데, 작은 나이프가 고기 위를 한 번 지나갈 때마다 고깃덩어리가 예리하게 잘려 나가고 있었다. 표정이 온화해 보이지만 손에 엄청나게 힘이 들어가 있단 뜻. 라틸은 어색하게 웃다가 일단 열쇠를 옆에 내려놓았다. 다음으로는 대신관이 다가와 라틸에게 손바닥보다 큰 상자를 내밀었는데, 그 안에는 황금으로 된 카드가 들어 있었다.
“……카드?”
“전설적인 딜러가 사용한 카드입니다, 폐하. 원하시면 제가 딜러를 해드리겠습니다.”
* * * 선물을 주고받는 시간이 끝나자, 라틸은 자신이 받은 선물들을 시종에게 맡겼고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후궁들도 라틸을 빤히 쳐다보는 대신 이제야 제대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는데, 그러는 사이에도 불편한 대화는 끊임없이 오갔다.
“대신관은 과거에 딜러였다더니. 선물도 카드로군, 딜러 일에 미련이 남은 눈치인데, 원하면 계속해보지 그래?”
“응? 해도 됩니까?”
“그럼.”
“그렇군요. 하지만 저는 폐하 옆에 있고 싶습니다.”
클라인은 대신관을 이상하게 꾀었고, 대신관은 전혀 개의치 않고 흘려 넘겼다. 타시르는 라나문과 칼라인 사이에서 신이 나서 얘기를 해댔는데, 신이 난 건 타시르뿐이고 라나문과 칼라인은 둘 다 얼굴에 드러난 표정이 없었다. 게스타는 평소처럼 제대로 대화에 참여하지 못하고 오늘도 쭈뼛쭈뼛 식사에만 열중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광경을 바라보면서, 라틸은 처음 이들과 함께 식사하던 때를 떠올리고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곧 그때와 달라진 점을 발견하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서넛.
‘진실을 말해줄 마음이 생기면 오라 했는데…….’
제 발로 안 온다 이거지. 마음이 안 든다 이거지. 영지에서 지내는 게 아주 룰루랄라 신난다 이거지. 그래, 거기 영지에 매력적인 아가씨들 많더라. 그 아가씨들이랑 노는 게 좋다 이거지. 라틸은 눈살을 구기고서 아스파라거스를 ‘와득’ 씹었다.
‘오기만 해 봐라.’
* * * 겉으로는 평온한 식사 시간이 지난 후. 후궁들이 라틸에게 인사를 올리고 하나둘 물러나고 있을 때였다.
“라나문.”
라틸은 게스타가 걸어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좀 미적거리고 선 라나문을 불렀다. 부른 건 라나문뿐인데. 후궁들이 동시에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너희는 라나문이 아니잖아? 라틸은 그 시선에 부담스러워졌으나, 표정을 관리하고서 말을 이었다.
“오늘은 너도 생일이지?”
라나문은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예, 폐하.”
아까 홀로 미적거리던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라나문 역시 내색하진 않았으나 오늘 라틸과 한 약속을 떠올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네 생일이기도 하니 밤은 둘이서만 보내지.”
라틸은 일부러 빠르게 말한 다음 테이블 위에 놓인 따지 않은 술병을 챙겨 걸어갔다. 라나문의 방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고 있으려니 뒤에서 다른 후궁들의 시선이 날개 달린 바늘처럼 쏟아졌다. 그 따끔거리는 시선들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느껴졌으나, 라틸은 모른 척 계속 걸어갔다. 얼마나 긴장되던지 라나문이 따라오는지 이제야 확인할 정도였다. 힐긋 눈동자만 옆으로 굴려 라나문이 따라오는 걸 확인한 라틸은 다시 정면을 쳐다보며 술병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긴장된다.’
얼마나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지 술병을 잡은 손에서 심장 박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또박또박 잘 걷기 위해 발목과 종아리에 힘을 주었으나 걸음걸이는 그럴수록 더 이상해졌다.
“폐하.”
그러다 바로 곁에서 라나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그가 팔을 잡아주는 순간. 라틸은 결국 펄쩍 뛰고 말았다. 자신이 한 멍청한 짓거리에 부끄러움이 밀려왔으나, 라틸은 그래도 태연한 척 “그래.”하고 중얼거렸다. 안타깝게도 목소리가 양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서, 전혀 태연하지 못하게 들렸다. 희미한 웃음소리에 괜히 목덜미에 열이 올라서 라틸은 이번엔 술병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바보 같아. 뒤늦게 후회하며 술병을 도로 내리려는데, 라나문이 라틸과 달리 하얗게 잘 얼어서 아름답지만 차가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포도 향 좋아하십니까.”
뜬금없는 포도 이야기에 라틸은 “어?”하고 옆을 보았다. 혹시 내가 너무 긴장하고 있으니 긴장하지 말라고 이러는 걸까? 라나문은 정면을 보고 있었는데, 라틸이 자신을 쳐다보자 시선을 느낀 건지 힐긋 고개만 옆으로 돌리며 라틸을 마주 보았다.
“여기 오기 전에 포도주를 넣은 물에 목욕했습니다. 향을 좋아하실지.”
“!”
차가운 얼굴로 태연히 뱉는 소리에 라틸은 놀라서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넘어지려는 라틸을 라나문이 손을 뻗어 잡아주었다. 딱 붙은 몸에서 정말로 취할 것 같은 향이 풍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