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뱀파이어와 연애할 때 신경 쓰이는 것 몇 가지2022.01.02.
어제의 기억과 칼라인의 옷차림이 합쳐지는 바람에 잠시 당황해버렸다. 뒤늦게 마음을 가다듬은 라틸은 피했던 눈길을 다시 되돌리다가, 칼라인의 윗옷이 더 벌어져 있자 놀라서 테이블에 가지런하게 나열된 포크를 툭 치고 말았다. 떨어질 뻔한 포크를 칼라인은 재빠르게 받아 원래 자리에 놓았다.
“조심해야지요.”
너야말로 네 단추 좀 조심해라. 라틸은 억울해서 항의할 뻔했으나, 칼라인의 무뚝뚝한 얼굴을 보자 질문이 쏙 들어갔다. 건조한 그의 표정을 보니 ‘처음부터 옷은 저만큼 벌어져 있었는데 내가 뭘 잘못 봤나?’ 싶었던 것이다. 칼라인이 포크를 라틸의 앞에 원래 모양대로 내려주자, 라틸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서 스푼을 들었다.
“먹지. 배고프다.”
그러나 식사를 시작하자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지?’
칼라인을 여기에 부른 목적 때문이었다. ‘전에 말한 그거. 아직 임신할 마음이 없을 때, 그런 걱정 없이 즐기는 방법이 있다고 했잖아. 그거 뭐였더라?’ 하고 자연스럽게 물으면 되나? 그런데 이 질문을 과연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까? 라틸은 자신의 목소리를 알았다. 분명 말하는 도중에 희한하게 떨리기 시작할 것이다. 수백 명의 관리 앞에서 말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왜 단 한 명의 후궁 앞에서 잠자리 이야기를 하는 건 이렇게 곤혹스러운지. 시간이 지나야 해결될 일일까, 생각하다가 라틸은 자기 이마를 짚었다. 아니, 아까부터 생각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잖아?
“주인?”
“호박. 맛있네.”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칼라인에게, 라틸은 있지도 않은 호박 이야기를 하고서 괜히 물만 석 잔을 연거푸 비웠다.
“칼라인. 전에 네가-.”
그러다가 가까스로 라틸이 어렵게 어렵게 입을 여는 순간.
“선물이 있습니다.”
하필 칼라인도 할 말이 있었던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먼저 말씀하시지요.”
칼라인은 순서를 라틸에게 양보하려 했지만, 라틸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아니. 네가 먼저 말해라.”
이제부터 라틸 자신이 하려는 질문은 호기심 수치는 높지만 중요성은 낮은 질문이었다. 그러니 칼라인이 먼저 말하는 게 나았다.
“그럼 제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칼라인은 순순히 라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뭐 하는 거지?’
칼라인이 품 안에 손을 넣자 라틸은 고개를 조금 내밀었다.
‘뭘 주려고 저러나?’
칼라인이 꺼낸 건 별을 엮어서 만든 것처럼 아름다운 팔찌였다.
“와…….”
라틸은 팔찌를 보자마자 탄성을 뱉었다.
“정말 예뻐.”
팔찌 같은 것이야 넘치도록 많았지만, 이건 그중에서도 유난히 아름다웠다. 영롱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고, 실제로 팔찌에서는 희미하게 빛도 났다.
“드디어 이걸 드리게 됐군요.”
“드디어? 예전부터 준비했던 선물이야?”
“오래전부터.”
오래전이면 언제? 라틸은 궁금해졌으나 칼라인은 더 설명하는 대신 팔찌의 고리를 풀어 내밀었다. 라틸이 손을 뻗자 그는 직접 섬세하게 손을 움직여 팔찌를 걸어 주고는 어쩐지 슬프게 웃었다.
‘사연이 있는 선물인가 보다.’
그 표정을 본 라틸은 이 팔찌에 얽힌 슬픈 이야기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아니면 저런 표정을 할 리가. 별개로 곤란해졌다.
‘이 상황에서 잠자리 질문을 하기가 좀 그러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촉촉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잠자리 질문을 해도 될지.
“주인은 무슨 말을 하려 했습니까?”
칼라인이 먼저 아까 라틸도 무슨 말을 하려다 멈추었단 걸 기억해내고 물어주긴 했으나 라틸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주인?”
역시 나중에 말할까? 라틸은 몇 번이나 망설였다.
“어, 전에 네가 하려다 만 얘기. 물어볼 게 있어서.”
하지만 고민 끝에 라틸은 결국 그냥 묻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시기를 놓치다 보면 결국 또 못 묻게 될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제가 하려다 만 얘기라면…….”
무슨 얘기를 상상하는지 칼라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찔리는 게 많은 얼굴인데. 그런 부류의 질문은 아니야.”
“?”
칼라인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데, 말을 하기도 전에 얼굴에 열기부터 올라왔다. 라틸은 일부러 시선을 내리고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양배추를 썰었다.
“전에 말한 그, 아직 임신할 마음이 없을 때. 그런 걱정 없이 즐기는 방법이 있다고 했잖아.”
양배추 써는 소리와 섞어 최대한 자연스럽게,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뱉은 라틸은 양배추를 써는 게 더 이상하단 생각을 하자마자 이번에는 컵을 들면서 물었다.
“그 방법. 알고 싶어서.”
미지근한 물이 식도를 내려가자마자 갈증이 밀려왔다. 라틸은 컵을 내려놓으면서 칼라인의 눈치를 살폈다. 질문을 한 지 몇 초 되지도 않은 걸 알지만, 그가 바로 대답하지 않으니 불안했다. 라틸은 그의 초록색 눈동자가 속눈썹을 깜빡거릴 때마다 어두워졌다 밝아지는 걸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왜 그러느냐?”
칼라인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라나문과 밤을 보내고 이런 질문을 하신단 건, 혹시 라나문 때문에 하는 질문이란 뜻일까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라틸은 난처해졌다. 라나문과만 즐거운 밤을 보내려 묻는 건 아니지만, 계기는 분명 라나문이 맞긴 했으니까. 라틸은 칼라인이 빵을 아주 조금 잘라 입안에 넣고 씹는 걸 구경했다. 그가 그림책에 나올 것 같은 태도로 물을 마시는 것까지도. 솔직하게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아니라고 둘러대야 할까? 칼라인의 행동을 하나하나 지켜보다가 그도 자신을 쳐다보는 순간. 라틸은 마침내 대답했다.
“과거를 묻지 않는 건 연인 사이 예의 아닌가.”
“!”
칼라인이 허를 찔렸단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 표정을 보자 아까보다는 한결 기분이 풀려서 라틸은 히죽 웃었다. 자신을 난처하게 하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한 것 같아 뿌듯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라틸은 칼라인의 풀어 헤쳐진 셔츠 단추 선을 손가락으로 쭉 따라 내려가다가, 칼라인이 풀지 않은 단추 하나를 한 손으로 천천히 풀면서 물었다.
“너야말로. 위에 다섯 개는 누가 풀었어?”
그를 놀리려 한 말이었으나 칼라인은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얼굴로 라틸의 손가락만 내려다보았다. 500년을 묵어서 그런가. 굉장한 얼굴 두께구나. 대범하게 굴면서도 라틸의 행동에 일일이 반응하던 라나문과는 달랐다. 역시 500살은 노련하구나, 생각하며 혀를 차고 있자니, 칼라인이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인에겐 어젯밤의 남자도 과거의 남자입니까?”
“미래의 남자는 아니지.”
시계처럼 다시 돌아오긴 하겠지만.
“몇 시간 후엔 다른 후궁에게 이런 말을 하실 수도 있겠군요. 그땐 제가 과거의 남자가 되는 거겠지요.”
“싫어?”
칼라인은 싫다는 말 대신 긴 다리를 뻗더니 라틸의 의자 다리에 자신의 발을 걷었다. 그가 그 자세로 라틸 의자에 건 다리에 힘을 주자, 라틸은 눈 깜짝할 사이 의자째 그의 코앞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지자 라틸은 숨 쉬던 걸 멈추었다. 칼라인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하루를 보내고 과거가 되어 버리다니. 애송이 도련님은 이런 데서 티가 나는군요.”
‘라나문한테 애송이 도련님이래.’
“제 수업 기간은 긴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주인?”
뱀파이어는 눈으로 마법이라도 걸 수 있는 걸까.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라틸은 어젯밤 라나문이 자신의 목덜미에 와인을 부었을 때 같은 충격을 받았다. 눈동자를 마주했을 뿐인데도. 라틸의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린 칼라인이 라틸의 손목 위에 입을 맞추었다. 교묘하게도 파랗게 핏줄이 지나가는 바로 그 위에.
두 가지의 반대되는 의미로 라틸은 오싹해졌다. 이건 뭐야. 뱀파이어식 위험한 농담, 이런 건가?
‘나도 좀 그래. 상대가 500년 묵은 뱀파이어라면 좀 더 경계해야 하는 게 아닐까?’
저렇게 핏줄 위에 입을 맞추면서 교태롭게 웃는 뱀파이어라면 더? 라틸은 칼라인이 뱀파이어라는 데 충격을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의 눈동자에 열기가 오르는 자신을 깨닫고 당혹스러워졌다. 하지만 가짜 황제 사건 때. 카리센으로 향하는 그 위험한 길을 내내 그가 동행하며 지켜주었단 걸 알기 때문일까. 그가 뱀파이어란 걸 깨닫는 순간순간 위험하단 경계심이 들긴 해도 아주 무섭진 않았다. 어쩌면 도미스의 꿈에서 그의 과거를 보았기 때문일 수도…….
‘아. 도미스.’
도미스 생각을 하자 이번에는 찝찝해진다. 그에게 사랑하는 죽은 연인이 있다는 점 때문에. 게다가 그 상대는 자신이 꿈에서 열심히 응원하던 도미스 아니던가.
‘젠장, 도미스가 그 양부랑 사기 친 여자랑 상인 남자한테 복수하는 건 보고 깼어야 했는데! 생각하니 다시 열 받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주인?”
“네 생각.”
“좋은 쪽입니까?”
“글쎄.”
“눈빛에 열기가 사라졌습니다. 좋은 생각은 아닌 모양인데요.”
“……네가 사랑한단 여자가 생각났어.”
칼라인의 입꼬리가 못된 표범처럼 올라갔다.
“과거를 묻지 않는 건 연인 사이 예의라고. 방금 그 입으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주인?”
“아직도 사랑한다면 과거가 아니지 않나?”
“주인은 그럼 라나문 그자를 사랑하지 않으신단 거군요.”
“한마디도 안 지지.”
기가 막혀서 볼을 슬쩍 꼬집어 보다가, 라틸은 괜히 호기심이 들어서 볼을 좀 더 크게 잡아당겨 보았다. 송곳니가 슬쩍 드러날 만큼. 그러고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이를 살피자, 칼라인은 기가 막힌 지 불편한 자세로도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그리 궁금하십니까.”
“입을 맞추다가 내 혀에 구멍이 나면 안 되잖아.”
“…….”
라틸이 손을 내리면서 머쓱하게 웃자, 칼라인은 잠시 라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털어놓았다.
“내가 뱀파이어란 걸 알게 된 사람들의 반응이라면 질리도록 봐 왔지만…… 송곳니를 직접 확인한 사람은 주인이 처음입니다.”
좋은 뜻인가 나쁜 뜻인가. 라틸은 차가운 돌, 하지만 아주 부드러운 돌 같은 칼라인의 손 감촉을 느끼면서 ‘그래서. 알려준단 거야 만단 거야?’라고 재촉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칼라인에게 해야 하는 질문이 이것뿐만이 아니란 게 떠올랐다. 너무 가쁘게 추궁하면 또 도망갈까 봐, 선인장 글씨를 얼른 지우기 위해서, 질책하느라, 하여튼 여러 가지 사유로 밀리고 밀린 질문이 있지 않던가. 꽤 중요한 질문.
“칼라인. 네게 물어볼 게 또 있는데. 물어봐도 돼?”
“아직 앞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주인.”
“그건 이따 밤에 가르쳐 줘야지. 여기서 어떻게 배워.”
“!”
라틸이 최대한 대범한 척 대답하자 효과가 있던지, 칼라인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너그럽게 권했다.
“뭐든 물어보시지요.”
그러나 라틸은 쉬이 묻지 못하고 내내 그의 손만 꼬물꼬물 만져댔다. 그러다 칼라인이 힐긋 시계를 확인하자, 곧 업무 시간이 다가오고 있단 걸 떠올리고서 손을 놓고 원래 위치로 돌아가 포크를 쥔 다음 툭 던지듯 빠르게 털어놓았다.
“솔직히 너. 후궁 지원서에 나이, 사기 쳤지?”
“!”
여유롭던 칼라인이 처음으로 눈동자가 흔들렸다. 라틸은 포크로 으깬 감자를 뭉개면서 그의 표정을 샅샅이 살폈다.
“진짜는 몇 살이야?”
다행히 거짓말을 할 마음은 없는 듯 칼라인은 라틸의 눈치를 보며 심각하게 물었다.
“연상은 싫으십니까.”
“연상은 괜찮은데. 조상이면…….”
칼라인이 갑자기 혼자 빵 터져서 웃어대자, 라틸은 머쓱해져서 그의 입을 막고서 재차 물었다.
“진짜 내 조상님이랑 동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