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아2022.01.09.
뱀파이어이기 때문일까. 밤에 보는 칼라인은 낮보다 좀 더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의 긴 목은 사냥꾼이 아니라 사냥감처럼 보였으나, 그 아래로 쭉 뻗은 넓은 어깨와 단단한 가슴은 몹시 강인해 보였다. 씻고 온 건지 머리카락은 아직 젖어 있었고, 그는 두상까지 완벽하단 걸 감추지 않고 자랑스럽게 드러냈다. 라틸은 그의 눈길이 자신의 목덜미에 닿은 걸 알고서 반사적으로 손으로 목을 숨겼다. 저 목덜미 귀신. 또 시작이다.
“오늘은 창문으로 안 왔네.”
라틸은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일부러 가볍게 농담을 던지다가, 그가 평소보다 좀 더 꼼꼼하게 단추를 채운 걸 알아차렸다. 라틸의 시선이 자신의 옷자락에 닿자 칼라인의 입술 끝이 위로 올라갔다.
“직접 푸는 걸 좋아하시는 눈치기에.”
라틸은 항의하려다가 칼라인이 무언가를 들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뭐야?”
동그란 무대 뒤에서 새 두 마리가 춤을 추는 조각이었다.
“음악 상자 입니다.”
“음악 상자는 왜?”
칼라인은 대답 대신 새 두 마리를 떨어뜨려 놓았다. 그러자 꼭 붙어 춤을 추던 새들이 나란히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모양으로 변하면서, 거기에서 똥땅대는 하프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듣기 싫으십니까?”
“괜찮긴 한데…… 지금 왜 음악을 트는지 모르겠어.”
음악 상자를 테이블 가운데에 놓은 칼라인은 어리둥절해 있는 라틸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라틸의 팔을 보고 만족스레 웃었다.
“했군.”
라틸의 팔에는 그가 생일 선물로 준 팔찌가 걸려 있었다. 자연스럽게 팔을 건드린 칼라인은 엄지만으로 라틸의 소매를 좀 더 위로 올리고는 팔찌 부근의 살을 엄지로 눅진하게 문질렀다. 얘는…… 왜 팔찌만 만져도 야해. 라틸이 당황해서 손을 빼려 하자, 칼라인은 다른 손으로 라틸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충고했다.
“부끄러우면 음악에 집중해요.”
그의 차가운 손이 귓바퀴를 부드럽게 긁자 라틸은 등이 쭈뼛해졌다.
“내가 주는 감각과.”
“!”
그 소리를 듣자마자 음악 상자에서 흘러나오는 하프 소리가 좀 더 크게 느껴졌다. 귓가를 간질이는 느낌과 음악이 뒤섞여서, 라틸은 머리가 어질해졌다.
“과연 오백 살…….”
“나이 얘기는 그만하면 안 됩니까.”
한숨을 섞어 중얼거린 입에 벌을 주듯, 칼라인이 귀에서 손을 떼더니 강하게 입을 맞추어왔다. 그의 손과 입이 닿는 모든 부분이 추워서 라틸은 그에게 꽉 매달렸으나,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더 차가울 뿐이었다. 그런데도 입에서는 뜨거운 느낌이 드니, 대체 이게 무슨 조화일까.
“주인. 당신은…… 정말 뜨겁습니다.”
라틸이 그를 차갑게 느끼는 만큼 칼라인에겐 라틸이 뜨거운 모양인지, 그가 입을 맞추다 말고서 이마를 맞대고 속삭였다. 어쩐지 그게 웃겨서 라틸은 소리를 죽여 웃었다. 뱀파이어도 사람의 체온을 이상하게 여기긴 하는구나.
“새로운 정보네.”
“내가 녹아버리면 다시 얼려줘야 합니다.”
칼라인이 재차 진지하게 농담을 하자 술기운과 더해져서 긴장이 조금 풀렸다. 라틸이 고개를 끄덕이자 칼라인은 라틸을 안아 들더니 침대로 걸어가 자연스레 눕혔다. 침대에 등이 닿자 다시 움츠러들려는 라틸에게, 칼라인이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며 충고했다.
“음악에 집중해요.”
“음악이…… 너무 잔잔해.”
차라리 네 얼굴을 보는 게 낫겠다. 라틸은 뒷말을 삼키고서 칼라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금씩 어루만져보았다. 처음부터 이 얼굴이 좋았다. 이상할 정도로. 칼라인은 서두르지 않았다. 눈가에는 열이 가득했으나, 그는 조급하게 구는 대신 라틸이 자신의 얼굴을 마음껏 만지도록 반쯤 눈을 감은 채 기다려주었다.
“그거 알아, 칼라인? 넌 내가 얼굴을 보고 뽑은 유일한 후궁이란 거.”
칼라인은 감았던 눈을 뜨더니, 자신의 뺨을 감싼 라틸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고 고개를 돌려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웃었다.
“모를 리가.”
아는구나.
“어떻게 알았어?”
말을 하긴 했지만 모를 거라 여겼던 라틸이 발끈해 묻자, 칼라인은 미묘하게 웃더니 라틸의 눈가를 문질렀다.
‘눈에서 티가 났단 건가. 대체 내가 칼라인을 어떻게 쳐다봤기에?’
뜻밖의 대답에 당혹감을 느끼자마자 칼라인이 또 라틸의 목덜미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가 뱀파이어란 걸 몰랐을 때도 당혹스러워졌던 행동인데. 그가 뱀파이어란 걸 알아서인가. 라틸은 놀라서 그의 머리카락을 뒤로 잡아당겼다. 칼라인은 웃으면서 라틸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목덜미에서 입을 뗐다.
“무섭습니까, 주인?”
“난 여기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거지 먹이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러면 목에는 입을 대지 말까요?”
라틸이 고개를 끄덕이자, 칼라인은 알겠다더니 순순히 더 아래에 입을 댔다. 심장 위에. 얇은 옷 위로 느껴지는 깜짝 놀랄 감각에 라틸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칼라인의 머리카락을 더 잡아당겼다.
“역시 목으로 할까요?”
칼라인이 장난스럽게 묻자 라틸은 놀란 마음보다 발끈한 마음이 더 강해져서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그러자마자 칼라인은 마치 라틸의 손에 떠밀리기라도 한 듯 좀 더 아래로 내려갔고, 어느새 그의 차가운 숨결은 배 부근으로 가 있었다. 그가 라틸의 옷 단추를 이로 물더니, 마치 송곳니를 자랑이라도 하는 양 손쉽게 툭 뜯어 뱉었다. 아래 단추까지도 그렇게 뜯어내자, 그의 차가운 입술이 배꼽 아래에서 느껴지면서 냉기에 소름이 올라왔다. 그의 혀가 라틸의 배 위를 지나가자 얼음이 미끄러지는 기분에 저절로 발가락이 말렸다.
“너…… 진짜 차가워.”
라틸이 속삭이자 칼라인은 배 부근에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이번에는 라틸의 바지 지퍼를 입으로 물었다. 바지는 좀 더 두꺼운 재질이라, 라틸은 그가 뭘 하는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다 아래에서 바스락거리는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고, 지퍼를 입으로 내리는 칼라인을 발견하고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칼라인은 지퍼를 내리면서도 라틸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쳤는데도 태연히 웃으면서 아주 느리게 지퍼를 끝까지 내렸다. 좀 더 아래쪽에서 차가운 기운이 올라오자 라틸은 기겁해서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그새 위로 올라온 칼라인이 다시 라틸을 눕혔다. 라틸이 떨리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자니, 칼라인은 자신이 선물한 팔찌를 찬 라틸의 손목을 들어 그 위에 입을 맞추고서 라틸의 눈꺼풀을 감겨주었다.
“음악 소리 들립니까, 주인?”
“들려.”
“제 목소리도 들립니까?”
라틸이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라틸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제가 주인에게 주려는 건 전부 다 좋은 것뿐입니다. 음악을 감상하면서, 제가 주는 감각을 받아들여요.”
“긴장돼.”
“긴장을 거두면 즐거울 겁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오백 년 살면 알게 됩니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라틸이 실눈을 뜨자 그의 얼굴이 코앞에 보였다. 그의 눈동자는 맑고 아름다웠으나, 눈에는 음욕이 가득해서 라틸은 그의 말을 신뢰하기 어려웠다.
“확실해?”
그가 웃더니 다시 라틸의 눈꺼풀을 감겨주었다.
“숨을 쉬고…… 음악을 들으세요.”
라틸은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눈을 감고 긴장한 채 음악을 들으려 하자, 음악 소리가 좀 더 섬세하게 들려왔다. 오르골로 재현한 하프 소리는 여전히 똥땅대는 것처럼 들렸으나 잔잔하고 풍요로웠다. 긴장을 풀라는 듯 그의 손이 목덜미와 어깨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한 손으로.
‘그럼 다른 한 손은?’
다시 실눈을 뜨자 그가 자신의 셔츠 단추를 한 손으로 푸는 게 보였다. 매끈한 살결은 금세 드러났으나, 칼라인은 셔츠를 벗는 대신 입은 채 라틸의 쇄골 부근으로 입을 가져갔다. 몸에서 아주 미세한 온기를 가진 얼음이 미끄러지는 느낌에 라틸은 눈을 질끈 감고 턱을 들어올렸다. 덩달아 목이 위로 올라가자, 차가운 손이 목 위를 부드럽게 쓸면서 계속해서 어깻죽지를 문질렀다. 긴장을 풀라는 손길.
‘그 손 때문에 더 긴장되는 거야, 이 오백 살아.’
라틸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자신도 조금 경험이 쌓이면 칼라인에게 똑같이 복수하리라 작정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저 오백 살 묵은 뱀파이어가 손가락 하나에 심장을 들썩이게 해줘야지. 하지만 그 생각을 하자마자 좀 더 가까이에서 느껴진 그의 숨결에 라틸은 등을 반사적으로 들어올렸다가 도로 내렸다. 라틸은 그의 머리카락 사이에 두 손을 파묻었다.
“칼, 칼라인.”
당황해서 칼라인을 부르며 눈을 떴으나, 이번에는 상체를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차마 아래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가 없어서. 칼라인의 손이 능숙하게 라틸의 바지를 뒤에서 감싸더니, 반 정도 아래로 내리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그가 옷으로 꽁꽁 감춰둔 부위에 입을 맞추자, 라틸을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음악? 음악을 듣고 있으라고? 음악은 무슨,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심장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 * *
“칼라인은? 칼라인은 만나 봤어?”
없는 입맛을 억지로 돋우며 식사하던 아이니는 칼라인에게 ‘사디가 대적자 같다’는 정보를 전하기 위해 떠났던 용병이 홀 안으로 들어오자 포크를 내려놓고 황급히 다가가 물었다. 용병은 코트를 벗어 한쪽 팔에 걸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칼라인 님을 만나서 얘기했어.”
“뭐라고 해? 자기가 없애겠대?”
“그 여자가 아니래.”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했어? 우리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또박또박 말했어?”
“말했는데 아니래. 칼라인 님도 아는 여자래.”
물론 아는 사이겠지. 둘이 같이 우리나라에 왔었으니까. 아이니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기르골 이야기도 했어?”
“그래도 아니래.”
아이니는 답답해졌다. 지금 자신은 로드가 아니니, 사실 사디가 대적자이건 말건 죽건 살건 큰 관련은 없다. 그녀가 이러는 건 칼라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칼라인은 로드를 따르고, 대적자는 로드와 싸우니까. 언젠가 미래의 대적자가 그를 죽일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칼라인은 무작정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니…….
“아마 아닐 거야. 칼라인 님이 아니라고 할 땐 이유가 있겠지.”
용병이 칼라인에게 신뢰를 가지고서 말하자 아이니는 입을 다물고 테이블 앞으로 돌아가 앉았다. 하지만 아이니는 여전히 그녀가 대적자라고 확신했다. 자신이 본 것들이 있으니까.
“도미스. 칼라인 님이 쓸데없는 행동을 하지 말라 그랬어. 괜히 오해해서 나서지 말라고.”
그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본 용병은 아이니의 맞은편으로 다가와 탁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쓸데없이 나서진 않을 거야.”
그러나 아이니는 단호하게 딱 자르고서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럼? 뭘 어쩌려고?”
“칼라인에게 다른 증거를 보여주겠어. 그러면 되겠지.”
“무슨 증거? 칼라인 님은 기르골이 그 여자 곁에 있다는데도 대적자가 아니라 했는데. 그거보다 더 큰 증거가 어디 있다고?”
“대적자의 적이 뱀파이어만은 아니잖아.”
아이니의 영리한 목소리에 용병이 고개를 기우뚱했다.
“좀비를 보내 보려고? 하지만 흑마법사가 어디 있는지 우리는 몰라.”
아이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식시귀.”
머릿속에 떠오른 건 헤움이었다. 그라면 가장 정확한 질문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