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무시무시한 새?2022.01.16.
안 보이는 건가? 저기 저 창틀에 있는데? 속마음을 듣거나 남의 기억을 꿈으로 꾸는 것처럼, 이것도 내 고유의 능력인가? 라틸은 잠시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게 자신의 고유 능력이라 하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클라인도 처음엔 그 독수리 머리에 사자 꼬리 새를 보았으니 라틸에게 말한 게 아닌가. 그럼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고 있자니, 그 독수리 머리에 사자 꼬리를 가진 희한한 새가 라틸을 보고 부리를 쩍 벌렸다. 마치 ‘네가 날 보고 있어?’ 하고 놀라듯이. 새의 표정이 사람의 표정과 똑같은지는 모르겠으나, 라틸이 자신을 본다는 데 몹시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새가 부리를 벌린 채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하자 라틸은 더욱 황당해졌다.
‘춤은 갑자기 왜?’
클라인 역시 클라인대로 라틸이 창틀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제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어리둥절해서 연신 창문과 라틸을 번갈아 보았다. 새는 춤을 다 추고 나자 이번에는 날개로 부리를 감추며 감격한 척하더니, 꾸벅 절을 하고서 날아가 버렸다.
‘괴물……이라고 하기엔 좀 이상한데.’
라틸은 멍하게 그 뒷모습을 보다가 클라인을 쳐다보았다. 클라인은 여전히 창문과 라틸을 번갈아 보고 있었는데, 라틸과 시선이 마주치자 창문을 힐긋거리길 멈추고 걱정스레 물었다.
“폐하. 혹시 제 말이 거짓말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절 놀리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
라틸은 안 그래도 없던 입맛이 더욱 사라져서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네가 한 말은 다 믿는다.”
“게스타…….”
“부분은 빼고.”
게스타 방 창문에 그 새가 붙어 있어서 게스타가 수상한 거라면, 클라인 역시 수상해야 하니까.
“폐하는 게스타 그놈을 너무 챙기십니다.”
“네가 게스타를 너무 싫어하는 건 아니고?”
“예뻐할 구석이 없잖아요.”
‘하긴. 너는 게스타를 안 예뻐해도 되지. 게스타는 내가 예뻐해야 할 상대이지, 네가 예뻐해야 할 상대는 아니니까.’
아낙차도 다른 후궁들과 사이가 나빴다. 아니, 사실 후궁끼리 사이가 아주 좋은 게 더 어렵단 걸 알기에, 라틸은 클라인에게 억지로 게스타와 잘 지내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후궁들끼리 싸워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주길 바라고 데려오기도 했고. 물론 선은 넘지 않아야 할 테지만.
* * * 식사를 마친 라틸은 방 안을 둘러보다가, 클라인이 가지고 있는 황제 인형이 너무 꾀죄죄해진 걸 보고 옷 좀 좋은 걸 입히라고 잔소리를 퍼부은 후. 그의 머리에 얹을 장신구까지 같이 골라주고서 밖으로 나왔다. 클라인은 더 함께 있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방으로 돌아가 알현 준비를 하려면 여유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백화. 얘기 좀 하지.”
클라인에게 새 이야기를 들었으니, 성기사단장 백화를 찾아가 그 이야기도 해야 했다. 괴물이라고 하기엔 새가 너무 작고 귀엽고 멍청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는가.
“네, 폐하.”
백화는 호수 주변을 돌면서 성기사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다가, 라틸이 부르자 얼른 곁으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고생이 많군.”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다만 부적을 파낸 범인이 누구인지 아직 알아내지 못해 그게 신경 쓰입니다.”
라틸 역시 내내 그 부분이 신경 쓰였기에, 백화에게 고생하라며 어깨를 두드렸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신 건지요?”
“아.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예.”
“혹시 머리는 독수리인데 사자 꼬리 같은 게 달린 게 뭔지 아나?”
“예?”
“클라인이 보았다 해서. 나도 보았고. 이 근방에서.”
춤을 추고 있었지. 질문을 하면서도 라틸은 백화가 그게 무엇인지 알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화는 뜻밖에도 라틸의 말을 바로 알아듣고 되물었다.
“혹시 그리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는가?”
“예. 뱀파이어 로드의 부하 괴물입니다.”
“!”
로드의 부하라고. 로드의 부하가 하렘 안에 와 있다고? 라틸의 표정이 굳자, 백화는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전설에 따르면 뱀파이어 로드가 그 새를 타고 다닌다고 하지요.”
하지만 백화의 부연 설명을 듣자, 라틸의 심각한 표정은 조금 흐트러졌다. 그 쥐방울만 한 새를 타고 다닌다고? 탈 수가 있긴 한가? 그 새에 올라타려면 새끼 쥐는 되어야 할 텐데?
“무시무시한 요괴라 들었습니다. 사람의 세 배는 되는 커다란 발톱이 있어서, 그걸로 사람들을 마구 낚아채 던져 버린다지요.”
라틸의 머릿속에 궁둥이를 흔들던 새가 재차 떠올랐다. 무시무시? 사람의 세 배는 되는 커다란 발톱?
“사람들에게 큰 해를 끼치는 괴물인데. 정말로 그걸 보신 겁니까?”
백화가 재차 묻자 라틸은 “어…….” 하고 말을 끌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내가 본 건 손바닥 정도 크기였는데. 아니, 그보다 좀 더 작았나?”
“그럼 새끼일 수도 있겠군요!”
백화의 융통성 있는 해석에 라틸은 ‘그런가?’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라틸과 달리, 백화는 새 크기가 손바닥만 했단 이야기를 듣고서도 여전히 심각했다.
“그리핀의 새끼든 그리핀이든, 하여튼 그런 게 나타난 건 좋지 않은 징조입니다. 로드와 함께 다니는 몬스터니까요.”
고개를 주억거린 백화는 곧 몹시 진지한 얼굴로 라틸을 향해 굳게 외쳤다.
“호수 주위를 위주로 살폈는데. 앞으론 그런 새도 잘 찾아봐야겠습니다. 혹시 어디에서 보셨는지, 구체적인 장소를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음. 여기저기 창문을 날아다니는 거 같았네.”
“그러면 창문도 잘 살피겠습니다.”
백화가 굳게 맹세하고서 성기사들 사이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라틸은 잠시 미간을 찡그리고 바라보았다. 뭔가 좀 이상하게 여겨졌다. 도미스는 흑마법사들과 손을 잡고 세상에 어둠을 불러오는 그 무시무시한 로드란 존재라는데, 남들보다 더 마음 약하고 소심한 여자애처럼 보이고. 로드가 데리고 다니는 무시무시한 그리핀이란 존재는 궁둥이를 씰룩씰룩 흔들던 그 작은 새라고?
‘진짜 로드가 악한 존재가 맞는 건가?’
가만히 서서 생각하던 라틸은 곧 고개를 젓고 돌아섰다.
‘원치 않아도 도미스의 기억을 꿈으로 꾸고 있으니, 곧 답을 알게 되겠지.’
* * * 이후 며칠 동안 그리핀은 목격되지 않았고 그리핀을 봤다는 소문만 퍼져갔다. 클라인은 자신이 본 그 괴상한 새가 그리핀의 새끼란 말을 듣자 다시 한번 게스타가 나쁜 놈이라고 주장해서, 기껏 라틸이 감춰준 게스타 이름을 끄집어내고 말았다. 하지만 게스타는 거기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도 게스타가 정말로 그리핀과 관련이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라틸에게는 한 가지 더 신경 쓰이는 날이 다가왔다.
‘오늘이다. 기르골과 싸우기로 약속한 날.’
기르골은 라틸이 대적자라고 했고, 라틸은 그 말을 반쯤은 믿으면서도 온전히 믿진 않았다. 그러나 칼라인을 통해, 기르골이 실제로 대적자들의 스승이긴 했단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니 약속대로 그와 겨루어야 했다. 문제는…….
‘모르겠어. 내가 진짜 대적자가 맞나? 오빠랑 대현자는 날 로드라 의심하지. 전에 그 수상한 패거리를 쫓다가 만난 여우 가면. 그자도 날 로드라 불렀어. 틀라한테서 날 숨겨 주기도 했고.’
최근에는 로드가 타고 다닌다는 그리핀도 봤지. 물론 절대로 사람이 타고 다닐 크기가 아니긴 했지만, 클라인이 못 볼 때 라틸의 눈엔 그 새가 춤추는 게 제대로 보였다. 그러나 대신관이 가진 그 돌은 까맣게 변하지 않았다. 부서지긴 했어도. 라틸은 자신의 비밀 장소로 가 옷을 갈아입고 가면을 쓰다가도 연신 멈추어 서서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로드일지도 모른단 가능성을 라틸은 내내 필사적으로 부정해왔다. 자신이 로드라면 오빠가 옳은 게 되니까. 뭘 한 것도 없는데, 갑자기 절대악의 존재가 되어 온 세상에 배척당해야 한다니. 그건 말도 안 되니까. 그러나 막상 기르골이 자신을 대적자라고 하자, 이젠 더는 귀를 막고 생각을 막을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기르골은 뱀파이어니까 굉장히 강하겠지. 뱀파이어도 그냥 뱀파이어가 아니라 대적자들을 가르친 뱀파이어라잖아.’
지난번 로드는 패배했고, 대적자가 승리했다. 그 대적자를 가르친 게 기르골. 만약 기르골과 겨루어서 진다면…… 라틸은 내기한 대로 대적자가 되어 그에게 무술을 배워야 했다. 그런데 기르골이 뭘 잘못 안 거라면? 사실은 내가 로드가 맞았다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모르겠어. 하나도 모르겠어.’
대적자가 맞다면 기르골이 하자는 대로 하면 되지만, 로드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틀라는? 틀라가 지금 대의 로드 아닌가? 틀라는 뭐지? 로드가 두 명일 수도 있나? 그냥 로드도 대적자도 아닌, 라트라실 황제로 있을 수는 없는 건가? 아니, 대적자여도 문제다. 대적자라면 로드와 싸워야 하는데. 황제 일은 지금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런데 대적자이면서 황제 일을 할 수는 있을까? 그렇다고 황제 일을 해야 하니까 대적자가 되지 않겠다고 하면? 기르골이 ‘대적자가 대적자를 안 한대요.’라고 소문이라도 내려나? 소문이 나도 지금은 괜찮다. 분위기가 흉흉하지만 아주 간혹 괴물이 나올 뿐이니. 그러나 전설처럼 전 세계에 좀비와 흑마법사들이 들끓으면? 평민과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서라도 로드와 싸우라고 쫓아내지 않을까? 평민과 귀족이 뭐야. 전 세계에서 달려드는 거 아닌가? 게다가 라틸에게는 레안이라는 아주 적당한 대타도 있지 않는가.
‘내가 대적자가 맞다면…… 국서가 필요해. 내가 바빠도 중앙에서 내 자리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준비를 마친 라틸은 심호흡을 하고서 궁전 출입구로 걸어갔다. 통행증을 제시하고 궁전 밖으로 나가자, 긴장감에 손바닥이 간지러워졌다.
“후우.”
한숨을 내쉬고서 라틸은 마른침을 삼켰다. 전혀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았지만, 일단은 기르골과 붙어야 한다. 대적자가 될지 말지 고민하는 건 기르골에게 패배한 뒤에 할 일. 내기대로 자신이 기르골을 이긴다면, 당장 대적자가 되라며 몰아가진 않을 거다. 즉, 시간을 벌려면…….
‘기르골을 이기겠어.’
그러려면 어떻게? 검술 연습은 늘 해왔고 지금도 틈틈이 훈련을 하고 있다. 알 수 없는 힘도 생겼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기르골을 이길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는 사이, 어느새 라틸은 약속 장소에 도착한 걸 알아차렸다. 전에 기르골과 함께 샌드위치를 먹었던 그 언덕 커다란 나무 아래, 기르골이 먼저 도착해 라틸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디 양.”
손에는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서.
라틸이 다가가자 기르골은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네면서 하얗게 웃었다. 누가 보면 곧 싸우려는 사람이 아니라 청혼하려는 사람처럼.
“내 제자가 될 준비는 하고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