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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화.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204/367)

205화.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다2022.02.13.

기르골에게 말한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식시귀라고 해서 무조건 죽이지 않을 것‘이란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라틸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시종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16551125899079.png“아, 혹시 모르니 백화에게 식시귀 처리 방법이 뭔지부터 물어봐요. 함부로 죽였다가 죽였는데 안 죽고 주위 사람들만 갑자기 좀비로 변하고…… 이러진 않으려나? 하지만 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16551125899087.jpg“예, 폐하.”

그러고서 약 한 시간 뒤. 라틸이 다른 업무를 보고 있으려니, 시종장의 전언을 들은 백화가 몸소 찾아와 라틸에게 식시귀를 죽이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16551125899087.jpg“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모른다고. 참 당당하게도 모른단 대답이 돌아오자 라틸은 미간을 찌푸렸다.

16551125899087.jpg“어떻게 처리했단 기록은 없어서요.”

너는 알 때가 드물구나. 라틸은 속으로 생각했으니 질책하진 않았다. 대신 그럴 수도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백화를 향해 재차 물었다.

16551125899079.png“그러면 좋은 의견은 없는가?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저렇게 하면 효과가 있을 것 같다…… 이런 거.”

백화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16551125899087.jpg“관에 넣고 안을 성수로 채워두면 어떨까요?”

16551125899079.png“성수?”

16551125899087.jpg“대신관님의 부적을 파내고 괴물들이 들어온 걸 보면, 그자들에게 대신관님의 힘이 통하는 건 확실해 보이니까요.”

16551125899079.png“좋은 방법이군. 그러게.”

라틸이 흔쾌히 허락하자 백화는 대신관에게 부탁해 성수를 준비하겠다며 인사를 올리고 나갔다. 라틸은 한 건이 해결되자, 이제 다른 일을 보기 위해 책상 위에 올린 서류를 집었다. 하지만 손은 곧 움직임이 멎더니 책상 위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16551125899087.jpg“왜 그러십니까, 폐하?”

시종장이 물었으나 라틸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피아노 건반을 연달아 두드리듯 손가락을 책상 위에서 차례로 움직이다가, 돌연 조금 전 내린 명령을 바꾸었다.

16551125899079.png“사블레 후작. 백화에게 말을 전해요. 관은 유리관으로 하라고.”

16551125899087.jpg“유리관이요? 그러면 내부가 다 보일 텐데요.”

시종장은 어리둥절해서 되물었지만, 라틸은 태연히 웃었다.

16551125899079.png“압니다. 그러라고 유리관으로 하란 거니까. 다 보라고.”

16551125899087.jpg“!”

16551125899079.png“그리고 수도 중앙에 그 유리관을 두고, 식시귀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사람들에게 보여줘요. ‘리가 흑마법사 관련된 일을 잘 처리하고 있다’는 걸 보이는 거죠.”

16551125899087.jpg“사람들을 안심시키려는 거군요.”

16551125899079.png“말로 백 마디 하는 것보다 한 번 눈으로 보여주는 게 나을 때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또…….”

거기까지 말한 라틸은 곧 “서넛은”이라고 말을 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얼결에 서넛을 부르려다가 그가 곁에 없단 걸 갑자기 깨달아버린 것처럼. 그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입에 붙어버린 것이다. 시종장은 라틸의 눈치를 조심히 살피다 물었다.

16551125899087.jpg“폐하. 서넛 경에게 그만 휴가를 끝내고 오라 전언을 보낼까요?”

오고 싶으면 올라오라고 이미 말했습니다. 자기가 안 올라오고 있는 거지. 라틸은 울컥 무언가 분노 비슷한 게 치솟았으나, 그런 내색을 하는 대신 말실수가 민망하다는 듯 웃으며 말을 바꾸었다.

16551125899079.png“아니. 됐습니다. 휴가 중인 사람을 부르긴 힘들지요. 칼라인을 불러와 줘요. 지시할 게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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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급한 일이 있다며 용병들이 어딘가로 다 가버리는 바람에 아이니는 오늘따라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홀로 용병단 건물에 남아 있다가 ‘또다시 기르골이 습격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결국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설마 길거리에서 습격하진 않겠지. 제정신이라면. 기르골이 얼마나 미쳤는지 모르는 그녀는 이런 생각을 품고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런데 구름처럼 생긴 달콤한 과자를 사서 이동하고 있자니, 사람들이 어느 한 곳에 모여 우글거리고 있었다.

16551125955679.png’뭐지?‘

호기심이 든 아이니는 그쪽으로 가보았으나 가까이 가도 잘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둘러싸고 둥그렇게 모여 있어서였다. 게다가 안에 있는 게 대체 무엇인지, 어린아이들은 그곳에 가려고 해도 구경하고 선 사람들이 못 오게 쫓아냈다. 가까이 가기 힘든 상황이었으나 아이니는 요령껏 사이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그들이 둘러싼 것을 결국 보고야 말았다.

16551125955679.png“!”

유리관. 그것은 유리관이었다. 호기심에 차 사람들 사이로 들어온 아이니는 그 유리관을 보자마자 굳어버렸다. 그 안에 있는 건 목이 없는 몸이었다. 목이 없는데 피조차 흐르지 않고, 팔다리가 멀쩡히 움직이는 몸. 그러나 아이니는 그 기괴한 장면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아이니가 놀란 건 그 몸이 입은 옷 때문이었다.

16551125955679.png‘헤움!’

그 옷은 헤움의 옷이었다. 아이니가 몰라볼 리가 없었다. 아이니는 그쪽으로 다가가려 했으나 놀란 틈에 몸에 힘이 빠지자 바로 사람들에게 밀려 멀어지고 말았다.

16551125955679.png“비켜라! 비켜!”

아이니는 다시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아까와 달리 흥분해서 요령 없이 손만 휘젓자 잘되지 않았다. 그래도 가까스로 안쪽에 들어간 순간. 아이니는 재차 놀랐다. 옷도 옷이지만, 움직임이 빠른 속도로 잦아들고 있어서.

16551125899087.jpg“저 물이 성수래.”

16551125899087.jpg“성수가 식시귀도 잡아?”

16551125899087.jpg“괴물은 다 성수에 약하겠지. 성수잖아.”

주위에서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아이니의 몸에 힘이 빠졌다. 힘이 빠지자마자 기가 막히게 몸은 다시 뒤로 밀려났다. 그러나 아이니는 이번에는 사람들을 밀치고 관을 보러 가는 대신, 몸을 돌려 용병단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힘으로는 헤움을 구해낼 수 없었다. 그러니 뱀파이어 용병들에게 부탁해서 그를 구해내려는 것이다. 어차피 뱀파이어와 식시귀는 한 패가 아니던가. 하지만…….

16551125955679.png’왜 하필 오늘!‘

볼일이 있다며 나간 용병들은 아직 하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한 명. 심부름을 하는 용병이 하나 남아 있지만 아이니가 알기로 그 용병은 사람이었다.

16551125899087.jpg“왜 그러세요, 아이도미스 님?”

그 용병이 의아한 얼굴로 아이니에게 묻자 아이니는 초조하게 입술을 쥐어 뜯다가 물었다.

16551125955679.png“다른 용병들은 대체 언제 오지?”

16551125899087.jpg“모르겠어요. 대장이 급한 일이라고 불렀다니까요 뭐.”

아이니는 15분 정도 의자에 앉아 기다리려 했으나,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거의 몇 시간가량 그녀는 관을 둘러싼 사람들을 지켜보며 초조하게 시간을 보냈다. 몇 번을 용병단에 왔다 갔다 했으나 여전히 용병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몇 번을 그랬을까. 용병단에 들렀다가 유리관 근처로 온 아이니는 한 무리의 병사들이 그 관 위를 천으로 덮고서 어딘가로 관을 운반하는 걸 발견했다.

16551125955679.png“왜, 왜 저걸? 저걸 어디로 치우느냐?”

아이니가 다급히 근처에 선 구경꾼에게 묻자 구경꾼은 ‘이 여잔 뭐지?’ 하는 눈으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16551125899087.jpg“식시귀가 죽었나 보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니.”

심장이 철렁했으나 아이니는 내색하는 대신 조심히 관을 운반하는 병사들을 따라갔다. 그녀는 온 힘 다해서 자신의 기척을 죽이고 병사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산 중턱, 산책로에서도 한참을 벗어난 곳으로 와서야 운반한 관을 내려놓으며 욕설을 뱉었다.

16551125899087.jpg“아 진짜 무겁네.”

16551125899087.jpg“꼭 이걸 이런 데 묻어야 하나?”

16551125899087.jpg“내버려둬. 그렇다고 수도 한복판에 묻는 건 더 이상하잖아.”

병사들이 툴툴거리면서 관에 씌운 천을 벗기는 순간. 아이니는 손톱이 살에 박힐 만큼 세게 주먹을 쥐었다. 관 안에는 헤움의 몸이 없었다. 남은 것이라곤…….

16551125899087.jpg“뭐야. 왜 옷만 있어?”

16551125899087.jpg“녹았나보지.”

16551125899087.jpg“성수에 녹는다고?”

16551125899087.jpg“괴물이잖아.”

아이니의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눈에서 눈물이 툭 툭 흘러내렸다. 그가 자신을 보며 웃던 미소가 떠올라서 신경줄이 끊어질 듯 괴로웠다. 그런 기분이었으나, 아이니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서 끅끅거려야 했다. 헤움을 향한 원망은 잠시 생각나지 않았다. 성수 사이에서 둥둥 떠다니는 옷만이 눈에 들어올 뿐. 헤움이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 역시 걸렸다. 그가 사디가 대적자인지 확인하겠다면서 나가지 않았던가. 그를 말렸어야 했나? 위험하다고? 이 일이 자신 때문인 것 같단 생각이 아이니를 더욱 괴롭게 했다. 하지만 그 둥둥 떠다니는 옷조차, 병사들이 관을 땅에 묻어버리자 결국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16551125899087.jpg“아우 팔이야.”

16551125899087.jpg“빨리 가자. 아 찝찝해.”

병사들이 서둘러 떠나자 아이니는 비틀거리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병사들이 방금 막 흙을 덮은 곳을 손가락으로 마구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흙을 헤집은 건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손가락 살이 까질 정도로까지 흙을 헤집은 그녀의 눈에 드디어 관이 들어왔다. 관을 들어올리려 했으나 잘 되지 않자 아이니는 손을 뻗어 관 뚜껑만 옆으로 밀어냈다. 사실 이조차도 병사들이 관을 깊게 묻지 않고 떠났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나, 아이니는 거기까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16551125955679.png“헤움. 헤움!”

아이니는 흐느끼면서 관을 내려다보았으나, 멀리서 보았을 때와 코앞에서 볼 때 달라진 건 없었다. 헤움의 옷자락만이 관을 떠다닐 뿐. 이 안에는 헤움의 흔적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16551125955679.png“으아…… 아아…… 헤움…… 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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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니는 흙을 움켜쥐고서 주먹으로 퍽퍽 땅을 두드리면서 울었다. 레들러를 죽인 일로 그를 원망하게 된 건 맞지만 이런 식으로 사라지길 바란 건 아니었다. 그와 얽히고 싶지 않았지, 그가 자신 때문에 한 번 더 죽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그녀는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다가 하늘을 쳐다보며 날카롭게 헤움을 외쳤다. 그때.

16551126011975.png“그러다간 들킬 텐데.”

낮은 목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아이니는 숨을 헐떡이다가 확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나무 뒤쪽. 놀랍게도 칼라인이 서 있었다. 도미스와 똑같은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 뚝 흘러내리자 칼라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니는 그에게 무릎 걸음으로 다가가다가 나무를 짚고 일어나 가슴에 머리를 대려 했다.

16551125955679.png“칼라인. 헤움이. 헤움이.”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다. 지금 당장. 너무나 간절하게. 아니면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아서. 하지만 칼라인은 옆으로 몸을 피해버렸다. 아이니는 그를 잡지 못하고 당황해서 쳐다보았다. 그 슬픈 표정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칼라인은 시선을 옆으로 피하다가 아예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16551126011975.png“그쪽. 아이니 황후가 맞았군.”

아이니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16551126011975.png“폐하의 말대로.”

그러다가 칼라인이 덧붙인 말에 더욱 놀라 입을 벌리고서 물었다.

16551125955679.png“어, 어떻게……?”

그녀는 아직 도미스의 모습을 한 채였다. 그런데 칼라인이, 아니 칼라인이야 그렇다고 해도 결혼식 이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라트라실 황제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고 하자 당혹스러웠다. 심지어 라트라실 황제는 ‘아이도미스’를 본 적도 없지 않던가. 보고야 사디를 통해 들었겠지만. 칼라인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사실 그도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기르골의 집에서 붙잡힌 헤움을 보았을 때부터 라틸이 계획한 일이었으나, 칼라인도 이런 자세한 사정까지는 듣지 못했기에. 칼라인은 그저 라틸이 시키는 대로 용병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돌린 뒤 아이도미스가 병사들을 몰래 뒤쫓을 때 그 뒤를 같이 쫓아왔을 뿐이었다. 라틸이 ‘내 예상이 맞다면 가짜 도미스는 아이니 황후 같은데.’라고 한 말을 들었지만, 칼라인은 라틸이 뭘 계기로 그런 예상을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칼라인은 혼란에 찬 아이니를 보다가 라틸이 전하라고 한 말을 다시 전했다.

16551126011975.png“폐하께서 명령하셨다. 그쪽이 보호를 원한다면 호위를 붙여줄 테니 그만 카리센에 돌아가라고.”

16551125955679.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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