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손등에 키스도 해야지?2022.03.09.
그 시각. 기르골은 미로 저택 안에 있는 수영장에서 참방참방 혼자 물장구를 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자이오르가 햇볕이 들지 않는 구석에 의자를 두고 앉아 마법서를 읽고 있었다.
“응?”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참방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단 걸 갑자기 의식한 자이오르는 마법서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오.”
고개를 들자마자 보인 건 수영장에 서 있는 기르골이었다. 뭘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 수영장 물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기르골.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천장에 난 커다란 창 너머로 태양을 보고 있었다. 자이오르는 괜히 자기 눈이 지끈거리는 느낌에 감탄을 섞어 물었다.
“기르골 님은 태양을 봐도 눈이 안 부십니까?”
태양에 약한 것으로 알려진 뱀파이어가 저러고 있으니 신기했다. 사실 뱀파이어뿐만 아니라 사람도 저렇게는 못 하니까.
“안 부셔.”
기르골은 덤덤히 대답하고서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군요. 신기하네요.”
자이오르는 작게 대답하고서 마법서로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풍덩 소리가 나며 기르골이 수영장 밖으로 나오자, 그는 책을 옆에 두고 무릎에 얹어 두었던 긴 수건을 가져가 건넸다. 기르골이 수건을 받아 어깨에 두르는 동안, 자이오르는 신기할 정도로 흠집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를 구경하다가, 기르골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물었다.
“그런데 아까 그 제자님은 왜 이리 빨리 돌아가신 겁니까? 안쪽에서 피 냄새도 좀 나던데요.”
“안 그래도 신경 쓰여서. 수영을 못 하겠네.”
“어? 싸우고 가신 겁니까?”
“아니. 제자님이 도망갔지.”
“도망이요?”
어리둥절한 자이오르를 뒤로 하고, 기르골은 아까 사디가 피를 떨어뜨린 그 응접실로 가보았다. 그곳엔 유리 파편들이 그대로 남아 흩어져 있었다. 기르골은 핏방울이 떨어졌던 카펫으로 가 붉게 남은 얼룩을 문지른 다음 그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옅게 남은 피 냄새를 맡자 그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이상하지. 대적자들 피는 죄다 맛없는데. 왜 얘 피는 이런 맛이 날까.”
그러다 아예 기르골은 혓바닥까지 내밀어 손가락에 묻은 피의 흔적을 핥아보려 애썼다.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자이오르가 그 광경을 보고는 깜짝 놀라 도로 뒤로 물러났으나, 기르골은 개의치도 않았다.
“들어와.”
오히려 목격자 쪽이 더 민망해져서, 자이오르는 들어오면서 어색하게 변명했다.
“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손가락 핥고 있었다.”
손가락을 내린 기르골이 소파에 앉으면서 볼일을 말하라 손짓하자, 자이오르는 반쯤 연 문에 딱 붙어서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기르골 님.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어.”
“황궁에 그리핀이 나타났다면 거기에 로드가 있단 건가요? 왜, 거기에 그리핀이 나타났다고 하셨잖아요.”
“황제가 로드일 가능성이 더 커진 거지.”
“그럼 가셔야겠네요?”
그런데 말실수라도 하고 만 걸까. 기르골이 흠칫하더니 인상을 구겼다. 자이오르는 몸을 조금 더 뒤로 뺐다. 하지만 기르골은 그에게 화를 내지도 질책하지도 않았다.
“……그러네. 가야 하네.”
불그스름한 흔적이 묻은 자기 손가락을 바라보며 이상한 말을 중얼거릴 뿐.
“네?”
저게 무슨 뜻인지. 왜 몰랐던 일처럼 말하는 건지, 자이오르는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 그러나 기르골은 설명해주지 않았다. 사디가 사랑스럽긴 하지만 대적자 따위일 뿐인데. 그녀 생각을 하다가 로드에 대한 일을 잠시 잊었다고, 어떻게 스스로 말을 한단 말인가.
“오래 살아서 나도 기억이 바래가나.”
대신 이렇게 넘겨 버리자, 거기에 낚인 자이오르가 질문했다.
“아. 오래 살면 뱀파이어도 기억력이 감퇴하나요?”
물론 이번에도 설명은 없었다.
“쇼드 폴리에 다녀온 다음 황제에게 접근해 봐야겠다.”
자이오르의 질문을 넘어가고 자기 볼일부터 말한 기르골은 곧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요즘은 그 여자가 안 보이네? 도미스랑 똑같이 생긴 여자.”
하지만 곧 크게 신경 쓰이진 않는다는 듯, 기르골은 응접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두 번이나 질문이 무시당한 자이오르만이 시무룩해져서 어깨를 떨구었다. 그래서. 뱀파이어 기억력이 감퇴한단 거야 아니라는 거야?
* * * 한편, 기르골이 고민에 빠진 사이. 라틸은 타시르, 라나문과 식사를 마치고 막 밖으로 나가려는 참이었고,
“저도 마침 돌아가려 했으니 함께하겠습니다.”
라나문은 자연스럽게 라틸을 따라나서고 있었다. 타시르는 ‘제법인데?’ 하는 눈으로 라나문을 보긴 했으나,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기분이 상한 눈치는 아니었다. 역시 얘가 제일 수더분해. 라틸은 한 번도 화낸 적이 없는 타시르에게 새삼 감탄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라나문과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별말을 나누지 않고 느릿하게 걸어갔다. 그러다 마침내 라나문의 숙소 근처에 도착하자, 라틸은 라나문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넌 저기지?”
그런데 라틸이 질문을 하자마자, 내내 곁에서 조용히 걷던 라나문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라틸을 불렀다.
“폐하.”
인사를 하려는 투는 아니었기에 라틸은 작별을 말하는 대신 말해보라고 눈짓했다.
“감사합니다.”
라나문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그는 먼저 불러 놓고서, 볼일은 꺼내지 않고 그윽한 밤 같은 눈으로 라틸의 눈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왜 저렇게 분위기를 잡지? 의아해서 덩달아 빤히 있으려니 마침내 그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저는 춤을 못 춥니다.”
“어?”
왜 여기서 자기 고백을……? 라틸은 눈을 깜빡이다가 일단 대답은 했다.
“안다.”
모를 리가. 같이 춤을 춰봤고 발을 몇 번이나 밟혔는데.
‘그런데 왜 갑자기 여기서 저 얘길 하는 거지?’
의아해서 계속 보고 있자니 라나문이 눈을 내리깔고는 다시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폐하. 아트락시 공작가의 자제이자 폐하의 후궁인 제가 춤조차 제대로 추지 못한다면, 외국 귀빈들이 비웃을 겁니다.”
“감히 누가?”
“외국 귀빈들이요.”
“내게 말해라. 널 모욕하는 건 날 모욕하는 거나 다름없으니.”
“!”
이게 요지가 아닌 건가? 순간 라나문이 눈을 약간 크게 뜨는 바람에 라틸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래서 폐하께서 제게 춤을 가르쳐 주셨으면…… 바랍니다.”
그러다가 라나문이 말 맺음이 이상한 부탁을 잇자, 라틸은 그가 30분 전 타시르의 말을 따라 하고 있단 걸 알아차렸다. 이걸 인식하자마자 라틸은 웃음이 나올 뻔해서 입술을 꽉 악물었다. 아니, 좀 시간이 지나서 따라 하던가. 아니면 변형이라도 좀 하던가. 어떻게 이렇게 바로. 하지만 라나문이 그새 또 내리깔았던 눈을 천천히 위로 올리면서 시선을 맞추자, 입가에 감돌던 웃음이 삭 날아갔다. 자신이 아름다운 걸 알고서 그 아름다움을 내뿜으려 작정한 라나문은 백조와 공작새를 섞은 것처럼 보였다. 그 완벽하다 못해 경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눈동자가 ‘널 홀려 버리겠다’는 의지를 가득 품고서 라틸을 바라보자, 라틸은 속으로 몇십 번 연달아 감탄했다. 진짜 잘생기긴 어마어마하게 잘생겼구나. 하지만 별개로 속내가 너무 훤히 보여서 웃기긴 했다.
“폐하?”
“그래.”
작정하고 유혹하려 노력하는데, 앞에서 웃으면 민망하겠지.
‘저 자존심 덩어리는 내가 웃으면 충격을 받을 거야.’
“그래. 네가 또 내 발을 못 밟게 하려면 그것도 괜찮겠다.”
여기서 적당히 마무리 지었다면 서로 좋았을 텐데. 라틸은 라나문의 고고하고 서늘한 표정과 그렇지 못한 속내를 보자, 장난기가 솟아 손등을 내밀고 말았다.
“?”
의아한 눈으로 손등을 보는 라나문에게, 라틸은 히죽 웃으면서 놀렸다.
“타시르는 손등 키스까지 해주던데. 너도 여기까진 해주어야지.”
“!”
* * *
“속을 훤히 읽으셨네요.”
황제가 돌아가자 뒤에서 따라오던 카르둔이 라나문의 곁으로 다가가며 혀를 찼다.
“완전히 놀리고 가셨어요.”
라나문은 막판에 라틸에게 놀림당한 게 충격이었는지 즉석에서 얼어붙은 것처럼 서 있다가, 카르둔의 말을 듣고서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호흡했다.
“그래도 되게 멋있으셨어요, 도련님.”
카르둔은 라나문에게 부채질을 해주었고, 라나문은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르둔의 고민은 황제가 라나문을 놀리고 간 일이 아니었다.
“폐하와 약속을 잡아서 다행이긴 한데…… 괜찮을까요?”
“뭘 말이냐. 내 춤. 아니면 다른 거.”
“춤이야 못 춰서 배우는 건데 걱정할 게 없죠. 전 도련님이 폐하께 너무 차갑게 구는 걸 걱정하는 거예요.”
상황을 지켜보며 카르둔이 한 고민은 이것이었다.
“내가 차가워 보이나?”
“네.”
카르둔은 라나문과 황제의 대화를 떠올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야 라나문이 황제 앞에서는 그나마 덜 차갑게 말한단 걸 알지만, 그거야 몇십 년을 함께 지내온 자신이라 아는 거고. 황제는 모를 터 아닌가.
“대신관은 햇살로 만든 개 같고. 아, 욕 아니고 진짜 멍멍 하는 개요. 게스타는 조용하고 온화하고. 타시르는 꼬리가 백 개 달린 여우처럼 살살 붙잖아요.”
“…….”
“그런데 도련님은 너무 차가우시니, 폐하께서 다정한 후궁들한테 끌려 멀어질까 봐 걱정입니다.”
지금은 얼굴 덕에 안 그러신 거 같지만요. 카르둔은 뒷말은 삼켰다. 라나문이 너무 자신감이 붙을까 봐.
“칼라인은? 그자도 폐하께 맞추는 성품이 아니잖나.”
“근데 그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색기가 흐르잖아요. 그 묘한…… 이상한 분위기요.”
“!”
“좀 영역이 다르죠?”
“클라인 황자는?”
카르둔은 두 번째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걸 말이라고 하시는 건가.
“굳이 제일 성격 더러운 사람이랑 비교하면서 그래도 낫단 소리를 듣고 싶으세요?”
“!”
* * * 해가 뜨기 전이지만, 부지런한 몇몇 사람들은 이미 연무장으로 나와 수련을 하고 있었고, 그중엔 서넛의 모습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새벽에 나와 훈련하던 사람들은 점차 들어갔으나, 새로운 사람들이 다시 나타나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때도 서넛은 여전히 연무장에 있었다. 저녁 즈음이 되어 한 차례 사람들이 더 바뀌어도 마찬가지. 그러다 완전히 해가 지가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지만, 서넛은 연무장에 남아 검을 휘둘렀다. 한밤중이 되었을 때.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건 서넛 하나뿐이었다. 그때. 하늘에서 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지자, 서넛은 검 휘두르는 걸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며 손바닥을 펼쳤다.
‘비?’
그러나 비가 내리는 게 맞는지 확인하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즐겁게 지내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서넛 님.”
고개를 돌리자, 여우 가면을 쓴 키 큰 남자가 기둥 옆에 기대어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가면 아래로 드러난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여우님.”
서넛이 어색하게 그자를 부르자, 여우 가면은 가까이로 다가오며 물었다.
“심심해 보이는데 할 일 하나 드릴까요?”
“할 일이라니?”
“쇼드 폴리에 공동이 하나 나타났는데요. 사슴이 그쪽에 다녀왔는데, 안에서 피인어를 만났답니다.”
“피인어……?”
서넛은 전에 칼라인이 ‘피인어’란 종족에 관해 이야기해 준 걸 떠올렸다. 로드의 편에 붙을 때도 있고 안 붙을 때도 있다는 어둠의 종족들. 그들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환상 속의 인어와 비슷한 생김새이지만 바다가 아니라 동굴 속에서 살며, 물속에 들어가면 몸에서 빛을 희미하게 뿜고, 빛과 피를 마시며 살아간다고 했다.
“좋은 건가? 나쁜 건가?”
“확인해 봐야죠.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러니까…… 한가한 우리 서넛 경이 그쪽으로 가서 확인해주세요.”
한때 가장 바쁜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서넛은 자조적으로 웃다가, 문득 자신과 처지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름을 불러 보았다.
“칼라인 님은…….”
“하렘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후 폐하께서 손꼽히게 총애하는 후궁이 되었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