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미안. 벌레인 줄2022.03.27.
라틸은 기르골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기르골은 라틸의 기색을 눈치채고 설명해주었다.
“대적자는 최우선 순위가 사람들을 지키는 거야, 아가씨. 정해진 건 아닌데 다들 그렇더라고.”
“그래서?”
“대적자에겐 사람들 적은 다 적이라. 식시귀가 사람을 공격하기 전이든 후든, 그들이 인간을 먹는 이상 대적자에겐 없애야 할 대상이지.”
라틸은 기르골이 전에 자신이 ‘사람을 공격하지 않은 식시귀는 해치지 않을 거다’고 했을 때 반응이 묘했던 걸 떠올렸다. 그때 자신의 말이 ‘그녀’와 비슷하다고 했는데. 그러면 최소한 그 ‘그녀’는 대적자는 아니었겠네.
“혹시 네가 가르치고 다닌 게 대적자가 아니라 도플갱어들이었어?”
어쨌든 라틸은 자신을 방어해야 했기에 기르골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런 대적자도 있고 저런 대적자도 있는 거 아니야? 어쨌든, 그 검이란 걸 뽑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심성 검증도 받아야 하나?”
라틸이 황당하단 표정을 지으면서 빈정거리자 기르골은 씩 웃었다.
“그건 아니지.”
당장은 어찌어찌 넘어간 것 같았다. 하지만 라틸은 걱정스러워졌다.
‘날 대적자라고 말해준 건 기르골뿐인데. 그런 기르골도 내가 대적자 같지 않다고 하는 건…….’
“제자님?”
기르골이 라틸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라틸은 얼른 걱정을 옆으로 치워두고 아무렇지 않게 앞을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아, 어쨌든 내 계획대로 하자. 저기 눈에 안 띄는 모험가 두 명 잡아 와줘.”
* * * 기르골은 라틸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이를 수월하게 데려왔다. 그가 모험가 둘을 기절시켜서 한쪽 팔에 하나씩 들고 돌아오자, 라틸은 언덕 끄트머리에 납작 엎드려 있다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이 사람들 옷을 우리가 입자.”
라틸은 여분으로 가져온 옷 두 벌을 꺼내 그중 한 벌을 기르골에게 던졌다. 기르골은 여자 모험가를 라틸 앞에 내려놓고서, 옷과 남자 모험가를 챙겨 수풀 너머로 들어갔다. 라틸도 언덕 아래에서 볼 수 없을 만한 곳에 배낭과 여자 모험가를 데려갔다. 그녀의 겉옷을 벗겨 자신이 입은 다음 여분의 겉옷을 그녀에게 대신 둘러준 라틸은, 모자를 최대한 앞으로 당겨 써 얼굴을 가리고 여자의 옆에는 수표를 한 장 내려놓았다.
“옷이랑 신분 좀 빌릴게. 미안.”
준비를 마치고 나가자 기르골 역시 옷을 다 갈아입고서 나무둥치 아래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 * * 이후 탐험가들 사이에 끼어 공동에 들어가는 건 쉬웠다. 둘은 적당히 눈치를 보면서 공동 주위로 생긴 줄에 섰고, 조금씩 그 줄을 따라 들어갔다.
‘와.’
안쪽이 어두컴컴한 걸 보고 깊은 곳이라 생각은 했으나 공동은 생각보다 더욱 가팔랐다. 조금만 발을 잘못 디뎌도 안쪽으로 떨어질 것 같아서 라틸은 조심조심해서 발을 디뎠다. 그래도 탐험가들이 줄지어서 등잔을 들고 들어가는 덕분에 한 줄기 빛이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있긴 했다.
‘대체 몇 명이 들어간 거야?’
이쯤 되니 라틸은 헷갈렸다.
‘쇼드 폴리 국왕이 도움을 안 받겠다고 한 걸 우리가 안심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한참을 가고 있자니 뒤에서 따라오던 기르골이 갑자기 라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제자님. 물속에서 숨을 얼마나 참을 수 있어?”
그가 아주 작게 물었기에 라틸은 ‘왜 저러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덩달아 작게 대답해주었다.
“한…… 30초? 40초?”
사실은 세어본 적이 없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라틸의 말을 믿었는지, 기르골은 다행이라면서 라틸의 코와 입 부근에 손을 댔다.
“숨 크게 들이마시고. 참아봐.”
그의 경고를 듣자마자 라틸은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기르골이 장난삼아 이러진 않을 테니까. 그 순간. 저 아래쪽에서 아주 커다란 물방울이 ‘펑’ 소리를 내며 터지는 것 같더니, 역류하는 폭포 물줄기처럼 거대한 물이 위로 쏟아졌다. 라틸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기르골이 자신을 당겨 품에 감싸는 걸 느꼈지만, 그 상태로도 엄청난 압박감이 몸을 위로 솟구치게 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물에 떠내려갈 것처럼. 압박감이 잦아들었을 즈음엔 속이 갑갑해졌다. 산소가 모자랐다. 라틸은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가 더욱 기겁했다. 주위가 물로 가득 차 있었다.
‘공동에 물이 차오른 건가?’
놀라는 한편으론 막막해지는 순간. 기르골이 라틸의 코와 입을 막아준 손을 떼고 이번에는 허리를 꽉 잡았다.
그러고는 자세를 이리저리 바꾸는가 싶더니,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미친 듯이 떨려서 라틸은 다시 눈을 감았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을 둘러싼 물이 사라지고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물 밖으로 나왔단 걸 깨닫자마자 라틸은 황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모든 공기를 폐에 집어넣을 기세로 숨을 쉬다가 라틸은 바닥에 손을 짚고 그 위에 이마를 올려주었다.
“30초…… 더 된 거 같은데.”
힘없이 중얼거리자 기르골이 옆에서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났다. 라틸은 머리를 손등에 비비고서 고개를 들어 주위를 자세히 살폈다. 느낀 것처럼 이미 물줄기는 사라졌고 동굴이 물에 차 있지도 않았다. 문제는 물줄기와 함께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사라졌단 거지만.
“다른 사람들은?”
라틸의 질문에 기르골은 태연히 웃었다.
“아마 물에 떠밀려서 밖에 나갔겠지.”
“이런…….”
라틸이 안타까워하자 기르골은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안으로 끌려들어 간 것보단 낫지 않아? 물은 먹었지만 살아 있긴 할 거 아냐.”
그 물줄기를 맞았으니 최소 타박상은 입었을 테지만, 또 아주 틀린 말은 아닌지라 라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라틸도 다른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이동하는 것보단 조용히 가는 게 좋았다. 진짜 모험가가 아니라, 몰래 들어온 것이니 말이다.
“그럼 우리끼리 가자.”
라틸은 그렇게 말하고서 축축하고 무거워진 머리카락을 옆으로 모은 다음 비비 꼬아서 쫙 물기를 뺐다. 몇 번 그러길 반복한 라틸은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서 조금씩이라도 빗어 보려 했다. 나중에 머리카락이 자기들끼리 꼬여 버리면 아프니까. 그런데 작업을 하다가 시선을 느끼고서 옆을 보니, 기르골이 라틸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하얀 속눈썹이 드리워진 붉은 눈동자가 조금의 미동도 없이 라틸의 머리카락과 손을 보아서, 라틸은 천천히 손을 머리카락 사이에서 빼낸 다음 그의 눈앞에 대고 흔들어보았다.
“왜 그래?”
“……아니.”
기르골은 그제야 시선을 돌리고서 앞으로 걸어갔다. * * * 얼마나 그렇게 이동했을까. 가끔 벌레와 물고기가 합쳐진 것 같은 끔찍한 괴물들이 나왔으나 그것들은 기르골이 자기 선에서 해결해주었다. 라틸은 물고기만 한 바퀴벌레들이 근처에 오는 것도 싫었기에, 용기를 발휘해 나서는 대신 기르골의 뒤에 딱 달라붙어 걸어갔다. 그런데 한참 이동했을 즈음. 기르골이 갑자기 멈춰 서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라틸은 또 그 물고기만 한 벌레가 나타날까 봐 몸을 움츠리고서 더욱더 빠르게 주위를 보았다.
“왜? 뭔데?”
하지만 이번에는 그 벌레들이 올 때 나는 ‘사사사삭’ 하는 소리가 없었다.
“왜 그래?”
이에 조금 안도한 라틸이 작은 목소리로 묻자, 기르골이 돌아서더니 라틸의 어깨를 짚고서 물었다.
“제자님. 우리가 여기에 왜 온 거지?”
“서…….”
‘아. 기르골은 서넛 때문에 온 거 아니지.’
“서너 시간 훈련하러 왔지.”
라틸이 얼른 둘러대자 기르골은 ‘서너 시간’이란 부분에 고개를 기웃했으나 곧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훈련하러 왔지. 그런데 제자님이 내 뒤에만 숨어 있으면 훈련이 될까?”
라틸은 그가 자신에게 벌레를 죽이라 할까 봐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그럼. 보기만 해도 경험이 되니까.”
하지만 기르골은 어림없었다.
“내가 앞서갈 테니까. 제자님은 내가 안 보이는 데서 따라와.”
“안 보이는 데서?”
“제자님은 날 못 봐도 나는 제자님 발소리가 들리는 거리에서 가고 있을게.”
말을 하자마자 기르골은 바로 돌아섰으나 라틸은 그를 붙잡았다.
“내가 앞서갈게.”
혹시라도 기르골이 앞서가다가 서넛을 먼저 발견해서 문제가 생기는 걸 염려한 행동이었다. 기르골은 잠시 고개를 기우뚱했지만, 곧 그러라면서 라틸에게 앞서가란 제스처를 했다.
“잘 따라와.”
라틸은 그 물고기만 한 벌레들이 나타날까 봐 무서웠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앞서 걸어갔다. 다행히 이후로는 그 커다란 벌레가 나타나진 않았다. 대신 한창 걸었을 때 라틸은 세 개의 갈림길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중 한 군데 앞에 떨어진 낯익은 목걸이.
‘저거…….’
라틸은 목걸이 앞으로 걸어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건 서넛의 목걸이였다. 라틸이 어린 시절에 그에게 준 목걸이. 영지로 돌아가서도 서넛이 끼고 있던 그 목걸이.
‘목걸이를 떨어뜨릴 일이 뭐가 있지?’
라틸은 목걸이를 주워들고서 초조하게 세 개의 갈림길 중 하나를 보다가, 목걸이가 떨어진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라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동굴 벽에 그림처럼 스며들어 가 있던 피인어 하나가 슬그머니 밖으로 나오더니, 다른 방향 갈림길로 달려갔다. * * * 라틸을 지켜보던 피인어 티투가 간 곳은 피인어들의 지배자 므라딤의 방이었다.
“지배자님!”
티투는 므라딤의 옥좌 앞에 도착하자마자 엎드려서 다리를 꼬리 지느러미로 변하게 한 다음 꼬리 지느러미로 바닥을 세 번 치고 보고했다.
“지배자님, 큰일 났습니다! 지배자님께서 알려주신 그 미친 뱀파이어가 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므라딤은 꼬리 지느러미 비늘을 살피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미친 뱀파이어? 기르골 말이냐?”
“예. 인간 하나까지 끼고 왔습니다. 분명 대적자일 겁니다. 죽일까요?”
말이 끝나자마자 지배자 므라딤의 비늘을 하나하나 닦아주던 피인어 슬린이 얼른 끼어들었다.
“안 됩니다, 지배자님. 대적자를 죽였다가 뱀파이어 로드가 우리를 자기편으로 착각하면 어쩔 겁니까.”
슬린은 천을 내려놓고는 차갑게 씩씩거렸다.
“로드는 늘 초반 기세만 좋지, 나중엔 대적자에게 항상 패하지 않았습니까. 전 대적자가 싫지만 로드에게 붙고 싶지도 않습니다.”
므라딤은 꼬리 지느러미로 슬린을 찰싹찰싹 떼려 하던 업무를 계속하게 하고는, 느긋하게 옥좌 손잡이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로드에게 붙건 안 붙건 기르골은 우리 종족의 적이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던 므라딤은 곧 티투가 들어온 출입구를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지시했다.
“기르골은 죽이고 대적자란 인간은 끌고 와라.”
* * * 서넛의 목걸이를 든 채 앞으로 조심히 걸어가던 라틸은 무언가 자신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는 걸 감지했다.
‘그 벌렌가?’
라틸은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며 들고 있던 서넛의 목걸이로 날아온 것을 휘둘러 때렸다. 서넛에겐 미안하지만 날아온 게 그 거대한 벌레라면 맨손으로 공격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라틸이 후려친 그것은 생각보다 더욱 컸다. 동굴 벽에 부딪히다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쿵’ 소리가 날 만큼.
“윽.”
게다가 신음까지 뱉는다. 벌레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어?’
라틸이 멍하니 보고 있자니, 바위에 엎어져 끙끙대던 인어가 갑자기 확 고개를 돌렸다. 인어가 왜 여기 있는진 모르겠지만 인어를 때릴 생각은 없었던지라, 라틸은 얼른 사과했다.
“미안. 벌레인 줄.”
하지만 인어는 화가 많이 났는지, 그 말에 이를 거세게 드러내며 무어라고 막 욕을 뱉었다. 심지어 쌍욕을. 라틸이 이에 황당해서 “왜 욕하지?”라고 묻자, 인어는 갑자기 놀라서 뒤로 물러나더니 라틸을 경계하며 물었다.
“내 말이…… 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