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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화. 의도치 않게 낯부끄러운 별명 (217/367)

218화. 의도치 않게 낯부끄러운 별명2022.03.30.

들리면…… 안 되는 건가? 라틸은 인어가 쌍욕을 뱉었을 때보다 더욱 놀라고 더욱 당황했다. 라틸은 서넛의 목걸이 펜던트를 움켜잡고서 물었다.

16551129828753.png“내가 인어 말을 알아듣는 게 이상해?”

16551129828759.jpg“인어라니! 불쾌하군. 나는 피인어다.”

16551129828753.png“같은 거 아냐?”

16551129828759.jpg“방금 내가 ‘불쾌하군’이라고 말했을 텐데!”

인어랑 피인어는 그럼 다른건가? 오리랑 오리너구리만큼? 당혹스럽긴 했으나 이게 중요한 건 아니기에 라틸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다른 사람들 귀엔 저 피인어의 쌍욕이 어떻게 들리는 거지?

16551129828759.jpg“이상해. 우리 말은 대적자도 못 알아들을 텐데.”

피인어가 뒷말을 더 붙이자 라틸은 더욱 곤란해졌다. 아까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이유로. ‘혹시 내가 저 인어 말을 알아듣는 게 대적자라서는 아닐까’라고 가까스로 떠올린 가정이 날아가 버린 탓이었다. 라틸은 뭐라고 반응해야 좋을지 주저했다. 지금이라도 못 알아듣는 척해야 할까? 입을 다물어야 하나?

16551129828753.png“내가 대적자인 건 어떻게 알았어?”

그러다 라틸은 결국 질문하는 쪽을 택했다. 욕뿐이라면 어찌어찌 못 알아듣는 척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젠 대화도 좀 하지 않았던가.

16551129828753.png“너는, 아니, 그러니까 인어는 대적자를 알아볼 수 있어?”

피인어는 라틸을 경계하며 차갑게 대답했다.

16551129828759.jpg“그 미친 뱀파이어가 데려왔으면 뻔한 거지. 그리고 인어 아니라니까.”

‘그 미친 뱀파이어’란 건 기르골을 말하는 거겠지. 기르골과 함께 왔으니. 그렇다면 이 피인어는 기르골이 여기에 온 것도 아나 보네.

16551129828753.png‘기르골과 짜고서 날 여기로 끌어들인 건 아닐 거야. 저쪽은 기르골을 적대하는 것 같으니.’

라틸은 초조해졌다. 대적자도 피인어의 말을 못 알아듣는데…… 자신은 알아들었다. 저 피인어가 자신을 대적자라고 판단한 근거는 기르골 곁에 있었기 때문이고, 라틸이 자신을 대적자라고 믿은 근거도 기르골에게 있었다. 물론 기르골은 자신의 판단으로 라틸을 대적자라 여긴 게 아니었다. ‘대적자의 검’을 뽑아보게 하고 판단을 내렸지.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왜 이렇게. 그 순간. 눈치를 보는가 싶던 피인어가 갑자기 또 달려들었고, 라틸은 걱정스레 움켜쥐고 있던 서넛의 목걸이로 또 피인어를 내려쳤다. 이마와 펜던트가 닿았는데 ‘뻑’ 하는 소리가 났고, 피인어는 뒤로 튕겨 나가 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16551129828753.png“미안. 놀라서.”

라틸은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했으나, 이번에는 이마를 맞은 탓인지 피인어는 기절해 있었다. 다가가 쿡쿡 어깨를 찔러 보아도 반응이 없다. 라틸은 피인어를 계속 찰싹찰싹 두드렸다. ‘대적자라도 피인어 말은 못 알아듣는다’라는 부분에 대해서도 더 들어보고 싶고, 서넛. 혹시 서넛을 보았는지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출구 쪽에서 희미하게 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자, 라틸은 피인어 깨우기를 멈췄다.

16551129828753.png‘기르골이 멀지 않은 곳에서 날 따라오겠다고 했지.’

피인어 말을 알아듣는 얘기든, 서넛 얘기든, 기르골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다. 라틸은 주저하다가 일단 피인어를 챙겨 든 다음 앞쪽으로 걸어갔다. 보통 사람들 귀에 피인어의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는 걸어가면서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 * *

16551129828759.jpg“티투가 납치됐어?”

지배자 므라딤이 일갈하자 동굴 벽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부하는 꼬리를 끌어안고서 머리를 숙였다.

16551129828759.jpg“확실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명령을 받고 나간 지 한 시간이 지나도록 연락이 안 되고 있습니다. 15분 단위로 연락하기로 했는데요. 일이 생긴 게 분명합니다.”

므라딤은 주먹을 쥐고서 옥좌 손잡이를 쾅 쾅 쾅 세 번 내려치고, 풍성한 수염을 파르르 떨며 외쳤다.

16551129828759.jpg“분명 기르골 그놈 짓일 거다! 그놈을 죽여! 하나만 가지 마! 하나만 가서 될 리가 없잖아! 다 가서 죽이라고!”

  * * *

16551129828759.jpg“우리 제자님은 냄새는 좋은데. 그 좋은 냄새가 너무 흐릿해.”

기르골은 허공에 희미하게 남은 사디의 향을 맡으며 천천히 동굴을 걸어가고 있었다. 가끔 갈림길이 나오긴 했지만, 그 희미하게 남은 향만으로도 기르골은 방향을 완벽하게 골라 이동했다. 다른 사람들이 단체로 이동했다면 향이 섞여 어려웠겠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물살에 휩쓸려 갔기에 기르골에게 방해가 될 만한 건 거의 없었다. 기르골은 사디의 향이 좋았다. 그녀가 대적자란 걸 감안한다면,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날 듯 말 듯 흐릿한 그 향 속에서 어렴풋이 그녀를 읽어내는 순간이 좋았다. 문득 기르골은 자신이 대적자들의 편에 너무 오래 있어서 영혼이 그쪽으로 정말 바뀌어가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던 중.

16551129828759.jpg“음?”

기르골은 걷던 걸 멈추고 동굴 벽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기웃했다. 동굴에 그려진 벽화가…… 저렇게 많았던가? 대답은 ‘아니오’였다. 기르골은 판단을 내리자마자 씩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16551129828759.jpg“우리 인어들은 학습 능력이 없는 편이네.”

들으라는 듯 적당히 큰 목소리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 중얼거림이 끝나자마자, 벽화에서 피인어들이 튀어나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16551129828753.png‘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거 같은데?’

라틸은 기절한 피인어를 둘러메고 걸어가다가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

16551129828753.png“……아닌가.”

하지만 착각인가, 싶을 즈음. 다시 뒤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라틸은 눈살을 찌푸리고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애매했으나 자세히 들으니 싸우는 소리 같았다.

16551129828753.png‘기르골?’

라틸은 놀라서 그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복도처럼 된 동굴을 열 걸음쯤 뛰다가, 마음이 변해 도로 걸음을 멈추었다.

16551129828753.png‘괜찮을 거야. 기르골은 세잖아?’

기르골은 최소 500년 이상 살아왔고, 로드와 대적자의 전쟁에서도 승리한 뱀파이어였다. 이곳에 오잔 이야기도 그가 먼저 꺼냈고, 여기에 와서도 주저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반면 서넛은 뱀파이어이지만 좀 부실한 뱀파이어였다. 지금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면, 서넛을 돕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쩌면 기르골이 한눈을 판 틈에 서넛을 구해서 빼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

16551129828753.png‘맞아. 서넛을 먼저 찾아야 된다.’

마음을 바꾸자마자 라틸은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서 떨어진 다음, 기절한 피인어를 다급히 깨웠다. 같은 곳을 연달아서 두드리자 피인어는 눈을 번쩍 뜨고서 또 욕을 뱉었다. 라틸은 피인어에게 ‘왜 욱하냐’고 따지는 대신 바로 질문했다.

16551129828753.png“이봐, 인어.”

16551129828759.jpg“피인어라니까!”

16551129828753.png“여기에 나나 기르골보다 먼저 도착한 뱀파이어가 하나 있을 거야. 어디 있는지 알아?”

  * * * 그건 라틸에겐 중요한 질문이었으나, 얻어맞고 기절해 있다가 깨어나면서 또 얻어맞은 피인어 티투에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중요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티투는 이 대적자인지 뭔지 모를 것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녀는 자기를 연달아 때린 데다가 처음엔 벌레라 불렀고, 다음엔 인어라 부르지 않았던가. 티투는 홧김에 거짓말해 버렸다.

16551129828759.jpg“죽였다! 뱀파이어는 다 죽일 거거든!”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평범한 데다 존재감도 흐릿해서 영 대적자치고는 매가리가 없던 여자의 눈동자가 오싹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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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고 따스하던 파란 눈동자가 얼어붙은 극지방의 얼음덩어리처럼 변하자, 티투는 어깨부터 손목까지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거의 추위를 못 느끼는 피인어답지 않은 반응이었기에, 그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스스로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티투의 몸은 착실하게 생존 본능을 따랐다.

16551129828759.jpg“잡, 잡아뒀는, 데요.”

티투의 목소리가 공손해지고 입에서도 진실이 나오자, 한순간 오싹해졌던 인간 여자가 빙긋 웃고서 어깨를 두드렸다.

16551129828753.png“앞으론 이런 걸로 거짓말하고 그러지 마. 놀랐잖아.”

두 번 놀랐다간 피인어 하나 잡을 기세였으나, 티투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16551129828753.png“어딨어? 앞장서.”

인간 여자가 명령을 내리자마자 티투는 벌떡 일어나서 삐걱삐걱 걸어갔다. 하지만 걸어가면서 그는 절대로 저 인간 여자는 대적자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대적자일 리가 없었다. 피인어의 말을 알아듣는 것도 그렇고, 잠깐 드러났다 사라진 저 무서운 분위기도 그렇고. 그렇다면 대체 저 여자는 뭘까?

16551129828759.jpg“그쪽, 대적자 아니지? 요?”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티투는 걸어가다가 직접 물어보았다. 그러면서도 티투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 ‘인간 여자’에게 한 방을 먹였다는 걸. * * * 라틸은 ‘왜 갑자기 저 인어가 저렇게 덜덜 떨지?’ 생각하면서 걸어가다가, 난데없는 질문에 허를 찔려 입술을 깨물었다. 저 인어가 ‘대적자도 우리 말은 못 알아듣는다’고 말하긴 했다. 그렇지만 그뿐, 라틸이 대적자인 걸 부정하려 들진 않았는데. 갑자기 왜 저렇게 대놓고 ‘너 대적자 아니지?’라고 묻는 걸까. 라틸은 인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해보려 했으나, 보이는 건 파랗게 질린 얼굴과 연신 움찔거리는 눈동자가 전부였다.

16551129828753.png“그럼 뭐 같은데?”

라틸이 되묻자 피인어는 기가 죽어서 중얼거렸다.

16551129828759.jpg“그건 모르겠는데요.”

이 인어는 뒷말이 늘 문제였다.

16551129828759.jpg“로드 같기도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인 말에 라틸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남이 가능성을 말해주는 건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다. 라틸의 시선이 닿자 피인어는 좀 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16551129828759.jpg“물론 로드라면 그 미친 뱀파이어랑 같이 다닐 리는 없겠지만요…….”

라틸은 몹시 심란해졌으나, 이런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했다.

16551129828753.png“엘프야.”

믿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자신도 이렇다저렇다 대답하기 어려우니, 그냥 터무니없는 걸 부른 거였다. 대답을 회피하는 뜻에서. 하지만 피인어가 “그렇군요.” 하고 중얼거리는 바람에, 라틸은 심란해하던 와중에도 눈살을 찌푸렸다.

16551129828753.png‘그렇군요? 왜 저렇게 순순히 대답해? 진짜 믿나?’

그 생각은 앞서 안내하던 피인어가 갑자기 어느 커다란 바위 앞에 멈춰 서면서 팔을 쭈뼛 뻗는 바람에 더 이어지지 못했다.

16551129828759.jpg“여깁니다.”

저 안에 서넛이 있단 거지. 라틸은 아직까지도 내내 쥐고 온 서넛의 목걸이 펜던트를 쥐면서, 피인어에게 문을 열란 표시를 보냈다. 피인어는 두 손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벽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손목까지. 거의 벽을 통과하는 수준으로 보여서, 라틸은 조금 놀라 피인어의 손을 빤히 쳐다보았다.

16551129828753.png‘저게 피인어의 능력인가?’

피인어가 손을 빼내자 평범한 바위로만 보였던 동굴 벽은 ‘스르르릉’ 하는 묵직한 소리를 내면서 옆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16551129828753.png‘서넛!’

라틸은 속으로 서넛을 부르면서 피인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서넛을 구해내는구나! 하지만 그 안에 서넛은 없었다. 라틸은 사방으로 눈을 굴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 안에 있던 건 오히려 서넛이 아니라 또 다른 피인어들이었다. 옥좌에 앉은 피인어, 그 곁에 앉은 피인어, 엎드린 피인어, 피인어, 피인어들……. 수많은 피인어들.

16551129828753.png“이봐, 없잖아.”

어디에서도 서넛을 찾지 못한 라틸은 자신을 안내해 준 피인어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그 피인어는 동료들을 만나자 공포심이 사라졌는지, 대답 대신 라틸을 휙 떠밀었다. 그러고는 라틸이 균형을 잡는 짧은 찰나에, 옥좌에 앉은 피인어에게 빠르게 달려가 고자질했다

16551129828759.jpg“지배자님! 기르골과 함께 다니던 엘프를 잡아 왔습니다!”

  * * * 그로부터 20분쯤이 지난 시각. 기르골은 피인어들을 반쯤 가지고 놀면서, 사디를 데려와서 상대해보라 해야 하지 않나 고민 중이었다. 그때.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끄트머리에만 붙어 있던 한 피인어가 갑자기 동굴 벽에 귀를 가까이 가져다대는가 싶더니, 혼자 히죽 불길하게 웃었다. 왜 저러는 거지? 의아하게 생각할 찰나. 그 피인어는 벽에서 귀를 떼더니, 아까보다 훨씬 교활하게 웃으며 기르골을 불렀다.

16551129828759.jpg“이봐, 미친 뱀파이어.”

갑자기 용기가 생긴 듯한 그 태도에 기르골은 피인어들을 굴리길 멈추고 그쪽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기르골을 부른 피인어가 히죽 승리를 확신하며 웃었다.

16551129828759.jpg“더 싸우지 마라. 투항하지 않으면 네 동료 엘프를 죽일 거다.”

무료하고, 그래서 더욱 잔인하던 기르골의 얼굴이 조금 구겨졌다. 엘프?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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