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2화. 완전한 이별? (221/367)


222화. 완전한 이별?
2022.04.13.


칼라인은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움찔했다. 그는 당장 달려가서 라틸을 돕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저런 병사 몇십 명 정도를 해결하는 것쯤은, 꼭 그들을 죽이지 않더라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바로 나갈 수 없었다. 병사들 때문이 아니라…….

16551130628677.jpg

‘기르골.’

라틸과 함께 있을 기르골. 그자 때문에.

기르골은 라틸을 사디로 알고 있었고, 사디를 대적자로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현재는 사디를 지켜주고 있고.

하지만 그가 나타나 사디를 보호하려 든다면 기르골은 의심을 하게 될 것이다.

‘어라. 왜 쟤가 대적자를 지키지?’ 하고.

그게 몇십 명의 병사들보다 더 위험한 일이었다.

16551130628677.jpg

‘병사들은 괜찮다. 내가 해결 가능한 이들을 기르골이 못 해결할 리 없으니.’

칼라인은 초조한 스스로를 달래며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1655113062873.jpg

 

* * *


16551130628745.jpg

“어쩔 거야?”

라틸이 작게 묻자 기르골이 되물었다.

16551130628753.jpg

“우리 ‘대적자답지 않은’ 사디 양 의견은?”

16551130628745.jpg

“무슨 소리야?”

16551130628753.jpg

“아가씨라면 목격자를 없애고 탈출을 꾀할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아니, 이게 사람을 어떻게 보고? 라틸이 째려보자 기르골이 이 와중에 맑게 웃었다.

16551130628753.jpg

“아닌가?”

16551130628745.jpg

“당연히 아니지. ……그건 뒤로 미뤄. 최후의 수단이다.”

16551130628753.jpg

“!”

기르골이 눈을 커다랗게 뜨는가 싶더니,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자기 손으로 입술을 누르고 웃었다.

라틸은 재차 그를 가자미눈을 하고 보다가, 돌연 타시르가 ‘가자미!’ 하고 외치는 게 떠올라 억지로 토끼 눈을 하고 제안했다.

16551130628745.jpg

“그대가 날 업고 아주 빨리 달리면 어떨까?”

16551130628753.jpg

“아가씨, 표정이 부담스러워.”

16551130628745.jpg

“달릴 수 있냐고.”

16551130628753.jpg

“달릴 수야 있지. 괴물이 다녀갔단 소리가 돌겠지만.”

라틸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미간을 구겼다. 괴물이 다녀간 건 맞지. 하지만 그런 소리가 돌면 안 된다.

아니, 소리가 도는 것도 괜찮긴 하다. 그러면서 얼굴이 공개되는 게 안 되지. 그럼 어쩐다…….

16551130628745.jpg

“내가 타리움 특사란 걸 밝히면 어떨까?”

16551130628753.jpg

“난 그런 문젠 잘 몰라, 아가씨.”

기르골이 어깨를 으쓱하자 라틸은 조금 더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16551130628745.jpg

“아니, 이건 안 되겠어. 국가 문제로 비화할지도 모르니까.”

쇼드 폴리 국왕은 라틸이 도와주겠단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데도 특사를 보내 몰래 조사하고 있었단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불쾌하게 여길 거다.

불쾌하게 여겨 봤자 훨씬 강대국인 타리움을 공격하진 못하겠지만, 라틸은 타리움을 고립시킬 마음은 없었다.

16551130628745.jpg

‘부딪치지 않을 수 있다면 부딪치지 않는 게 좋지.’

그때. 기르골이 라틸이 고민하는 모습을 힐긋 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16551130628753.jpg

“이쪽은 빛이 없어서, 아마 저 병사들한테 아가씨까진 안 보일 거야.”

라틸은 발치만 내려다보다가 “어?” 하고 고개를 들었다.

16551130628745.jpg

“무슨 소리야?”

16551130628753.jpg

“내가 먼저 나가서 시선을 끌어줄 테니 아가씬 숨어 있다 달아나.”

라틸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놀라서 기르골의 허리를 잡았다.

16551130628745.jpg

“무슨 소리야?”

16551130628753.jpg

“나중에 우리 집에서 다시 만나. 돌아간 후에.”

16551130628745.jpg

“아니, 그게 아니라. 잡히면 위험하잖아.”

16551130628753.jpg

“위험하지. 저 병사들이.”

기르골의 말에 라틸은 주저했다. 그래. 위험하긴 하지. 병사들이.

16551130628745.jpg

“그건 그렇지만…….”

대적자의 스승이니 무지막지하게 강하겠지. 게다가 그 피인어들 사이에서도, 기르골은 붙잡혀 있긴 했지만 위기에 처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 병사들 수나 피인어 수나 거기서 거기이니, 아마 위험하지 않을 거란 기르골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16551130628753.jpg

“저들의 안위를 위해 내가 안 잡히길 빌어줘, 사디 양.”

16551130628745.jpg

“저들이 그대 얼굴을 보면? 그댈 공개적으로 수배할 텐데?”

16551130628753.jpg

“그렇겠지?”

16551130628745.jpg

“그댄 얼굴이 눈에 띄잖아.”

라틸이 생각하는 문제는 이 점이었다. 아무리 기르골이라고 해도 얼굴이 알려지면 위험하진 않아도 귀찮아질 것이다. 아주 많이.

그런데 시선을 끌며 달아나겠다니. 하지만 기르골은 태연히 웃었다.

16551130628753.jpg

“사디 양이 훌륭한 대적자가 되면 다 해결돼. 누가 대적자의 스승에게 뭐라 하겠어?”

말을 마친 기르골은 라틸의 머리카락을 보며 물었다.

16551130628753.jpg

“건드려 봐도 돼?”

갑자기 그건 왜? 의아해하면서도 라틸이 멍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손을 올리더니 라틸의 젖은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넣고 빗으로 빗듯 쓸어보았다.

그러다가 머리카락 가까이 코와 입을 가져다 대서 라틸은 깜짝 놀랐다. 냄새를 맡는 건지 입을 맞춘 건지 알 수 없는 행동.

그러나 뭘 한 거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머리카락을 놓아주며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16551130628753.jpg

“만약 이대로 한…… 몇 년 정도 지나면…….”

뒷말은 하지 않았다.

16551130628745.jpg

“지나면?”

라틸은 그 뒷말이 궁금했으나, 기르골은 뒷말을 알려주지 않고 일어섰다.

라틸은 얼른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그 상태로 가만히 있자니 바위를 발끝으로 내딛는 소리가 한 번 들렸고, 곧이어 멀찍이서 “잡아!” “잡아라!” “수상한 자다, 잡아!” 하는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수많은 발소리, 아마도 병사들의 발소리가 우르르 멀어졌다.

그 바람에 공동 입구 부근이 아주 약간 떨렸다.

라틸은 무릎을 끌어안고 있다가 기르골이 건드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들어보았다. 무슨 뜻이었을까? 몇 년이 지나면?

* * *

거의 20분, 아니면 30분쯤 지났을 무렵. 주위에 아무도 없는 듯하자 라틸은 슬그머니 바위 뒤에서 빠져나와 공동 밖으로 나왔다.

병사들이야 어차피 기르골을 놓칠 테니, 시간을 더 끌면 그들이 포기하고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전에 나가려는 것이었다.

16551130628745.jpg

“와…… 이게 무슨.”

예상대로 나가 보니 병사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먼발치에 모험가들은 그대로 있었다.

애초에 그들은 공동을 조사하라고 고용된 이들이기에 수상한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들을 쫓아가지 않은 것이다.

모험가들은 변두리에 앉거나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라틸을 발견하자 오히려 자기들이 더 놀라 굳었다.

서로가 놀라 생긴 몇 초의 정적 후.

라틸은 최대한으로 속력을 내어 숲으로 뛰어갔다.

16551130682355.jpg

“병사!”

16551130682355.jpg

“누가 병사 불러!”

모험가들은 위험을 감수할 마음은 없는지 라틸을 쫓진 않았지만 병사들을 부르러 갔다.

라틸은 혀를 찼다. 기르골 덕에 쇼드 폴리에 잡혀가는 일은 없게 됐지만 목격자들이 얼굴을 봐 버렸으니 결국 귀찮아지긴 할 것 같았다.

그들이 행동을 빠르게 한다면 수배서가 걸려서 이동 자체가 까다로워질지도 모르고.

그 순간.

16551130628677.jpg

“이쪽으로.”

누군가 라틸의 옆으로 다가와 속도를 맞추면서 말했다. 옆을 보자 칼라인이었다.

16551130628745.jpg

“!”

따라왔어? 뛰는 도중 옆을 보다가 나무뿌리에 발이 걸린 라틸이 휘청이자, 칼라인은 라틸을 부축해 품에 안고는 계속 뛰었다.

아니, 아까는 라틸과 속도를 맞추느라 잠시 느리게 달렸던 듯, 그는 라틸을 안자마자 속도가 더 빨라졌다.

16551130628745.jpg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16551130628677.jpg

“계속 따라왔습니다. 공동 안엔 들어가지 않았지만요.”

16551130628745.jpg

“내가 있으라 그랬잖아.”

16551130628677.jpg

“어떻게 그럽니까. 여기 올 거란 걸 뻔히 아는데.”

너무 빠른 속도 탓에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헝클어지자, 라틸은 한쪽 팔로 칼라인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모아 움켜쥐었다.

그래도 칼라인이 원체 단단하게 라틸을 안아 든 터라 자세는 안정적이었다.

16551130628745.jpg

“내가 누구랑 왔는지도 알아?”

16551130628677.jpg

“따라왔는데 모를 리가요.”

라틸은 칼라인이 기르골과 사이가 나쁘단 걸 알기에 조금 민망해졌다.

하지만 숲 깊은 곳을 지날 무렵. 라틸은 민망함을 누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16551130628745.jpg

“기르골을 돕지 않아도 될까?”

상황을 다 지켜봤다면 칼라인도 이미 기르골이 사디를 위해 병사들의 눈길을 끌어준 걸 알 거다.

그런데도 그냥 가버린다는 건 도울 마음이 없단 걸 테지만 그래도 영 신경이 쓰였다.

칼라인은 표정에 거의 변화가 없는 채 온기 없이 대답했다.

16551130628677.jpg

“그 괴물한테 해를 입힐 인간은 없습니다.”

그거야 그렇겠지.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칼라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 순간. 내내 흔들림 없이 나아가던 칼라인이 조금 삐끗했으나 그것도 아주 잠시. 그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사디와 있는 모습을 기르골이 혹시라도 볼까 봐 속도를 유난히 더 내는 것이었다.

이를 모르는 라틸은 칼라인이 자신이 기르골과 가깝게 지낸 걸 알고 좀 화가 난 게 아닌가 걱정했다.

그러다 몇 개의 숲을 지나가고, 국경을 지나 몇 개의 마을을 지나쳐 갈 때쯤이 되자 해는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늘은 짙은 회색이 되고 라틸의 배에서도 꾸륵꾸륵 소리가 났다.

라틸 스스로도 거의 듣지 못한 소리였으나 칼라인은 소리를 바로 눈치채고서 멈춰 섰다.

16551130628677.jpg

“쉬었다 가야겠습니다.”

16551130628745.jpg

“괜찮은데.”

16551130628677.jpg

“주인은 사람이니까요. 쉬고 먹어야 합니다.”

칼라인은 호숫가에 라틸을 내려주고는 잠시 정면을 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주위에서 수상한 소리가 나진 않나 확인하는 듯했다.

마침내 그는 위험하지 않단 판단이 선 건지 경계를 풀고서 자신의 코트를 벗었다.

16551130628677.jpg

“이걸 덮고 계십시오.”

코트를 라틸에게 덮어 준 칼라인이 먹을 걸 구해오겠다며 어딘가로 가버리자, 라틸은 커다란 그의 코트에 파묻힌 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땔감으로 쓸 나뭇가지들과 낙엽을 긁어모았다.

그 작업이 끝난 뒤에도 칼라인이 아직 오지 않아서, 라틸은 나뭇가지 근처에 앉아 잠깐 기르골 생각을 했다.

16551130628745.jpg

“기르골도 이 속도라면…… 먼저 돌아갔을지도 모르겠네. 날 안 업고 가니까 더 빠르겠지.”

생각은 자연스럽게 ‘사디’의 얼굴을 쇼드 폴리 모험가들이 보았을 거란 생각으로 흘러갔다.

모험가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이들이었다. 개중에는 자기 모험담을 돌아다니면서 팔거나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 라틸은 그게 걱정이었다.

‘사디’는 사람들 사이에 잘 묻히는 편이고 유독 존재감이 없긴 하지만, 공동에서 빠져나왔을 때 라틸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얼굴을 보았으니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사디 얼굴을 바로 기억했을 것이다.

그들의 기억을 토대로 쇼드 폴리에서 수배서를 만들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특사 신분으로 위장했는데 오히려 이 때문에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라틸은 심란해져서 연신 엄지를 물어뜯었다.

16551130628677.jpg

“버섯을 구했습니다. 구워 드리겠습니다, 주인.”

그러고 있자니 칼라인이 수풀 사이로 나타났다.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손가락을 내렸다.

그런데 버섯을 품에 가득 안고 오던 칼라인이 라틸을 보자 우뚝 멈춰서서 눈썹을 올렸다. 품에서 버섯이 대여섯 개 굴러떨어지는데도 그것조차 모르고서.

16551130628745.jpg

“왜 그래?”

그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자 라틸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칼라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떨어뜨린 버섯을 줍더니 다가오면서 알려주었다.

16551130628677.jpg

“얼굴이 변했습니다, 주인.”

16551130628745.jpg

“내 원래 모습으로?”

라틸은 덩달아 놀라 물었다. 칼라인은 고개를 저었다.

16551130628677.jpg

“아니요. ‘사디’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요.”

16551130628745.jpg

“진짜야?”

라틸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보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잘 알기 어려웠다.
 

16551130713183.jpg

   

16551130628677.jpg

“마법 물품으로 얼굴을 바꾼 거라고 했지요?”

16551130628745.jpg

“어. 한 얼굴로만 바꿀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왜 갑자기 바뀐 거지?”

16551130628677.jpg

“바뀌기 전에 한 행동이라거나, 그런 게 있습니까?”

16551130628745.jpg

“사디 모습이 공개 수배될까 봐 걱정했어. 아. 혹시 그래서인가?”

라틸은 얼굴을 더듬거리다가, 의식적으로 ‘다시 사디로 돌아와라. 사디로 돌아와.’ 하고 생각하며 손을 내리고 칼라인을 보았다.

16551130628745.jpg

“사디로 돌아왔어?”

그러나 칼라인은 고개를 저었다.

16551130628677.jpg

“바뀐 모습 그대로입니다.”

라틸이 인상을 구기자, 칼라인은 그런 라틸의 얼굴을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의견을 제시했다.

16551130628677.jpg

“아까는 위급한 상황이어서 바뀐 거고, 지금은 너무 의식적이어서 그런 걸까요?”

16551130628745.jpg

“모르겠어.”

라틸은 중얼거리고서 이마를 짚었다.

아예 얼굴이 바뀌었으니, ‘사디’가 임무 도중 죽거나 다쳐서 새로운 특사가 왔다고 하면 되긴 하다. 이 얼굴로는 ‘사디’가 수배되어도 쫓길 일도 없고.

하지만…….

16551130628745.jpg

‘기르골은 사디를 대적자로 알고 있는데. 사디 얼굴로 변신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