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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화. 클라인은 서넛에게 화내도 된다 (228/367)

229화. 클라인은 서넛에게 화내도 된다 2022.05.08.

16551132285872.png ‘결국 게스타에겐 정체를 캐묻지 못했고, 타시르와만 잔뜩 수다를 떨고 나와 버렸어…….’

터덜터덜 하렘을 나서며 라틸은 어깨를 시무룩하게 늘어뜨렸다.

16551132285872.png ‘아니, 물론 재미있긴 했지만.’

그래도 목표를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 타시르와 게스타, 대신관 세 사람이 모이면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진 알게 되었지만. 해야 할 걸 하지 못한 것 같은 찝찝함은 집무실에 돌아갔는데도 서넛이 보이지 않자 더욱 극심해져서, 라틸은 입술을 꾹 다물고 온 눈으로 노기를 표현했다. 그 덕택에 찔리는 시종장이 평소보다 빠릿빠릿하게 일을 하긴 했으나, 저녁 식사를 할 때가 되도록 서넛이 나타나지 않자 라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다른 때라면 기분 상하는 일이 있어도 표정 관리를 하고 있겠지만, 서넛은 아무래도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가 나타나서일까. 영 신경 쓰였다.

16551132285881.jpg “제가 서넛 경을 불러올까요, 폐하?”

16551132285872.png “아니. 됐습니다, 사블레 후작. 어디 한 번 맘대로 돌아다녀 보라고 해요.”

16551132285881.jpg “…….”

16551132285872.png “오기만 해봐. 내가 아주…… 아주…….”

16551132285881.jpg “혼내시려고요?”

16551132285872.png “그건 아니지만.”

딱히 혼을 낼 건 아니지만 어쨌든 기분이 상해서 라틸은 괜히 서류마다 꾹꾹 힘주어 서명했다.

16551132285872.png “그래도 저녁 전엔 오겠죠.”

  * * *

16551132285872.png ‘저녁 식사할 때가 됐는데도 안 왔어.’

밀렸던 업무를 바쁘게 처리한 라틸은 마지막 남은 서류에 사인을 하자마자 펜을 내려놓고 눈두덩이를 엄지와 검지로 눌렀다. 이마에 살짝 열이 올라왔다. 다른 데 가지 말고 곁에 있으라 말한 지 아직 하루도 안 됐는데, 대체 어딜 간 거야? 중간중간 다른 사람들은 서넛을 보았단 걸 보니 완전히 다른 데 간 건 아닌데. 물론 라틸이 ‘서넛 경더러 여기 오라 해라’라고 명령을 내린다면 그는 왔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를 피해서 쏙쏙 돌아다니는 서넛을 명령으로 불러오는 건 그 나름대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 않은가. 라틸은 ‘드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벌떡 의자에서 일어서서 당장 집무실을 나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기분이 상해서인가 입맛도 없었다. 그냥 침대에 누워서 도미스가 살아 있는지나 확인하고 싶을 뿐.

16551132285872.png ‘내가 도미스 꿈을 꿀 때 대신관이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며 왔잖아. 이어서 꿔도 되는 건가?’

그런데 씻고 자야 할지 씻고 대신관을 불러야 할지 고민하며 침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라틸의 겉옷을 받아들고 정리하던 시녀 하나가 슬쩍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권했다.

16551132285881.jpg “폐하. 몸이 안 좋으시다 회복되셨으니, 오랜만에 온천에 가시면 어떨까요?”

라틸은 셔츠 단추를 푸르다가 시녀를 보았다.

16551132285872.png “온천?”

16551132285881.jpg “네. 온천에 목욕하면 몸에 좋다고 하니까요.”

좀 귀찮은데. 라틸은 떨떠름해서 시간을 보았다. 저녁 시간. 요즘은 해도 빨리 진다. 온천은 하렘 내부에 있었지만, 후궁들의 거처와는 거리가 있는 동남쪽에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 걸어가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고. 온천에 도착해서 몸을 담그면 바로 어두워지지 않을까? 물론 주위에 등을 켜놓아서 실제로 깜깜하진 않을 테지만,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거기까지 다녀오려니 영 내키지 않았다.

16551132285872.png “음…… 글쎄.”

라틸은 주저했으나, 시녀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걸 발견하자 마음을 바꿔서 고개를 끄덕였다.

16551132285872.png “알았다. 가지.”

16551132285872.png ‘정 안 되면 대신관 방에 가서 자고 와도 되겠지. 그러면 꿈은 이어서 안 꿀 테니까.’

라틸은 벗었던 겉옷을 도로 걸친 다음, 온천에 들어갈 때 입을 수영복을 챙겨 다시 밖으로 나섰다.

16551132285872.png “한 명만 따라와. 조용히 갔다 오고 싶으니.”

조용히 몸만 담그고 있다 올 생각이라, 라틸은 시녀 한 명만을 데리고 긴 회랑을 걸어갔다. * * * 온천 건물에 도착한 라틸은 옷을 갈아입고서 온천물이 있는 안쪽 공간으로 들어갔다. 녹색 기둥 네 개 사이에 커다랗게 자리한 온천은 주위와 바닥에 잔잔한 에메랄드색 돌을 깔아서 물까지 비슷한 색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16551132285872.png ‘아낙차 후궁이 여길 좋아했지.’

라틸은 틀라 황자의 모친을 떠올리고는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16551132285872.png ‘여기에 오면 그 여자를 마주칠 확률이 높아지니까 되도록 안 오려 했지. 하지만 이젠 그 여잔 없으니 피할 필요도 없어.’

라틸은 반사적으로 구겨지려는 이마를 두 손으로 누르면서 온천 가장자리로 가 발만 담그고 앉았다. 발끝에서 느껴지는 뜨끈한 감각이 피로를 풀어주길 기대하며, 아낙차를 머릿속에서 밀어내고 아름다운 공간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려 애썼다. 어렵진 않았다. 가을밤 공기가 차갑기 때문일까. 온천물 위로 자욱한 안개가 피어올라, 이곳을 평소보다 더욱 신비롭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라틸은 손을 물에 넣어 참방거리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그러다 찰박 소리가 맞은편에서 들리자, 라틸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16551132285872.png ‘다른 사람이 와 있나?’

하지만 앞에는 안개가 너무 짙어서 누가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16551132285872.png “누구냐.”

그러나 안개 사이 사이로 누군가 있긴 한 것 같아서, 라틸은 물장구를 멈추고 불러보았다. 그 질문에 대신 대답해주려는 듯 마침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물가에 고여 있던 안개를 양옆으로 몰아냈다.

16551132352011.png

  라틸은 그 사이에서 클라인을 발견했다. 그가 물에 몸을 담그고서 라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팔을 뻗어 맞은편 가장자리를 짚은 클라인은 배 부근까지만 몸이 잠겨 있었고, 머리카락은 이미 습기로 축축하게 늘어져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클라인이 장난치듯 미소 지었고, 라틸은 잠시 멍해졌던 마음에 정신이 돌아와 입을 열었다.

16551132285872.png “클라인?”

안개에 둘러싸인 클라인은 후궁 클라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클라인을 흉내 낸, 상대를 미혹한다는 몬스터처럼 보였다. 라틸은 조마조마한 눈으로 자신을 보며 온천을 권하던 시녀를 떠올리고,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갑자기 온천에 가보라 하더니. 클라인이 뭔가를 부탁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성적인 판단은 클라인이 물살을 헤치고 자신 쪽으로 헤엄쳐 다가오자, 아까 바람에 휩쓸려 사라진 안개처럼 풀풀 흩어졌다. 미끄러지듯 라틸의 바로 앞까지 헤엄쳐 온 클라인이 정교한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16551132352021.png “폐하.”

그의 목소리는 라틸의 심장을 두드리는 가벼운 손길처럼 들려서, 라틸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16551132352021.png “오랜만에 뵙습니다.”

16551132285872.png “네가…… 여기에 들어와 있을 줄은 몰랐는데.”

16551132352021.png “물이 따뜻합니다. 안 들어오실 겁니까?”

술수를 써서 라틸과 마주쳤기 때문인지, 클라인은 ‘저도 몰랐습니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뒤로 조금 물러나며, 유혹하는 세이렌처럼 물을 살짝 튀게 하자, 라틸은 더 머리 쓰기를 그만두고 물 안으로 천천히 따라 들어갔다. 뜨거운 물 안에 대번에 목까지 집어넣자 잠시 온몸에 소름이 돋았으나, 그런 감각은 빠르게 가라앉으며 곧 뜨끈한 열기에 얼굴이 붉어졌다. 라틸은 숙였던 몸을 약간 일으키고서 여전히 맞은편에 있는 클라인을 보았다. 그의 피부 위로 방울방울 맺힌 물방울들이 유리병에 맺힌 샴페인 몇 방울처럼 보였다. 클라인은 한 손을 들어 축축하게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고는 자연스럽게 라틸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손바닥에 물을 담아 라틸의 어깨에 부어주며 물었다.

16551132352021.png “폐하는 당연히 제가 보고 싶으셨겠지요?”

16551132285872.png “질문이 아닌데.”

16551132352021.png “저라면 제가 보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16551132285872.png “무슨 소리야. 넌 내가 보고 싶어야지.”

라틸이 타박하자 클라인은 라틸의 어깨에 물 부어주던 걸 멈추고, 커다란 손으로 어깨를 부드러우면서도 힘있게 눌러주었다.

16551132352021.png “어깨가 많이 뭉쳤습니다.”

16551132285872.png “방금 대답을 피한 거 같은데.”

16551132352021.png “제가요?”

16551132285872.png “넌 내가 안 보고 싶었느냐?”

16551132352021.png “어깨가 단단합니다, 폐하. 제가 풀어드리겠습니다.”

또 대답을 피했잖아? 라틸이 미간을 찡그리는 사이, 클라인은 라틸의 뒤로 가서 등과 어깨 사이 커다란 손으로 꾹꾹 눌러주었다. 라틸은 왜 대답을 안 하냐고 따지려다가, 클라인이 라틸의 양어깨를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덮고서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입술을 도로 다물었다.

16551132285872.png “클라인.”

라틸이 잠긴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클라인은 다른 쪽 목덜미에도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16551132352021.png “네.”

16551132285872.png “솔직히 말해.”

16551132352021.png “네, 이러려고 여기서 기다렸습니다.”

16551132285872.png “!”

질문하기도 전에 클라인이 기습적으로 말을 맺자 라틸은 입을 벌린 채 몇 번 뻐끔거리다가 도로 입술을 닫았다. 째려보듯 뒤를 보자 클라인이 환하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16551132352021.png “싫으십니까?”

16551132285872.png “……싫진 않아.”

16551132352021.png “그럼 화내실 이유가 없잖아요.”

16551132285872.png “누가 화냈다고.”

라틸이 발끈해서 묻자, 클라인이 라틸의 양 눈썹을 자신의 엄지로 덮어 주욱 당기고는 그사이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떼면서 웃었다.

16551132352021.png “지금 화내시는 거 같은데요.”

16551132285872.png “화내라고 몰아가는 건 아니고?”

대답 대신 클라인은 라틸의 턱을 조심스럽게 한 손으로 올리더니, 그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물기에 젖어서인지 평소보다 유난히 촉촉하고 말랑한 감각이 깃털처럼 다녀가자, 라틸은 심장이 어수선해져서 그의 쇄골에 이마를 가져다댔다. 다시 바람이 불었지만 클라인이 두 손으로 라틸을 감싸 자신의 몸에 붙였기에 전혀 춥지 않았다. 라틸은 눈을 감고서 그의 어깨에 계속 이마를 대고 있다가, 물속에서 클라인의 손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등을 매만지자 몸을 꿈틀했다.

16551132285872.png “클라인.”

라틸이 저절로 그의 이름을 속삭이자, 클라인이 라틸의 한쪽 귓가를 아프지 않게 물었다. 간지러워서 다시 소름이 돋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라틸은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가, 그의 팔이 생각보다 단단해서 손을 도로 뗐다가, 나쁘지 않은 감각이었다 생각하며 다시 팔에 손을 올렸다. 라틸은 그 탄탄하면서도 부드럽고 촉촉한 감각을 손안에서 느껴보다가, 갑작스레 짙은 갈증을 느끼고서 그를 슬쩍 밀었다. 클라인이 미는 대로 쭉 뒤로 밀려나자, 라틸은 돌아서면서 중얼거렸다.

16551132285872.png “목이 말라서. 뭘 좀 마시고 오겠다.”

뭘 마시고 오겠단 말을 사실 굳이 할 필요 없었으나, 혹시 클라인이 라틸의 의도를 오해라도 할까 봐 덧붙인 거였다. 클라인은 라틸이 자신과 있다가 도중에 그냥 가버리면 굉장히 서운해하니까. 라틸은 클라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제비처럼 온천에서 빠져나와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시녀에게 찬물이나 얼음 넣은 과일주스를 달라고 한 다음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클라인이 마실 걸 가지고 들어가도 괜찮겠고.

16551132285872.png “어?”

그런데 대기실에 가보니, 의자에 앉아 있는 게 시녀만이 아니었다.

16551132285872.png “서넛 경?”

내내 보이지 않던 서넛이 시녀로부터 거리를 둔 의자에 석상처럼 곧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서넛을 보자 클라인과 함께 있으면서 풀어졌던 마음이 다시 뾰족해져서 라틸은 인상을 구기고 험악한 목소리를 냈다.

16551132285872.png “내내 도망 다니더니. 이젠 더 도망 다닐 핑계가 없던 모양입니다?”

서넛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대답했다.

16551132444237.png “사블레 후작님의 심부름을 갔던 겁니다.”

그런 거라면 왜 시선을 피하냐고 따져 물으려다가, 라틸은 자신이 수영복 위에 얇은 겉옷, 그것도 물에 젖은 겉옷만 걸치고 있단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

16551132352021.png “폐하?”

라틸이 오지 않는 게 이상했던지, 클라인이 대기실 안으로 따라 들어오다 그 광경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서넛은 클라인까지 온천 안에 있는 걸 몰랐던지 눈썹을 위로 치켜떴다. 라틸은 서넛에게 굳이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은지라, 돌아서며 차갑게 말했다.

16551132285872.png “진짜 심부름 다닌 거라면 이젠 도망가면 안 됩니다. 내일 아침에 오자마자 바로 보고할 준비 해 둬요.”

라틸은 곧장 클라인 쪽으로 다가가 그의 팔을 잡고 온천 쪽으로 당겼다. 클라인은 주저 없이 라틸을 따라왔다. 그러나 라틸이 대기실 밖으로 나가기 전.

16551132444237.png “지금이 아니면 용기가 안 날 것 같습니다.”

클라인이 나타난 후 내내 조용하던 서넛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라틸은 이맛살을 찌푸리고서 돌아보았다. 서넛이 단호한 눈으로 라틸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16551132444237.png “물어볼 게 있다면 ‘지금’ 해주셨으면 합니다. 내일 물어보시면 다시 용기가 안 날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시큰둥하던 클라인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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