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누가 내 제자를 죽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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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화. 누가 내 제자를 죽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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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화. 누가 내 제자를 죽였을까
2022.05.25.
기르골의 속도는 사디를 업고서 장난치며 이동할 때와 전혀 달랐다.
가끔 방향을 꺾지 않아 나무나 바위에 부딪힐 때가 있었으나, 그는 가차 없이 앞으로 돌진했고 오히려 그의 앞길을 막은 나무가 부러지고 바위가 깨져나갔다.
기르골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대적자인 사디. 대적자이지만 수상한 구석이 있는 사디. 마지막까지 자신의 편이 되어 달라고 한 사디.
대적자이니 언젠가 자신이 죽여야 할 수도 있단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그 마지막은 절대로 이런 방식이 아니었다.
자신조차 죽일까 말까 죽일 수 있나 없나 몇십 번 몇백 번 생각하게 한 그 애가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죽었다고?
믿을 수 없다. 분명 오해가 있을 것이다. 분명!
지난번보다 훨씬 짧은 시간 안에 쇼드 폴리로 도착한 그는 그 공동 부근부터 가보기로 했다. 어쨌건 그곳에서 헤어졌으니.
그런데 빠르게 이동하던 그의 시선에 찰나 불쾌한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기르골은 녹색 나무로 된 커다란 게시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이쿠. 깜짝이야.”
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나 옆에 선 키 큰 남자를 보고 기겁해 옆으로 물러났으나, 기르골의 눈엔 그들이 들어오지조차 않았다.
기르골은 손을 뻗어 지명 수배서를 확 낚아챘다.
“저 사람…… 저거 아냐?”
“맞는 거 같은데. 저거. 저거.”
게시판에 붙은 수배서는 열여섯 개. 그중 가장 커다란 두 개에는 각각 남자와 여자 한 명씩이 그려져 있었다.
그중 하나가 기르골의 그림이었기에, 근처에 서 있던 사람들은 눈짓으로 기르골을 힐긋거렸다.
현상금 사냥꾼 몇몇이 탐욕스럽게 기르골을 보며 눈을 빛냈으나, 기르골은 자신이 뜯어낸 커다란 여자의 수배서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거기에 그려진 게 사디였기 때문이다.
기르골에 비해 특징이 적어서인지 좀 부실해 보이는 수배서이나, 죄명과 얼굴이 분명 사디였다.
가만히 있어도 붉은 기르골의 눈동자 주위로 빨갛게 실선이 가자 그의 모습이 햇볕 아래에서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한 번에 수배서를 구긴 기르골이 천천히 고개를 드는 순간. 그를 잡기 위해 무기를 꺼내던 사냥꾼들은 슬그머니 무기를 도로 집어넣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저 하얀 머리 남자가 이런 작은 마을에서 잡힐 수준이 아니란 걸.
곧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게시판이 통째로 날아갔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뒤늦게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괴물이야!”
“범죄자다!”
“수배범이야!”
“아악!”
제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겁을 주지 않기 위해 애써 좋은 사람인 척 굴려던 기르골의 인내심이 뚝 끊어지며 그의 눈동자가 흉흉하게 타올랐다.
“자……”
중얼거린 기르골은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툭 아래에 놓더니, 목 뒤를 손으로 짚고 주위를 훑어보며 웃었다.
“누가 내 제자를 죽였을까.”
강한 갈증이 밀려왔다. 수백 명을 먹어 치워도 해소되지 않을 갈증이.
* * *
카리센의 사절단이 돌아간 후. 라틸은 아트락시 공작을 불러서 라나문이 평소에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라나문은 편식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습니다, 폐하.”
신이 나서 외친 아트락시 공작은 라틸이 고개를 기웃하자, 주저하다가 털어놓았다.
“버섯을 좋아합니다, 폐하.”
라나문이 몇 가지 음식을 아주 싫어한단 걸, 황제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떠오른 탓이었다.
아트락시 공작이 말을 바꾼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일전의 사건으로 인해 라틸은 라나문이 완두콩을 안 먹는단 걸 알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버섯을 좋아한단 걸 알았으니 되었다. 라틸은 곧장 자신이 가장 아끼는 궁정 요리사를 불러, 버섯이 들어간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게 했다.
그러고서 음식을 챙겨 직접 라나문의 방으로 찾아갔다. 그가 이제 혼자 돌아다녀도 될 정도로 체력을 다 회복한 건 알지만, 역시 아직은 신경이 쓰여서였다.
라나문이 넘어진 건 두 사람이 함께 저지른 실수였으나, 라나문이 혼자 다친 건 그가 라틸의 쿠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전 같은 모습이 돌아올 때까지 라틸은 그에게 잘 대해주고 싶었다.
“라나문?”
마침 라틸이 방으로 갔을 때 라나문은 옷을 단정히 차려입고서 밖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어디 가느냐?”
그걸 본 라틸이 묻자, 라나문은 라틸의 뒤에 웨건을 끌고 온 하인과 웨건 위에 놓인 커다란 음식 접시를 보며 대답했다.
“대신관에게 가려 했습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절 치료해 줬다니까요.”
그의 시선이 접시에 닿은 걸 눈치챈 라틸은 라나문의 시종에게 음식을 챙기라 눈으로 지시했다.
카르둔은 감격해서 음식을 들어 올렸으나, 너무 뜨거워서 놓치고 말았다. 결국 손을 ‘호 호’ 분 그는 웨건째 음식을 들고 방 안으로 가 탁자에 놓고 나왔다.
라나문이 먹고 가겠다던가, 나중에 가겠다던가 하는 말을 그때까지도 하지 않자, 라틸은 잘 다녀오라 중얼거리고서 돌아섰다.
그런데 한참 회랑을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자신도 대신관에게 같이 가도 좋을 것 같았다.
가서 대신관을 칭찬도 하고, 라나문이 이제 완전히 괜찮아졌는지도 좀 듣고, 같이 식사하면서 목이 부러졌다 붙은 이후 자신에게 좀 냉랭한 듯한 라나문의 기분도 풀어주고 싶었다.
“폐하?”
라틸이 잘 걷다가 돌연 멈추어 서자 뒤에서 하인이 의아해 그녀를 불렀다.
“다시 가야겠다. 너는 먼저 돌아가거라.”
라틸은 하인에게 지시하고서 얼른 몸을 돌려 라나문의 방에서 대신관의 방으로 가는 길목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틸은 곧 라나문이 시종인 카르둔과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라틸은 웃으면서 그쪽으로 다가가려 했으나, 라나문이 인상을 찌푸린 채 계속해 입을 움직이자, 그들이 나누는 말이 궁금해졌다.
라틸은 기척을 죽이고서 살금살금 그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 라나문의 차갑고 시린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고막으로 기어들어 왔다.
“폐하와 같이 있으면 늘 나쁜 일만 생기는 것 같은데.”
“설마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그러네요. 여기 오신 후로 유난히 고초를 많이 겪으셨잖아요.”
“…….”
“이번에도 그렇잖아요. 세상에 누가 춤을 추다가 넘어져서 목이 꺾이겠어요. 전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 진짜 놀랐어요. 도련님이 춤을 못 추긴 하지만 얼마나 날렵하신데. 넘어져서 목이 꺾이다니요.”
그 말을 듣자 라나문과 함께 이동하려던 마음은 어느새 사그라들고 어깨도 시무룩 아래로 내려갔다.
라틸은 그들에게 바로 다가가지 못하고 괜히 주저했다. 라나문은 나랑 같이 있으면 늘 나쁜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는구나…….
같이 실수해 넘어져 놓고서 저렇게 말하는 게 좀 서운했지만, 동시에 아주 틀린 말도 아니긴 해서 라틸은 고개까지 떨구었다.
“그래도 폐하께선 도련님을 좋아하긴 하시나 봐요. 간호도 해주시고 음식도 보내주시고. 그렇죠?”
“요리사가 만들었고 폐하는 명령만 내렸을 그 음식 말인가.”
“뭐…… 그렇긴 하겠지만요…….”
거기까지 듣다가 라틸은 돌아서서 하렘을 빠져나갔다.
‘라나문이 목 부러진 일로 아직 화가 났나 봐.’
전혀 아니었으나, 쇼드 폴리에 가면서 타인의 속마음이 다시 잘 들리지 않게 되었기에 라틸에게 라나문의 떠들썩한 생각은 전해지지 못했다.
사실 라나문은 지금, 건성으로 카르둔의 말에 대답할 뿐 머릿속으론 라틸과 춤을 연습하던 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카르둔은 ‘날렵한 라나문이 왜 거기서 넘어졌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라나문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라틸이 그의 춤 솜씨가 고의인지 아닌지를 추궁하면서 얼굴을 들이미는 순간, 그의 몸에 힘이 풀린 탓이었다.
오만한 까만 눈동자가 장난기를 가득 담고 거짓으로 화를 꾸며내며 그를 마주하자, 라나문은 심장이 들썩였다.
사교계를 멀리하고 집에 틀어박혀서 저 잘난 맛에 취한 그에게, 이토록 가깝게 다가온 사람은 황제 하나뿐이었다.
그는 누군가와 이렇게 가까이 마주하는 일에 취약했다.
라나문은 반사적으로 머리를 뒤로 물리면서 다리에는 힘을 풀었다. 정말로 바보 같은 짓이었다. 정말로 멍청한 짓.
그래도 거기서 낙법을 썼으면 좋았을 텐데. 낙법조차 못 쓰고 뒤로 ‘쿵’ 넘어간 건 라틸이 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넘어지면서 황제를 옆으로 밀어냈더라면, 그도 황제도 둘 다 다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그는 넘어지면서 황제를 끌어안아 버렸다.
그러다가 강하게 머리를 부딪쳤고…… 깨어났을 때는 라틸이 흐느끼면서…….
“도련님?”
허공에 대고 이상하게 손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돌아와, 돌아와” 하고 외치면서. 마치 허공으로 흩어지는 라나문의 영혼 180개를 손으로 하나하나 건져내고 있는 사람처럼.
라나문은 그게 무슨 짓이었는지 너무 궁금했지만, 대신관이 “슬슬 깨어날 때가 됐는데요.”라고 말하며 방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묻지 못했다.
그는 계속 기절한 척 눈을 감고 있었고, 황제는 허우적대던 걸 멈추고서 심각하게 물었다. 라나문이 이 일로 머리에 문제가 생기진 않겠냐고.
“도련님, 왜 그러세요?”
“……아니다.”
회상을 끝낸 라나문은 “돌아와 돌아와” 하고 흐느끼던 라틸을 떠올리자 반사적으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힘주어 도로 내렸다.
* * *
라나문이 어떤 마음이든, 그게 라틸에게 전해지진 못했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으니까.
라나문이 목이 부러졌다 나은 후로 매일같이 찾아갔던 라틸은, 그날이 버섯 수프를 마지막으로 다시 라나문을 잘 찾아가지 않게 되었다.
이번에야말로 황제가 공신의 아들에게 푹 빠졌구나, 기대한 아트락시 공작 일파는 몹시 실망했지만 반대로 다른 이들을 지지하는 이들은 ‘폐하는 마음이 넓어 라나문이 걱정되었을 뿐, 역시 다른 사람을 더 아낀다’고 수군거렸다.
라틸은 이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었지만 맞다 틀리다 설명을 얹는 대신, 카리센에서 과연 어떤 답을 보내올지 기다리며 일을 해나갔다.
꿈속에서 도미스가 크게 다쳤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요즘은 그 꿈도 이어서 꾸지 않았기에 업무에 몰두하기는 쉬웠다.
그러나 먼저 도착한 소식은 카리센에서 온 소식이 아니라 쇼드 폴리에서 온 소식이었다.
“어째서인지 쇼드 폴리에선 사디 경을 지명수배범으로 올려놨더군요.”
사디가 라틸 본인인 걸 모르는 시종장은 어느 날 아침, 라틸에게 어제저녁에 올라온 보고라며 그곳에서 입수한 지명 수배서를 내밀었다.
사디가 라틸이란 건 모르지만 임무 도중 죽었다고 둘러댔으니, 혹시 이 일과 관련이 있진 않나 여기는 눈치였다.
게다가 그 날짜가 마침 라틸이 며칠 자리를 비우겠다던 그 날짜였으니.
“그쪽도 참. 전엔 폐하가 도와주겠단 걸 거절하더니, 이번엔 폐하의 특사까지 이런 지명수배서에 올리고.”
“그러게요. 정말 틀라랑 손이라도 잡았었나?”
라틸은 적당히 시종장의 말에 맞장구를 치다가, 시종장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왜요?”
시종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제가 폐하께 그 얘기를 했던가요?”
라틸은 아차 싶었다. 시종장은 그 얘기를 속으로만 했다. 하지만 당시 라틸은 남의 생각을 듣는 능력이 한창 발달해 있던 터라, 시종장의 그 작은 의심조차 들을 수 있었다.
“아니, 내 생각입니다.”
하지만 라틸이 흔들림 없이 방긋 웃어버리자, 시종장은 고개를 기웃하면서도 수긍했다.
“폐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라틸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사디 얼굴은 너무 특색이 없어서. 이렇게 보니까 사디인지 아닌지도 헷갈리네요. 근데 사블레 후작, 이걸 보고하려던 건가요?”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시종장은 아니라며 서류 사이에서 다른 보고서를 꺼내 제일 위에 올려두었다.
“그 지명수배서에 올라온 얼굴은 사디 경이 맞을 겁니다, 폐하. 쇼드 폴리에 미치광이가 나타나 ‘사디’를 내놓으라 횡포를 부리고 있다니까요.”
“미치광이라니요?”
시종장이 또다른 지명 수배서를 라틸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곳엔 기르골이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