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그건 선물
(243/367)
243화. 그건 선물
(243/367)
243화. 그건 선물
2022.06.26.
창문을 다 연 다음 느릿하게 목욕을 하고 나오니, 다행히 향수 냄새가 다 빠져 있었다.
“머리를 말려드릴까요, 폐하?”
“아니. 괜찮다.”
시녀들은 한밤중에 뭘 했길래 향수를 한 통이나 다 쓴 건지 궁금한 눈치였지만, 묻진 못하고 빈 통만 챙겨 나갔다.
그녀들이 나가자 라틸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대충 수건으로 돌돌 말아 옆으로 늘어뜨린 다음, 침대에 걸터앉아 기르골에 대해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기르골이 날 공격하지 않을까.’
기르골은 얼결에 이쪽을 ‘아리탈’이라고 불렀다. 사디도 도미스도 아니라 아리탈. 칼라인은 아리탈이 로드 중 하나의 이름이라고 했지.
그 이름을 말할 때 울었다는 건…… 슬픈 마음이 있는 상대란 건데. 어떤 마음일까.
‘설마 죽여서 미안해, 뭐 이런 건 아니겠지.’
소름이 돋은 손목을 삭삭 다른 손바닥으로 비비면서, 라틸은 수천 년을 살아온 뱀파이어의 심리를 이해하려 끙끙 애써 보았다.
하지만 부활을 거듭하는 로드라 한들, 자신의 기억은 늘 죽을 때마다 끊기니 잘되지 않았다.
‘진짜 친했는데 죽여야 해서 미안하단 건가? 아니면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죽였나? 하긴.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 좀 친하게 군 로드가 나 하나만은 아니었겠지.’
어쨌든 그런 감정도 있어 보이고, 생각보다 기르골이 로드에게 적대적이지도 않은 것 같으니, 잘 이용하면 대적자 편이 못 되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머리카락이 다 말랐다. 수건이 머리카락보다 더 축축해지자, 라틸은 수건을 옆에 놓고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럴 때 도미스의 기억을 알면 좀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데. 왜 로드들은 환생할 때마다 기억을 잃는 걸까.
‘그러고 보니 요즘은 도미스 꿈도 안 꾸네. 왜 그러지? 설마. 진짜 거기 난간에서 떨어져서 죽었나? ……아닐 거야. 도미스가 죽은 위친 다른 데잖아. 칼라인 꿈속에서 분명……?’
어라. 라틸은 멍하게 수건을 만지작거리다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생각해보니 그건 칼라인 꿈이잖아?’
라틸은 불현듯 떠오른 사실에 수건을 움켜쥐고서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꿈은 현실과 똑같지 않았다.
꿈속에서는 끔찍하게 사이 나쁜 사람이 친하게 나오기도 하고, 자신이 하지도 않은 실수를 한 것처럼 나오기도 한다.
‘그러면 칼라인의 그 꿈도 현실과 다를 수도 있지 않나?’
“젠장.”
라틸이 벌떡 일어나 나가자, 근위병이 교대하다 말고서 황급히 따라붙었다.
“폐하? 어디 가십니까?”
“칼라인에게 간다!”
라틸은 회랑을 바쁘게 걸어가 하렘 입구 부근까지 빠르게 도착했다. 그런데 하렘에 들어가기 전, 쭉 이어지는 회랑에 누군가 난간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타시르?’
타시르가 무릎 위에 노트를 두고서, 하늘을 보다가 자기 노트를 번갈아 보면서 뭔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그러다 라틸이 다가가자, 타시르는 기척을 느끼고는 돌아보면서 웃었다.
“이런. 폐하.”
그가 슬그머니 자연스럽게 노트를 뒤로 감추자, 라틸은 별생각 없이 왔다가 눈썹을 치켜떴다. 뭐길래 감추지?
하지만 타시르는 방긋 웃는 얼굴로 라틸을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라틸이 고개를 기웃하자, 각도를 맞춰서 같이 옆으로 고개를 기웃했다.
“장난치기는.”
그걸 본 라틸이 웃음을 터트리자, 타시르는 라틸이 걸어가려던 방향에 있는 건물을 힐긋 보고서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이 방향 끝에 하렘이 있는 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누구를 찾아가냐고 묻는 것 같았다.
“응.”
라틸은 칼라인에게 간다고 대답하려다가,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폐하?”
“아아. 너는? 추운데 왜 나와 있어.”
생각을 바꾼 라틸이 얼버무리자, 타시르는 “그야 저는…….” 하고 대답하려다가, 라틸처럼 뒷말을 바꾸었다.
“바람 쐬러 나왔지요.”
“그래. 빨리 들어가라.”
새롭게 떠오른 아이디어로 한시가 급해진 라틸은 타시르의 팔을 몇 번 두드리고서 다시 왔던 길을 빠르게 돌아갔다.
타시르가 말을 이상하게 얼버무렸지만, 황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황제가 행렬을 데리고 가버리자 타시르는 도로 난간에 앉았다.
거기서 그는 우두커니, 멀어지는 행렬을 구경했다. 어두운 밤이지만 황제를 뒤따르는 이들이 든 조명 덕에 저쪽은 환히 밝았다.
그 조명에서 나온 빛이 황제가 걸친 망토의 보석에 부딪힐 때마다 자잘하게 빛이 났고, 그 모습은 황제 일행이 은하수를 건너가는 것처럼 착시 효과를 일으켰다.
타시르는 감추었던 노트를 다시 앞으로 돌려 무릎에 내려놓았다. 그 위에는 라틸의 얼굴이 스케치 되어 있었다.
“관심도 없으시네.”
그걸 빤히 보던 타시르는 중얼거리고서 노트를 덮고 일어났다. 시종인 히얼란은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혀를 차면서 곁으로 다가왔다.
“폐하의 동선을 계산해서 나오시면 뭐 하나요. 마주쳐도 별 반응이 없으신데. 당황스럽네요.”
한숨을 내쉰 히얼란은 타시르가 노트와 펜을 챙기는 걸 보다가, 적당히 가져온 비품을 다 챙긴 것 같자 난간을 넘어 회랑으로 들어간 다음 걸어가며 퉅툴거렸다.
“소단주님도 어디서 지느러미나 꼬리 같은 거 같다가 붙여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폐하가 평범한 취향은 아닌 것 같은…….”
그런데 구시렁거리다 보니 옆에 있어야 할 타시르가 보이지 않았다.
“소단주님?”
놀라서 고개를 돌린 그는, 아까 그 자리에 큰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서 있는 타시르를 발견했다.
타시르는 마치 새로운 수학 공식을 발견한 표정이었으나, 그걸 본 히얼란은 등골이 오싹해지고 불안해졌다.
“도련님? 표정이 왜 그러세요? 또 이상한 계획 떠올리신 거 아니죠?”
“그래. 그거야.”
“떠올리셨구나. 아…….”
“꼬리.”
이를 어째. 툭 치면 벗겨지는 옷을 포기하셨나 싶더니. 히얼란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쪼그려 앉았다.
* * *
윌랑 왕자는 손에 든 초상화 펜던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상화 속에는 이변이 없었다면 그와 결혼했어야 할 약혼녀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변은 일어났다. 그가 지지한 왕자가 후계자 다툼에서 밀리게 되자, 왕세자가 반대파의 높은 가문 미혼 자식들을 전부 다 신분이 낮고 야심 없고 조금 멍청한 이들과 결혼시켜 버린 것이다.
그의 약혼녀도 이 조치를 피해 가지 못했다.
“아일리…….”
왕자가 펜던트를 두 손으로 감싸고 이마를 대자, 부하는 그 모습을 안타깝게 보다가 위로했다.
“이미 결혼한 분이니 잊어야 합니다, 왕자님.”
그래도 왕자가 대답을 하지 않고 눈만 질끈 감고 있자, 부하는 초조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라트라실 폐하께 너무 적대적으로 대하지 마시지요.”
그 말에 왕자가 눈을 뜨고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그래도 부하는 하던 말을 마저 마무리 지었다.
“라트라실 황제와 척을 져서 좋은 건 하나도 없습니다, 왕자님. 그분……을 위해서도요.”
“그래서. 그 황제 비위를 살랑살랑 맞추다가 후궁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보라? 형님들이 원하는 것처럼?”
“그런 뜻이 아닙니다.”
왕자는 펜던트 속 그녀가 추울새라, 천으로 싸서 주머니에 넣었다.
“왕자님은 왜 그렇게 라트라실 황제를 싫어하십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 여자를 좋아해야 하진 않아.”
“좋아할 이유는 없지만, 싫어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있으니까요. 강대국의 황제 아닙니까. 우리나라와 사이도 괜찮고요. 감정을 감추고 좋게좋게 대하는 것도 외교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난 결혼을 통해 황권을 안정시키고. 귀족들의 힘을 조정하고. 그런 게 딱 질색이다.”
“…….”
“난 그 황제가 싫다. 내가 누구를 싫어하든 내 마음이고.”
부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 감정을 가지는 거야 자유인데, 그걸 드러내지 마시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바깥쪽이 조금 소란스럽더니, 왕자의 다른 시종이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들어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슨 호들갑이냐.”
이를 본 왕자가 차갑게 묻자, 시종이 환한 얼굴로 외쳤다.
“왕자님, 왕자님. 지금 이쪽으로 폐하께서 오고 계십니다.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요!”
“뭐?”
왕자는 당황했으나, 부하는 반색했다.
“폐하께서 왕자님께 꽃다발을 주시려나 봅니다!”
“그 여자가 나한테 왜?”
“당연히 왕자님이 마음에 드시니까 그런 거겠죠!”
부하는 왕자를 일으켜 세웠고 시종은 얼른 그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주었다. 왕자는 아직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폐하께서 어디까지 오셨는지 살피고 오겠습니다.”
그 틈에 시종이 쌩하니 뛰쳐나가자, 왕자는 얼떨떨해 있다가 가까스로 제정신을 찾고 기가 막혀 탄식했다.
“정말 타고난 바람둥이 황제로군.”
“좋은 게 좋은 거지요. 꽃을 주시면 그냥 받고 고맙다고 하세요.”
부하가 달래주어도 왕자는 여전히 표정을 펴지 못했다.
그런데 신이 나서 나갔던 시종이 아까와 달리 굳은 얼굴로 돌아와서는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쩔쩔맸다.
그 기색을 눈치챈 부하가 “왜 그래?” 하고 묻자, 시종은 왕자의 눈치를 살피며 웅얼거렸다.
“그게…….”
“말하라.”
“폐하께서…… 그게…….”
시종이 얼버무리자 왕자는 답답해서 그냥 자기가 나가 보기로 하고 휙 걸어갔다.
시종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그 뒤를 따라갔지만 가지 말라고 말리고 싶어하는 얼굴이었다. 아까와 달리.
부하는 뭔 일인가 싶어 역시 뒤를 따랐다.
그러나 길에 황제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황제의 행렬 끄트머리가 저쪽을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 방향도 윌랑 사절단이 사용하는 숙소가 맞긴 했기에, 왕자는 황제가 왜 저쪽으로 간 건지 의아해졌다.
“조용히 하라.”
두 부하에게 신호를 보낸 왕자는 자신도 발소리를 죽이고서 황제가 있는 쪽으로 조심조심 가보았다.
어두운 길로만 가서인가. 황제의 행렬에서 나오는 빛 때문에 황제 부근에만 빛이 어린 것처럼 보였다.
그 빛의 중앙 지점에서 황제는, 왕자가 도중에 만나 우정을 나눈 친구 기르골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황제는 기르골의 앞에서 한 손을 뒤로 돌려 자신이 든 꽃다발을 감추고 있었으나, 꽃다발이 우악스럽게 큰 탓에 별로 효과는 없어 보였다.
그래도 황제는 꿋꿋하게 꽃다발을 감추고서, 왕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를 본 적이 있다.”
기르골은 황제의 말에 눈을 커다랗게 떴고, 왕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전에 본 적이 있다고? 아는 사인가?
그 순간. 라틸이 뒤에 감추고 있던 꽃다발을 기르골에게 내밀었다. 기르골이 멍하니 꽃다발을 안아 들었다가 시선을 맞추자, 황제가 이번에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건 선물.”
“!”
라틸이 타시르를 보고 떠올린 게 이것이었다. 기르골에게 자신이 사디란 걸 보여주는 방법. 일부러 둘의 첫 만남을 재현해 보인 것이다.
기르골도 ‘네가 사디란 걸 증명해 봐’라고 말하긴 했지만 뭘 기대한 건 아니었던지, 생각지도 못한 접근에 놀라서 꽃다발을 안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왕자의 뒤에서 시종이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저런 되먹지 못한 자식이 감히 폐하께 꼬리를 치다니!”
부하는 ‘반대 상황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심정적으로 찬성이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황제가 자신의 생명과 평화를 걸고 가장 위험한 야수를 달래고 있단 걸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