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목숨이 위태로웠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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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화. 목숨이 위태로웠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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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화. 목숨이 위태로웠던 순간
2022.06.29.
누군가 멀지 않은 곳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단 건 라틸도 알았다. 정확한 말소리는 구분하기 어렵지만 소곤거림은 들려왔다.
하지만 뒤에서 누가 뭘 하든, 지금 라틸은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기르골의 반응만이 가장 중요했다. 그의 동공이 부풀어 오르는지 아닌지가 제일 중요했다.
마침내 기르골이 천천히 손을 뻗는가 싶더니 꽃봉오리 하나를 똑 뜯어서 입에 가져갔다. 불그스름한 입술 사이로 새하얀 꽃잎이 들어가자, 꽃의 마지막 향기가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느낌이 났다.
꽃을 받아 먹었다는 건…… 마음이 좀 풀렸단 건가? 내가 사디란 걸 인정하는 거겠지?
“맛있어?”
희망을 품고 질문하자 기르골이 맛을 평가하는 대신 눈이 가늘어지도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왜 아가씨가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나 모르겠어.”
‘아가씨?’
‘폐하한테 아가씨라고?’
‘저자가 미쳤나?’
지켜보던 이들이 ‘아가씨’라는 소리에 눈을 왕방울만 하게 떴으나, 기르골도 라틸도 자신들 외 사람들에게는 신경 쓰지 않았다.
라틸은 기르골이 한 질문을 하나하나 소처럼 되새김질한 다음, 말 한마디 한마디를 분석하고 숨은 뜻을 찾으려 애쓰다가 적절한 답을 찾고서 대답했다.
“난 하던 대로 하는 건데. 이게 갑자기 이상하게 여겨진다면, 내 문제가 아니라 그대 문제가 아닐까?”
기르골이 꽃 하나를 완전히 씹어 삼키고서 짧게 웃었다.
“제자님은 말을 너무 잘하네.”
‘아가씨’가 ‘제자님’으로 바뀌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애정이 담긴 말인진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쪽이 사디란 건 인정한단 뜻이겠지.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 라틸은 하나 더 준비해 왔던, 결정적인 한 방을 바로 날려버렸다.
“전엔 약속 못 지켰잖아. 이번엔 지켜줘.”
“전에 약속?”
기르골이 의아해서 라틸을 쳐다보았다. 라틸은 조금 더 임팩트를 주고 싶어서, 기르골이 안은 꽃 중에서 유일한 붉은 꽃봉오리를 똑 떼며 일부러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한테 뺏기지 않을 유일한 하나. 되어 주기로 했으면서. 못 지켰잖아. 이번엔 지키라고.”
기르골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면서 그의 눈꺼풀이 차츰차츰 위로 올라갔다. 뭔가 더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해야 할 것 같아서, 라틸은 어쩔 수 없이 꽃봉오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느리게 가져가 그가 하듯 똑같이 씹으면서 바라보자, 기르골의 눈이 더욱 커다래졌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진 채 기르골이 물었다.
“전생 기억이…… 있어?”
그 목소리는 아까 라틸이 낸 소리보다 더욱 작아서, 주위에 몰래 숨어 있는 이들은 아무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몹시 불안정한 목소리였다. 기르골이 큰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렇다는 건 다른 로드들은 나처럼 전생을 기억하진 못했던 걸까? 로드마다 능력이 다 다른가?’
“일부만.”
기르골을 따라 해 보았지만 방금 딴 꽃봉오리에서는 전혀 맛이 느껴지지 않았고, 괜히 찝찝한 기분만 났다. 차를 우려 마시거나 요리에 넣지도 않고 어떻게 이렇게 먹는 걸까.
그래도 표정을 철저하게 관리하며, 라틸은 목구멍에 넘길 수 있을 만큼만 꽃을 씹어 목 뒤로 꿀꺽 삼켰다. 그러고서 보니, 기르골의 눈동자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의 젠가 멘탈이 빠지려는 게 분명했다.
이대로 있으면 그가 또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라틸은 더 말을 섞은 대신 돌아서버렸다.
* * *
기르골과 묘한 대화를 나눈 황제가 유난히 빠른 속도로 멀어지자, 윌랑 왕자 패거리는 어두운 길에서 빠져나와 기르골에게 다가갔다.
윌랑 왕자는 기르골이 혹시 자신의 친구가 되어 준 게 여기 오기 위해서인가 싶어 표정이 굳은 채였고, 뒤의 호위와 시종 역시 표정이 험악했다.
기르골은 아직 동공이 완전히 제자리를 찾지 않은 채였으나, 이성이 퐁 나간 건 아닌지 다가오는 왕자 일행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왕자는 기르골이 품에 안은 우악스럽게 커다란 꽃다발을 한 번, 기르골의 표정을 한 번, 황제가 가버린 길을 한 번 힐긋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하지만 한발 앞서 내내 씩씩거리던 왕자의 호위가 먼저 기르골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이 여우같은 것! 머리카락을 죄다 뽑아주마!”
그리고 이 모습은 기르골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슬쩍 돌아온 라틸이 똑똑히 목격했다.
“!”
기르골이 머리채를 잡혔어! 라틸은 비명이 터질 뻔한 입을 막고서 얼른 뒤돌아 그 자리에서 피신했다.
‘젠가가 무너질 거야!’
하지만 기르골은 의외로 침착했다. 게다가 머리채를 잡든 뭘 하든, 기르골에게 인간들은 너무나 약한 존재여서 이런 일로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다.
개미에게 물렸다고 해서 모욕감에 치를 떠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기르골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힘껏 기르골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던 호위가, 단 한 가닥도 뽑히지 않는 머리카락과, 기르골의 서늘한 시선에 당황해 제 스스로 손을 놓고 웅얼거렸다.
“모근이 튼튼하군.”
윌랑 왕자는 한심하단 시선으로 호위를 흘겨보다가, 호위가 뒤로 얌전히 물러나자 기르골에게 차갑게 물었다.
“황제를 노리고 날 따라온 거였나.”
왕자는 황제에게 눈곱만큼도 좋은 감정이 없었고 후궁이 될 마음도 없었으나, 기르골이 자신을 이용했느냐 마느냐는 이와 별개의 일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그의 마음을 완전히 홀리고, 울적해진 그를 위로해 준 기르골이 처음부터 그를 이용하려 접근한 거라면 몹시 화가 날 것 같았다.
기르골은 대답 대신 라틸이 주고 간 꽃을 뜯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다가, 왕자 쪽을 보며 활짝 웃었다. 마치 천상의 사탕을 먹은 것처럼.
그 표정을 본 왕자와 호위, 시종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깨달았다. 이거…… 미쳤구나.
* * *
‘그 윌랑 사람. 살아 있으려나 몰라.’
어쨌든 기르골도 ‘공식적’으로는 윌랑 사절단이 데려온 사람이니까. 문제가 생겨도 내부에서 처리하겠지. 예를 들어, 기르골이 자기 머리채를 뜯으려 든 사람의 목을 뜯으려 한다하더라도.
다행히 방으로 돌아와 잠옷을 입고 머리카락을 느리게 빗고 피로 회복에 좋다는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실 때까지도 그런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떻게 넘어갔는진 모르겠지만 기르골이 자기 머리카락을 뽑으려 든 사람을 후하게 봐준 게 분명했다.
안심한 라틸은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칼라인에게 도미스의 최후를 묻는 것도 가능한 일이지만, 생각해보니 그건 늦은 밤에 달려가서 캐물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도미스는 죽었으니까. 지금 중요한 건…….
‘기르골과 로드들 사이를 알아내야 해. 과거를 알면 기르골이 왜 내내 승리만 했는데도 멘탈이 젠가가 됐는지 알 수 있을 거야. ……날 때부터 저랬다면 뭐. 어쩔 수 없지만.’
라틸은 배 위에 손을 얌전히 올리고 눈을 꽉 감은 다음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도미스 나와라. 도미스 나와라. 도미스 나와라. 도미스 죽었으면 다른 로드라도 나와라. 아리탈 나와라…….’
* * *
그 시각. 칼라인은 창문 뒤에 달린 베란다에 의자를 가져다 두고 앉아,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밤하늘은 달라진 게 없다. 칼라인은 꼭 이런 날씨에 보았던 도미스를 생각했다.
그때도 칼라인은 하늘을 보면서, 나이트가 대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로드인 안야를 찾았는데 왜 이렇게 무료하기만 한지. 자신이 대체 뭘 해야 하는 건지. 꼭 로드가 각성하고 뭔가를 해야 하는 건지. 이 모든 것들이 그 시기에는 한창 허무했다.
그러다가 칼라인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칼라인!
절박한 목소리였으나 그건 실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칼라인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본능적으로 한 방향을 향해 뛰었다. 뚜렷한 이유가 없으나 그쪽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시체?’
그곳은 저택 후원에 난 쓰레기 처리장으로, 일할 때 외엔 사람들이 거의 드나들지 않을 법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한 무리의 하녀와 하인들이 축 늘어진 사람을 옮기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몰래몰래 일을 해치우는 모양새. 수상한 짓거리를 하는 것 같았다. 칼라인은 발소리를 숨기지 않고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나리!”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린 이들은 칼라인을 발견하자 들고 있던 걸 놓고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칼라인은 성큼성큼 걸어가 그들이 뭘 옮기려 했는지 내려다보았다.
‘도미스!’
뜻밖에도 그들이 옮기던 건 도미스였다. 완전히 기절한 듯한 도미스. 창백한 피부와 힘없이 늘어진 몸, 반쯤 열린 채 다물지 못한 입술과 이마에 묻은 핏자국을 보자 칼라인은 감전된 듯 분노에 차 입을 열었다.
“무슨 짓이지?”
왜 화가 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상황이 그의 모든 신경을 분노로 하나하나 바꿔놓고 있었다.
하인과 하녀들은 대답 대신 달아나버렸다. 변명조차도 통하지 않을 거라 여긴 듯, 그들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뛰어갔다.
얼굴을 가린 채 뛰는 걸 보니 사람이 너무 많아서 칼라인이 자기들을 찾아내진 못할 거라 여기는 눈치들이었다.
칼라인은 그들을 쫓아가는 대신 허리를 굽혀 도미스의 목덜미에 손을 대보았다. 미약하지만 박동이 느껴졌다. 동맥 너머로 심장이 뛰고 있었다.
칼라인은 한숨을 내쉬고서 도미스를 안아 들고 돌아섰다. 하지만 몇 걸음도 걷지 않아, 그는 마음을 바꾸었다. 산 사람을 시체처럼 옮기던 이들이 저 안에 있었다. 도로 제자리에 돌려 두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배척받는 건가.’
칼라인은 난데없이 발견한 도미스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우선 백작의 성에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커다란 나무 아래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다음으로는 성안으로 들어가, 전에 동생 안야가 도미스를 공격할 때 유일하게 도미스를 편들어주던 다른 안야를 찾아갔다.
“그쪽이 여긴 무슨 일이세요?”
하녀 안야는 칼라인을 보자 경계부터 했지만, 칼라인이 “도미스가 다쳤는데.”하는 말만 던지고서 돌아서 걸어가자 무섭지도 않은지 뒤를 바로 따라왔다.
“도미스가 다치다니요? 무슨 일인데요?”
“여기 하녀와 하인들이 옮기고 있었다. 기절한 도미스를.”
“뭐라고요?! 왜요?”
“좋은 의도 같진 않던데.”
칼라인은 도미스를 숨겨둔 곳으로 갔고, 하녀 안야는 도미스를 보자 울면서 끌어안았다. 하녀 안야가 도미스를 끌어안고서 복수할 거라고 중얼거리자, 칼라인은 현실적으로 조언해 주었다.
“복수는 잊고 여기서 나가라.”
“뭐라고요?”
하녀 안야가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 그를 쏘아보았다. 칼라인이 그들을 편든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괜히 복수하려 들다가 랑스터 백작에게 걸리면 둘 다 더 위험해진다.”
안야는 자기 의견을 계속 주장하지 않았다.
칼라인은 그 이상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지만, 안야는 영리하게도 칼라인이 해코지를 하려 부른 게 아니란 걸 바로 깨닫고는, 도미스의 상체를 일으키며 의심스럽게 물었다.
“그쪽은 도미스를 싫어하지 않아요? 왜 이 애를 구해준 거죠?”
“싫어한 적은 없다.”
단호하게 말한 칼라인은 안야에게 영지로는 안 돌아가는 게 나을 거라 말하고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걸어가다가 자신이 한 말을 뒤늦게 떠올리고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이마를 찌푸렸다.
그래. 싫어한 적은 없다. 아마도. 싫어하고 뭐고 할 것도 없는 게, 죽든 살든 그와 아무 관련도 없고 세상에 아무 지장도 주지 않는 보잘것없는 사람일 뿐이지 않던가.
그런데…….
‘왜 그 여자를 보면 계속 답답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