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짐은 그래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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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화. 짐은 그래도 돼
2022.09.07.
“하이신스!”
라틸은 당황해서 그에게 다가갔다. 몸을 굽히고 살펴보니 하이신스의 팔 안쪽으로 상처가 나 있었다.
“이게, 언제? 언제 이런 거야?”
들어오고 나서 하이신스가 다치는 걸 못 본 라틸이 묻자 하이신스가 힘겹게 웃었다.
“처음에 좀비들을 한 방에 몰아넣을 때.”
복도에 피 묻은 흔적은 있는데 아무도 없더라니. 하이신스가 피해가 커지는 걸 막기 위해 자신의 병사들과 함께 좀비들을 한 곳에 몰아넣은 모양이었다.
뒤에서 아이니가 “나 때문이에요.”라고 멍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라틸이 쳐다보자 그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하이신스를 보다가 중얼거렸다.
“나를 감싸다가…….”
라틸은 울컥 뭔가 치솟았으나 아이니 때문이 아니란 건 알기에 고개를 숙여 하이신스를 보았다. 하이신스가 아이니를 구하려다 다친거라 한들 그걸 아이니 탓이라 할 수 없으니까.
라틸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입술을 깨물고서 하이신스의 팔을 붙잡았다. 그의 팔을 중심으로 새파랗게 핏줄이 위로 번져 올라가고 있었다. 하이신스는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뱉으며 몸을 비틀었다.
“사람들을 들여보내라.”
다가 공작이 문을 열고 지시하는 동안에도 라틸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라틸은 반쯤 정신이 멍해져서 하이신스의 팔을 쳐다보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눈앞이 어질거렸다. 자신이 여기 앉아 있는 것도 같고, 다른 곳에 있는 것도 같았다. 자신의 몸이 몸 같지 않았고 앞에 누운 하이신스가 어렴풋한 꿈속의 대상처럼 여겨졌다.
하이신스를 몹시 미워한 적도 있었지만 그가 좀비가 될 거란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최근 들어서 이제 그를 미워하지 않게 됐다고, 좋은 추억만 남기고 아픈 건 버린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됐는데. 이제 웃으면서 그와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됐는데.
지금 이렇게 떠난다고? 게다가 이성 없는 괴물이 되어서?
심장이 울렁거리면서 주위 소리가 고동과 섞여 들리기 시작하는 그때. 뭔가 확 치솟아오려는 순간. 클라인이 “이거요!” 하고 라틸의 손에 뭔가를 댔다.
라틸은 정신이 번쩍 들어 클라인을 보았다. 클라인이 라틸의 손에 쥐여준 건 대신관의 부적이었다.
“이거요!”
클라인도 정신이 없는지 제대로 설명을 못 하고 ‘이거요 이거요’만 반복했다.
“아!”
라틸은 여기로 올라오는 길에 자신이 클라인에게 대신관의 부적으로 좀비화를 일시적으로 막았단 이야기를 해주었던 걸 떠올렸다. 클라인에게도 대신관의 부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이 부적 때문에 한 번 난리가 났었지.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 부적을 하이신스의 목에 걸어주었다.
하이신스는 힘겹게 숨을 쉬면서 라틸을 빤히 보고 있다가 바로 눈을 감았다.
가늘게 떨리던 몸 역시 완전히 멈춰서 겉으로 보기에는 죽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나 목에 손을 대어 보자 미약하지만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부적은 이번에도 효과가 있었다.
라틸은 그에게 머리를 파묻고 울 뻔한 걸 가까스로 참고 클라인을 보며 칭찬했다.
“잘했다.”
정신이 들고서 보니 어느새 다가 공작이 데려온 사람들과 다른 병사들이 한가득 방 안에 차 있었다. 그들은 기겁한 얼굴로 혹시라도 좀비가 깨어나는 건 아닐까 조심조심 시체를 모으고 있었다.
라틸은 아이니를 보았다. 그녀는 죄책감 때문인지 멍하게 서 있더니,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바로 자리를 피해버렸다.
라틸은 이번에는 다가 공작을 보았다. 아이니와 달리 그는 라틸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듯 노려보고 있었다. 쓰러진 사위를 향한 걱정은 전혀 보이지 않아서, 라틸은 기가 막혔다.
‘저 사람은 왜 저러나.’
그러다 라틸은 현장에 있었던 기사들이 자신을 곁눈질하는 걸 발견했다. 그들은 신기하고 대단한 무언가를 본 듯 굴었다.
그나마 카리센 병사들은 하이신스가 쓰러져서 그런 내색이 덜했으나 라틸이 데려온 타리움 근위병들은 몹시 뿌듯해 보였다. 그들은 라틸이 자신들을 구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라틸은 다가 공작이 왜 자신을 저렇게 노려보는지 알아차렸다.
‘아이니가 나한테 검을 주라고 했을 때도 안 주려 했지. 그냥 저 사람은 내가 돋보이는 자체가 싫은가보다.’
그 상황, 그 급박한 상황에서 누가 돋보이는지 여부를 생각할 수 있단 건 어떤 의미로는 정말 대단한 거 아닐까. 라틸은 혀를 내두르다가 하이신스를 내려다보았다.
저런 인간을 상대로 몇 년을 버텼을 하이신스를 생각하니 그가 왜 다가 공작에게 치를 떠는지 새삼 약간이나마 이해가 갔다.
‘너도 외로웠겠다.’
라틸은 기절하듯 잠든 하이신스를 보며 생각하다가 아이니의 남편인 하이신스를 자신이 붙잡고 있는 건 좋은 모습이 아닐 거란 생각에 이성을 찾고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바로 살폈지만 사실은 이건 아이니 황후가 해야 할 일이니까.
클라인은 라틸과 하이신스의 과거를 알기 때문인지 주먹을 꽉 쥔 채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런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꽉 차 있어서, 라틸은 클라인의 팔을 몇 번 가볍게 쓸고 위로했다.
“같은 증세를 보이는 관리들이 우리 쪽에도 몇 명 있으니까. 치료할 방법을 찾으면 바로 알려줄게. 염려 마라, 클라인.”
“폐하…….”
“완전히 변한 게 아니니 괜찮아. 하이신스는 그래도 계속 이성이라도 있었지. 우리 측 사절들은 저거보다 더 많이 변한 상태였는걸. 괜찮아. 괜찮아질 거다.”
라틸은 연달아 클라인의 팔을 쥐었다 놓길 반복했다. 그러고서 라틸은 자다가 막 불려온 듯 옷을 엉성하게 입은 재상과 다가 공작에게도 말했다.
“치료법을 찾으면 바로 알려 주겠으니 염려 말게.”
“예, 폐하.”
“감사합니다, 폐하.”
재상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다가 공작도 불퉁한 얼굴이긴 하지만 일단 인사는 했다.
라틸은 다시 고개를 내려 하이신스를 보다가 “아.” 하고 도로 고개를 들었다.
“치료법을 찾기 전에 대신관도 보내주겠네. 도움이 될 거야.”
라틸의 말에 재상은 바로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다가 공작이 그를 몸으로 툭 치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반대했다.
“죄송합니다, 타리움의 황제 폐하. 그건 안 됩니다.”
라틸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황당해 되물었다.
“뭐라?”
재상 역시도 ‘자네 왜 이래?’ 하는 얼굴로 다가 공작을 보았다. 다가 공작은 턱을 빳빳하게 들면서 라틸을 의심쩍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대신관은 타리움 황제 폐하의 후궁 아닙니까. 무슨 목적으로 오는지, 와서 뭘 할지 우리가 어떻게 알고 중차대한 일을 맡긴단 말입니까.”
재상은 얼떨떨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대신관인데…….”
“대신관을 모시는 성기사단장 백화가 감히 황후 폐하의 이름을 가지고 절대로 대적자로 인정할 수 없네 마네 했던 게 며칠이 지났다고요.”
라틸의 눈이 가늘어지자 재상은 쩔쩔맸으나 다가 공작은 당당하게 굴었다.
“그럼 다가 공작. 그대는 하이신스 황제가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겠단 건가?”
“치료 방법은 우리가 직접 찾을 겁니다.”
라틸은 기가 막혀서 입을 벌렸다. 사람들이 방 안을 정리하다 말고 이쪽을 쳐다보자 다가 공작은 더욱 언성을 또박또박 높였다.
“아까 타리움 사절단 중에도 쓰러진 이들이 있다 했지요? 직접 대신관과 그중 두 명을 데려와 치료되는 모습을 우리 앞에서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이신스 폐하를 치료하게 해드릴 겁니다.”
라틸이 하이신스와 사귀었던 사이가 아니었다면 더러워서 치료 안 해주고 만다고 했을 것이다. 치료해주는 건 명백히 이쪽이 베푸는 선의인데 그걸 두고서 받니 어쩌니 하다니.
‘아니. 어쩌면 그걸 원하는 건가? 우리가 하이신스 치료하는 걸 원하지 않아서? 설마…… 그 정도로 쓰레기라고?’
그러나 하이신스가 쓰러지자 타리움 병사들은 다가 공작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라틸은 화가 나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이 위협적으로 여겨졌는지 갑자기 카리센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다가 공작 주위를 감쌌다.
다가 공작은 라틸을 노려보더니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우리 하이신스 황제께서 쓰러지셨으니 앞으로 한동안 카리센은 정신없을 겁니다. 위급한 와중에 다른 나라 사람들을 가까이 둘 수 없습니다. 이 틈을 타서 뭔 짓을 할지 모르니까요.”
라틸이 눈을 내리깔다가 천천히 뜨자 별거 아닌 행동인데도 병사들이 더욱 긴장했다. 다가 공작 역시 주춤 뒤로 물러났으나 곧 자존심이 상했는지 더욱 당당하게 나섰다.
“특히 타리움처럼 국력이 강한 나라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타리움을 포함해 모든 외국 사절들은 내일 자국으로 돌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하이신스가 그냥 병으로 쓰러진 것이라면 누군가는 다가 공작을 말릴 것이다. 예를 들어 재상이라거나 하는 사람. 그러나 하이신스가 좀비에게 물려 쓰러져 있자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치료법이 없을 확률이 높은 상황이다 보니, 다들 아이니 황후의 아버지인 다가 공작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라틸은 화가 났지만 자신은 타리움의 황제였다. 여기서 다가 공작을 두드려 패면서 싸울 수는 없었다.
라틸은 그래도 말이 통하는 아이니가 나서주길 바랐으나, 아이니는 하이신스가 쓰러진 충격이 큰 탓인지 자리를 떠난 이후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조용히 분노한 라틸을 향해 다가 공작이 역겹게 웃으면 손을 내밀었다.
“자, 그 검은 이제 주고 가시지요. 폐하께서 검을 가져가 버리시니 우리 아이니 황후께서 사용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라틸은 말없이 검을 휙 던졌다. 겉으로 보기엔 툭 던지는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힘을 담아 세게.
그 바람에 대신 검을 받으러 나선 다가 공작의 호위가 검을 안고 뒤로 쿠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방 안의 긴장감이 한층 더 깊어진 가운데 라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두 손을 태연히 벌렸다.
“집주인 쓰러진 곳의 하인이 가라니 손님은 가야지.”
“하인이라니-!”
“하지만 기억하게, 공작.”
“?”
“지금 짐이 이렇게 돌아가잖아? 다음에 내 도움을 청할 땐 공작, 그대가 찾아와 내 발밑에 엎드려야 해.”
“!”
“이마가 땅에 잘 닿도록.”
빙그레 웃은 라틸은 다가 공작의 옆에서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며 창 끝을 겨누고 있는 호위 하나의 발목을 걷어찬 다음, 호위가 고꾸라지자 그 뒤통수에 발을 대고 세 번 꾹 꾹 꾹 누르면서 히죽 웃었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아주 오만하시군요.”
빙그레 웃은 라틸은 다가 공작의 호위에게서 발을 떼고 공작의 뺨을 톡 두드리며 웃었다.
“짐은 그래도 돼.”
* * *
다가 공작의 앞에선 웃고 있었으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라틸의 표정은 험악했다. 클라인은 라틸을 쫓아가면서 걱정스레 물었다.
“폐하, 형님은-.”
라틸이 화나서 정말로 하이신스를 치료하지 않으면 어쩌나 염려하는 눈치였다. 라틸은 빠르고 작게 대답했다.
“당연히 치료할 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폐하…….”
“그보다 조심해라, 클라인.”
“네?”
“좀비 수프 범인. 다가 공작 같다.”
“!”
“호위들을 잔뜩 대동하고 나타난 거나 대적자의 검을 자기가 가지고 있던 거나, 복도를 다 막아 놨다가 일이 해결되니까 갑자기 사람들이 오게 한 것 등등. 수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