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미친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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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화. 미친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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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화. 미친 공작
2022.09.11.
클라인은 눈물을 글썽였다.
“폐하, 지금 제가 가서 다가 공작의 머리통을 떼버리면 폐하께서 절 보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 그게 가능하면 내가 땄다.”
강대국이라고 해서 약소국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정말로 세계통일을 목표로 나서는 게 아닌 이상에야, 이미지는 챙겨야 한다.
심지어 카리센은 약소국도 아니었다. 여기서 라틸이 다가 공작의 머리통을 똑 떼버리면 사람들은 ‘하이신스 황제를 위해 라트라실 황제가 나섰다’고 믿기는커녕 타리움에서 카리센 황제도 죽이고 공작도 죽여버린 거라고 할 것이다.
다가 공작의 친딸인 아이니 황후가 나서서 편들어 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과연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편들어 줄 자식이 있을까?
부모와 자식 관계라도 원수 같은 이들이 있긴 하겠지만, 라틸이 알기로 아이니 황후는 다가 공작과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면 카리센 사람들은 결집해서 항의할 것이고, 카리센과 친한 국가들은 그쪽을 편들 것이고, ‘타리움이 카리센을 공격한 걸 보니 다른 나라들도 공격할거다’라고 위기감을 느낀 나라들도 그쪽에 붙을 터. 좋지 않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간 라틸은 복도를 걸어가며 근위병들에게 지시했다.
“사절단은 모두 다 내 방으로 모이라 해라.”
“예.”
근위병 몇 명이 뒤로 빠져서 흩어졌다.
라틸은 자신의 방 앞에 도착해서야 이 도움 안 되는 라나문과 서넛을 발견했다. 둘 다 막 놀란 얼굴로 방 밖으로 나오는 길이었다.
분명 깜짝 놀란 얼굴인데. 하나는 차갑고 하나는 굳은 얼굴인데. 왜 오늘따라 둘 다 저리 맹해 보일까?
라틸은 한숨을 쉬고서 손가락으로 둘을 번갈아 가리키다가 가까스로 ‘쟤네 탓이 아냐’라고 화를 꾹 눌렀다.
“폐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라나문이 황급히 곁으로 다가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서넛도 반대쪽 옆으로 다가와 라틸을 살폈다.
“나는 괜찮다. 다른 사람들은 안 괜찮지만.”
라틸은 짧게 대답하고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수프는…… 모아두고 뭐고 할 것도 없네.”
라틸은 토사물과 뒤섞인 수프를 보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증거로 쓰려고 했는데 누가 여기에 토를 해둔 건지.
“일단 음식은 모아두고 나머지는 죄다 치워라. 방은…… 젠장. 치우고 자야 해, 옆방으로 가야 해?”
라틸이 지시하자 클라인이 라틸의 손을 잡았다.
“내일 가실 거라면 그냥 제 방에서 주무시지요. 방을 옮기고 하는 게 더 피곤할 겁니다.”
라나문과 서넛이 움찔했으나 라틸은 그게 나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치운다고 해도 이 소동이 벌어진 곳에서 제대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아, 서넛 경.”
“예, 폐하.”
“그리고 라나문?”
“네, 폐하.”
“두 사람 한가하지? 이 소란이 벌어지도록 코빼기도 안 보일 정도면 많이 한가했을 거야. 그렇지?”
“…….”
“…….”
“둘은 돌아다니면서 다른 나라 사절단들 불러와.”
서넛과 라나문은 서로를 불만스레 보긴 했으나, 찔리는 게 있는지 둘 다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라틸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방 안을 치우기 위해 들어온 하인들을 힐긋 보고는 손을 들었다.
“그쪽은 잠시 멈추고.”
하인들이 멈춰 서서 쳐다보자 라틸은 손가락을 허공에서 돌리다가 한 지점을 쿡 누르듯 멈추며 지시했다.
“나중에 치우고. 그대로 놔둬봐.”
그러고서 라틸은 다시 서넛을 보며 명령을 바꾸었다.
“서넛 경.”
“예, 폐하.”
“다른 사절단 데려오는 건 라나문이 맡고. 서넛 경은 다른 걸 해줘야겠다.”
“?”
* * *
잠은 클라인의 방에서 자기로 했지만, 사절단까지 그곳으로 부를 수는 없기에 라틸은 우선 옆방으로 옮겨 사절단을 맞이했다.
30분 정도가 지나자 타리움의 사절단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절단들까지 모였다. 사람들이 모이자 라틸은 근위병에게 지시했다.
“내 방으로 안내해드려라.”
라틸은 일부러 방을 치워놓지 않고 있다가 다른 나라 사절단들에게 자신의 방 꼴을 다 보여주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소란이 들려서 무슨 일인가 보고 오라 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큰일이 생겼다고 복도를 카리센 경비병들이 다 막고 있어서 움직이기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그 병사들이 다들 흩어졌지만 무슨 일인가 했는데.”
사절단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는 옆방에서도 다 들릴 정도로 커다랬다.
라틸은 외국 사절단들이 진정하길 기다렸다가 그들을 다시 옆방으로 불러 물었다.
“꼴이 엉망이지?”
‘엉망이다’라고 표현을 해도 좋을지 몰라 사절단들은 서로를 힐긋거리며 입을 오물거렸다.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위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카리센 황후 방은 더 엉망이네. 좀비들이 나타났거든.”
‘좀비’라는 말에 사절단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단 눈으로 라틸과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내 방에 엎어져 있던 그 수프 있지? 토사물과 섞여 있던.”
“예.”
“누가 수프에 좀비 관련된 뭘 넣어놓았다. 덕분에 우리나라 사절 네 명은 지금 좀비로 변해가는 중이지. 대신관 덕에 다 변하기 전에 멈췄지만.”
“!”
“못 믿겠지?”
라틸이 눈짓하자 근위병들이 의식을 잃고 들것에 묶여 있는 사절 네 명을 데려고 나왔다.
그들은 모두 피부가 파르스름하게 창백한 데다 피부가 눈에 띄게 튀어나와서 겉으로 보기에도 보통 상태가 아니었다.
“세상에.”
“이게 대체…….”
“그게 가능합니까?”
라틸은 어깨를 으쓱했다.
“가능한가 보더군. 그래도 못 믿겠다면 내 방에 가서 한 숟가락씩 떠먹어봐도 좋아.”
“위험……한 상황은 아닙니까? 지금 죽여야…….”
“대신관 부적을 붙여서 진행은 막았네. 그래도 혹시 몰라 근위병들이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쓰러진 사절단 한 명을 계속 지켜보고 있지.”
외국 사절단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하이신스 황제가 이런 상태라네.”
사람들이 다들 놀라서 웅성거렸다. 그 와중에 사절 한 명이 반박했다.
“저희가 이 말을 믿어도 됩니까? 피해를 입은 게 타리움인데 하이신스 폐하께서 이런 상태라고요?”
다른 사절 한 명도 굳은 얼굴로 나섰다.
“타리움 황제께서 이 일을 꾸민 건 아니십니까?”
“갑자기 좀비가 나타났다니. 믿을 수 없습니다!”
라틸이 손짓하자 문밖에 서 있던 서넛이 뭔가를 가지고 들어왔다. 끄는 수레 위에 얹고 위에 검은 천을 덮은 것인데 희미하게 계속 꿈틀거리고 있었다.
서넛이 그것을 벗기자 안에서 움직이는 하반신이 나타났다.
“으악!”
“세상에!”
“아이고!”
사절단 몇 명이 주저앉았고 몇 명은 뒤로 달아나다가 다른 사절단들을 넘어뜨렸다.
라틸이 짝짝 손뼉을 두 번 치자 외국 사절단들은 그제야 소리를 멈추고 라틸은 보았다. 넘어진 사절단들도 비틀비틀 일어섰다.
라틸은 심드렁하게 도로 천을 덮으라 손짓했다.
서넛이 하반신 좀비를 다시 가지고 나가자 사절단들은 아까보다 더욱 충격에 젖은 얼굴이 되긴 했으나 한풀 조용해졌다.
“일부러 자네들 보여주려고 안 치우고 기다렸네. 내 배려심에 감사하도록.”
“…….”
“…….”
“왜…… 이런 걸 저희에게 보여주시는 건지…….”
“하이신스 황제가 쓰러지는 현장엔 나와 아이니 황후, 다가 공작, 하이신스 황제 본인, 클라인 황자, 하이신스 황제의 호위들, 카리센 경비 몇 명, 내 근위병 몇 명 이렇게 있었네. 하이신스 황제가…….”
라틸은 말을 하다가 잠시 목이 막혀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곧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한 곳에 좀비들을 다 몰아놨네. 덕분에 피해가 크지 않았지만 본인이 쓰러졌어. 다행히 대신관의 부적으로 좀비화를 멈추긴 했지만, 지금 하이신스 황제는 의식이 없다네.”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이니 황후가 대리 통치를 하게 되는 겁니까?”
“아니면 양위……?”
라틸은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지. 내가 나설 일은 아니니.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내 후궁 중엔 대신관이 있는지라. 대신관이 아마 하이신스 황제를 치료할 수 있을 거라네. 내 대신관은 유능하고 선하고 대단하거든. 문제는 다가 공작이 날 못 믿어서 하이신스 황제 치료를 안 맡기려 든단 거지.”
대신관이 치료할 수 있단 말에 안심하던 외국 사절들은 다가 공작이 치료를 막았단 소리에 또 웅성거렸다.
“다가 공작은 나와 모든 외국 사절들이 내일 날이 밝으면 돌아가달라 했네.”
라틸이 외국 사절들을 모두 불러오라 한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혹시 다가 공작이 그들을 돌려보내면서 이상하게 상황을 조작할까 봐 미리 전반적인 사태를 직접 알려준 것이다.
혹시라도 다가 공작이 이 일을 타리움 탓으로 돌려버릴까 봐.
“자, 이쯤 되니 여러분들도 알겠지. 짐이 왜 그대들에게 이 일을 직접 이야기해 준 건지.”
사절단들이 머리가 나쁠 리는 없어서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을 믿건 안 믿건 일단 이렇게 해 두면 다가 공작이 뭐라고 입을 털더라도 자기들 머리로 생각을 하고 누구를 믿을지 정하겠지.’
사실 다가 공작도 지금쯤, 혹은 조금 뒤쯤이면, 이쪽이 선수 쳐서 외국 사절들에게 입을 놀렸단 걸 알고 있겠지만.
* * *
라틸은 클라인의 팔을 베고 누워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클라인은 잠들지 못하고 눈을 뜬 채 라틸의 이마만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치자 클라인은 쑥스럽게 웃으면서 라틸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댔다.
“왜 안 주무십니까?”
“네가 자꾸 노려봐서.”
“바라본 겁니다.”
라틸은 손을 올려 그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하이신스가 쓰러질 때 클라인의 표정이 생각나서 덩달아 마음이 아파졌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형이 쓰러진 것이니, 클라인이 더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 싶어서.
“걱정 마라. 하이신스는 내가 꼭 구해줄게.”
“믿습니다. 폐하는 형님을 가장 좋아하니까요.”
“……그렇지 않아.”
클라인은 반박하지 않았지만 라틸의 말을 믿는 것 같지도 않았다.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돌아누웠다.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자니, 하이신스가 힘겹게 숨 쉬던 게 떠올라 가슴이 지끈거렸다.
생각해보면 그는 싸운 후에도 이것저것 많은 도움을 주었다. 화를 내고 시비를 걸면서도 결국 계속 도움을 주었다.
라틸은 입술을 깨물고 눈에 힘을 주었다. 클라인이 더 슬플 텐데. 울어서 그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클라인이 속삭였다.
“저…… 폐하. 여기까지 절 데리러 와주셨는데 죄송하지만, 저는 형님을 좀 간호하다가 돌아가겠습니다.”
“하이신스를?”
“네. 반 좀비 상태라고 사람들이 무서워서 안 보살필까 겁도 나고. 다가 공작이 형님에게 붙여둔 부적을 떼버릴까 봐 신경도 쓰이고. 이래저래 걱정되어서요.”
라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라.”
“네.”
“근데 괜찮을까? 다가 공작, 좀 미친 사람 같던데.”
“그러니까 제가 형님 곁에 있어야지요.”
* * *
다음날.
라틸은 떠나기 전 한 번 더 하이신스를 보려 했으나 카리센 근위병들이 외부의 출입을 철저하게 막아 볼 수 없었다.
황제인 하이신스가 의식을 잃자 근위병들은 하이신스의 목숨을 지키는 걸 최우선으로 여기면서 자연스럽게 대리 황제 역할을 할 아이니의 지시를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저 지시를 내린 게 아이니가 아니라 다가 공작이라는 건 사절단 모두가 아는 일이었다.
라틸은 하이신스의 방 앞을 가로막은 이들이 하이신스의 근위병이긴 하지만, 하이신스가 다치던 현장에 있던 근위병은 아니란 걸 알아차리고 클라인에게 당부했다.
“조심해라, 클라인.”
“염려 마십시오. 폐하는 빨리 치료법을 알아내어 알려주시면 됩니다.”
클라인은 라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리고 제가 여기에 있어야지, 다가 공작이 폐하가 보내준 치료법을 거부해도 억지로라도 밀어붙여 볼 수 있지요.”
“신중하게 행동해.”
사건이 터졌을 때 제일 앞에서 뛰어다닌 라틸이 할 말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라틸은 걱정이 되어 몇 번이나 충고했다.
클라인은 괜찮다고 거듭 말하고서 라틸을 배웅했다.
그리고 멀리 라틸이 탄 마차가 보이지 않게 되자 그는 자기 혼자서라도 하이신스에게 가보기 위해 돌아섰다.
하지만 돌아서는 그 순간. 수십 명의 근위병들이 그의 목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황자님!”
“무슨 짓들이냐.”
놀란 바닐과 악시안이 클라인을 앞뒤로 감쌌으나 병사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로 다가 공작이 슬픈 표정을 하고 나타나 명령했다.
“황후 폐하의 명이시다. 황위를 찬탈하기 위해 폐하를 습격한 저 잔악무도한 범죄자를 당장 감옥에 가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