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1화. 염색한 그리핀 (271/367)


271화. 염색한 그리핀
2022.10.02.


다가 공작은 별장 안으로 들어가 측근들을 데리고 차나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그들은 쓴 차에 단맛이 강한 과자를 디저트로 먹으면서 클라인 황자가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망나니 같았는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성정이 얼굴만큼만 고왔어도 따르는 귀족들이 많았을 텐데. 참. 제 스스로 제 살을 씹어먹은 격이지.”

다가 공작은 차를 마시다가 가끔 클라인의 어린 시절이 실감 나게 떠오르면 키득키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측근들은 덩달아 웃으면서 한두 마디씩 보탰다.

그 사이에서 미셜 후작은 소름이 돋았다. 창문 너머로는 클라인 황자를 지하 감옥에서 끌고 온 이들이 그를 커다란 말뚝에 묶어 놓고 있었다. 죽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미셜 후작은 손끝이 자꾸 떨리는데다 손바닥에서 땀이 나자, 찻잔을 들어 올리다가 내리고 들어 올리다가 내리길 반복했다.

그는 좀 무서웠다. 황자를 죽일 거라 말하면서, 그 황자의 어린 시절부터 청년 시절, 그리고 지금까지를 차근차근 하나하나 회상하며 웃는 다가 공작이 소름 돋게 여겨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 접시에 덜어 놓은 디저트가 거의 다 비워졌을 즈음. 다가 공작은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창밖을 보았다.

커다란 말뚝에 꽁꽁 묶인 클라인 황자가 보였다. 몇 시간을 거칠게 끌고 온 탓에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머리가 휘청이고 있었다.

그걸 보자, 다가 공작은 좀비 수프 사건이 있던 날. 사람들 앞에서 한참 어린 라트라실 황제에게 머리를 얻어맞고 뺨을 맞은 모욕이 조금 풀리는 듯해 기분이 나아졌다.

그는 밝은 얼굴로 일어서며 측근들에게 권했다.


“자, 그러면 어릴 때부터 보아온 우리 황자님 목숨, 우리가 잘 배웅해 드리러 갑시다.”

 

* * *



“제 말이 맞죠, 전하?”

온몸을 묶은 밧줄을 어떻게 끊어낼지, 무기로 쓸 만한 게 없을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살피던 클라인은 난데없는 악시안의 질문에 옆을 보았다.

악시안이 옆에 나란히 꽁꽁 묶인 채 최대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 씩 웃고 있었다.


“뭐가.”

클라인이 퉁명스럽게 묻자 악시안이 아직도 그걸 모르시겠냐며 말했다.


“제가 말은 가끔 이상하게 해도 황자님을 많이 염려합니다.”

“넌 이 와중에…….”

“이 와중이니 말씀드리는 거지요. 많이 좋아한다고요.”

악시안이 낄낄 웃자, 바닐이 축 늘어져 있다가 ‘아이구 등신 아이구 등신’ 하고 중얼거렸다. 악시안은 그 소리도 용케 들었는지 바닐을 향해서도 외쳐주었다.


“너도 내가 많이 좋아해, 시종.”

“이 와중에 웃음이 나와요?!”

“이 와중이니 웃어야지. 울면 분위기 처지잖아.”

클라인은 자신을 사이에 두고 말다툼을 시작한 바닐과 악시안을 번갈아 보다가, 타리움에서 지낼 때를 떠올렸다.

그곳에서도 늘 이런 식이었다. 악시안과 바닐은 늘 다퉜다. 정확히는 악시안의 말에 바닐이 늘 흥분한 것이지만.

거기서 지낼 때는 아무리 기다려도 황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후궁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한 황제는 형과 사귀었다 하고. 이런 모든 상황이 스트레스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그냥,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다른 후궁들과 티격태격하다가도 가끔씩은 그저 말장난이나 하면서 놀다가, 황제가 오랜만에 오면 ‘왜 이제 오셨냐’고 서운해하고.

가끔은, 가끔은 황제가 자신을 보는 눈빛에 애정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해보고. 이런 게 좋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또 같은 시절이 보면 또 황제가 오지 않는다고 툴툴거리면서 하렘 안을 휘젓고 다니겠지만.

클라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하렘에서 지낼 때 늘 궁금했다. 황제는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이 한 조각이라도 있을까? 말로는 있다 하는데, 그게 진짜일까? 그는 늘 그게 궁금했다.


“결국 모르고 가는구나.”

“전하?”

클라인이 갑자기 가볍게 웃다가 눈물을 흘리자, 악시안과 바닐이 말다툼 하던 걸 멈추고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전하?”

“울지 마세요, 전하.”

양옆에서 쫑알거리자 클라인은 감정에 젖어 있다가 울컥해서 인상을 썼다.


“안 운다, 이 자식들아.”

“하지만 눈물이…….”

“비다. 비가 한 방울 떨어졌어.”

클라인이 단호하게 주장하자 바닐과 악시안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제 머리에도 한 방울 떨어졌습니다.”

“하늘이 새까만 걸 보니 곧 비가 올 거 같아요, 전하.”

클라인은 어이가 없어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피식 웃었다. 늘 외롭다 생각했는데. 셋이 가니 외롭진 않겠구나, 하고.

그때. 불쾌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들려왔다.


“하늘도 우리 아름다운 황자님 부를 생각에 기쁜가 봅니다?”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툭툭 털며 나오는 다가 공작의 목소리였다.

측근들을 대동하고 세 사람의 앞으로 온 다가 공작은 바닐과 악시안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클라인만을 바라보았다.

다가 공작은 그 상태로 잠시 클라인을 물끄러미 보다가 혀를 찼다.


“얼굴이 아깝단 말이지 얼굴이. 말만 잘 들었어도 참.”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다가 공작은 곧 뒷짐을 지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클라인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클라인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다가 공작을 노려보았다.

평소라면 모두가 무서워할 클라인의 이런 시선은, 다가 공작에겐 다 잡힌 사냥물의 마지막 발악처럼 보여 그저 웃길 뿐이었다.


“이렇게 가서 억울합니까, 황자님?”

“…….”

“염려 마시지요. 때가 되면 하이신스 황제도 보내드릴 테니. 먼저 가서 기다리고 계시면 차곡차곡 다 갈 겁니다.”

“너……!”

“황자님 아내도 보내드릴 테니, 거기선 둘이서만 금슬 좋은 부부 하시길.”

히죽 웃은 다가 공작이 뒤로 한 발 물러나 손을 내밀자, 부하가 얼른 검을 가져와 공작에게 내밀었다.

공작은 검을 두 손으로 잡고서 씩 웃더니 도끼로 내려찍는 양 크게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바닐은 눈을 질끈 감았으나 클라인은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서, 다가 공작을 노려보았다.


 
그 검이 아래로 휙 내려가려는 그 순간.


“아버지!”

멀리서 여자가 외치는 소리에 다가 공작이 주춤 손을 내렸다. 다가 공작은 인상을 찌푸리고 옆을 보았다. 저택에서 후원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아이니 황후가 서 있었다.

다가 공작은 화가 나서 아이니의 뒤에 선 시녀들에게 버럭 외쳤다.


“누가 황후 폐하를 여기로 모셨느냐!”

루이스는 찔끔해서 고개를 숙였다. 그걸로 범인을 알아챈 다가 공작은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그 사이, 아이니는 다가 공작의 앞으로 다가와 단호하게 지시했다.


“클라인 황자가 진범이라면 수사부터 해야 해요.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건 안 돼요, 아버지.”

다가 공작은 클라인을 대할 때보다 한풀 꺾여서 인상을 썼다.


“증거물이라고 나온 게 없는 데 뭘 수사하란 거냐. 이런 일은 다 정황 증거로 처리하는 수밖에 없어, 아이니.”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나중에 제대로 수사해서 처형을 하더라도 절차를 밟아야지, 이렇게 개인 원한 처리하듯 하면 안 돼요. 알잖아요.”

“…….”

다가 공작은 아이니의 단호한 표정을 보자, 결국 혀를 차고서 검을 옆에 선 호위에게 도로 건넸다. 호위는 황후의 눈치를 보며 검을 얼른 받아 검집에 넣었다.

이 상황이 너무 무서웠던 미셜 후작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서, 황후와 빠르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다행히 황후가 아슬아슬하게라도 와 주어서 못 볼 꼴을 안 봐도 되는 게 기쁠 정도였다.

그러나 클라인 황자를 죽이기 직전까지 갔는데 놓아줘야 하는 게 너무 싫었던 다가 공작은, 소매를 털며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결국 화가 났는지 다시 돌아와 클라인의 앞으로 가 멱살을 잡아챘다.


“이걸로 끝은 아닙니다, 황자.”

그러고는 아이니가 혹시라도 들을세라, 그는 클라인 황자의 귀에 입을 대고서 나직하게 협박했다.


“내가 한 말도 다 사실입니다. 하이신스 황제, 라트라실 황제, 내가 다 차례 차례 하나씩 보내줄-.”

그러나 말을 다 끝내기 전. 가만히 협박을 듣는가 싶던 클라인이 다가 공작의 목덜미를 잡고 물어뜯어 버렸다.


“컥!”

말을 하다 말고서 목 옆이 뜯기자, 다가 공작은 비명도 못 지르고 목이 막히는 소리만 내며 비틀거렸다.


“공작님!”

“저 망나니 황자가!”

측근들은 황급히 달라붙어 클라인에게서 다가 공작을 뜯어냈다. 다가 공작은 목 옆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막고서 비틀거렸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사이로 피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

아이니는 비명을 지르며 다가 공작에게 달려가 무릎을 굽혀 그를 살폈다.


“아버지!”

다가 공작은 아직도 놀라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손바닥 너머로는 계속 피가 나왔다.


“의사! 의사를 데려와!”

아이니가 황급히 명령하자, 측근 몇 명이 돌아서서 어딘가로 달려갔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이니는 울면서 다가 공작을 살피다가, 원한에 가득 찬 눈으로 클라인 황자를 노려보았다. 클라인은 입에 물고 있던 걸 그제야 퉤 뱉었다. 클라인의 입가 주위는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걸 본 아이니는 분노가 머리 끝까지 뻗어서 그에게 달려가 목을 틀어쥐었다.


“왜 그랬어! 왜 그랬어! 내가 널 구해줬는데 왜 내 아버지를!”

놀란 시녀와 마셜 후작이 달려와 그녀를 잡고 당겼으나, 아이니는 클라인 황자의 목을 잡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증오로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놔! 놔! 죽여버리겠어! 똑같이 물어뜯어 버릴 거야!”

클라인 황자는 숨이 막히는 와중에도 건조한 눈으로 아이니를 바라보았고, 악시안은 발끝을 최대한 뻗어서 소란스러운 와중에 떨어진 검을 가져오려 했다.

그때. 무언가 ‘쉭’ 소리를 내며 빠르게 날아와 아이니의 손등에 꽂혔다.


“아!”

비명을 토하며 뒤로 물러선 아이니는 손에 꽂힌 게 화살인 걸 알아차렸다.


“황후 폐하!”

“폐하!”

사람들이 놀라 외쳤으나 아이니는 통증을 잊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하얀 새가 그들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새 위에는…….


“라트라실!”

라트라실 황제가 화살을 들고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놀라서 웅성거렸다.

새가 고도를 낮추자 라트라실 황제는 그 위에서 뛰어내려 그들 사이로 착지했다.

다가 공작 일파들이 웅성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이니는 눈을 부릅뜨고 라틸을 노려보았다.

라틸은 아이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가져 온 단도로 클라인을 묶은 밧줄을 끊었다. 그 단도를 라틸이 클라인에게 주자, 클라인은 바닐과 악시안을 묶은 밧줄을 차례로 끊었다.

아이니는 라틸을 죽일 듯 노려보다 물었다.


“타리움은 우리와 적이 되려는 건가. 이게 무슨 짓이지, 라트라실?”

라틸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 후궁에게 죄를 덮어씌워 사적으로 처형하려 했으면. 이미 그쪽이 선전 포고한 거 아닌가?”

“그 후궁이 내 아버지를 죽였다.”

아이니가 손으로 다가 공작을 가리키자, 라틸은 쓰러져 경련 중인 다가 공작 쪽을 힐긋 보고서 정정해주었다.


“아직 살아 있는데. 아버지 벌써 죽이지 마, 황후.”

“클라인 황자가 먼저 내 아버지 목덜미를 물어뜯었어!”

라틸은 씩 웃으며 인정했다.


“사실 그건 못 봤어. 그쪽이 얘 목 조르는 거부터 봤어.”

“!”

분노해 라틸을 노려보던 아이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서늘하게 물었다.


“혼자 온 용기는 칭찬해. 하지만 자, 이제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갈 거지? 네 말대로 우리가 클라인 황자를 사적으로 처형하려 했는데. 이걸 본 그쪽을 보내줄 거 같아?”

아이니의 말이 끝나자 다가 공작의 호위와 측근들, 아이니가 따로 데려온 호위들이 동시에 라틸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악시안과 바닐, 클라인이 라틸을 지키려는 듯 삼각 대형으로 라틸을 둘러쌌다.

라틸은 그 상황을 지켜보다가 웃으면서 아이니에게 물었다.


“그대는 왜 내가 혼자 왔을 거라 생각해?”

말이 끝나는 순간. 사방에서 동시에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가 공작 일파들은 그 소리에 놀라 주위를 보았다.

언제 온 줄도 모르게, 새까만 옷을 맞춰 입은 창백한 무리가 담 전체를 둘러싸고서 이쪽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