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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화. 그저 변명 중 (274/367)


274화. 그저 변명 중
2022.10.12.


몇 시간 동안 아낙차는 여우 가면의 성에 있을 때 익힌 것들, 이곳에서 헤움의 목을 가지고 연구한 것들, 죽은 동물을 가지고 연구한 것들을 총동원해 다가 공작을 ‘꼭두각시 식시귀’로 부활시키려 애썼다.

일반적인 식시귀의 부활 방법을 그대로 밟되, 순응성을 높이고 이성을 살짝 줄이는 것이다.

마침내 강한 향을 내는 싱싱한 풀을 다가 공작의 몸 안에 채워 넣고 바느질한 아낙차는 실을 끊고 시체에서 손을 뗀 다음 마력이 담긴 돌을 그의 입안에 물리고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입 안쪽으로 마력석이 동그란 형태로 빛나더니, 천천히 다가 공작의 몸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틀라와 아낙차는 다가 공작의 시체 안에서 희미하게 빛이 이동하는 걸 지켜보았다. 마침내 그 빛은 다시 다가 공작의 입으로 돌아와 완전히 사라졌다.

잠시 뒤. 다가 공작이 눈을 번쩍 뜨더니, 부리부리하게 뜬 눈동자를 힐긋 이쪽으로 옮겼다.

아낙차는 긴장해서 그가 이성이 있는지 없는지 살폈다.


“아……낙……차.”

다가 공작이 입에서 돌을 빼내고서 느리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아낙차는 안도해서 활짝 웃었다.


“됐다.”

이성이 있었다. 틀라와 아낙차는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이젠 다가 공작이 그들이 꼭두각시가 되었는지만 확인하면 되었다.

아낙차는 당장 공작에게 명령을 내려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서, 평소 그를 대할 때처럼 친절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공작님. 정신이 드세요?”

다가 공작은 손을 들어 자신의 성대 부근을 어루만지다가 천천히 손을 옆으로 옮겼다.

클라인이 물어뜯은 목 부위를 손바닥으로 짚자 말라붙은 피딱지가 묻어 나왔다. 다가 공작은 분노해 눈을 부릅뜨며 이를 갈았다.


“클라인! 클라인! 클라인!”

그가 버럭 외쳐대자, 아버지 소리를 들은 아이니가 계단을 뛰어 내려와 이쪽으로 달려왔다.


“아버지!”

아이니가 외치자, 다가 공작은 딸을 알아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이……니!”

하지만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또 고꾸라졌다.


“아버지!”

아이니는 다가 공작에게 다가가 그를 흔들다가 아낙차를 보았다.


“왜 이러느냐. 왜 아버지가 또 쓰러지신 거냐!”

아낙차는 다가 공작이 자신의 질문을 무시하고 클라인을 외쳐댈 때부터, 그를 꼭두각시로 깨우려던 게 실패했단 걸 알았기에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언제든 수정할 기회는 있기에, 아낙차는 그 차가워진 표정을 숨기고서 아이니를 위로했다.


“막 깨어난 상태에서는 아직 몸이 온전하지 않아 그래요. 시간이 지나고 배를 채우면 더 나아진답니다.”

“배를…… 채우다니?”

“식시귀가 뭘 먹는지 아시잖아요.”

“!”

 

* * *

늦은 저녁까지 이런저런 일을 처리한 라틸은 허기가 지자 시계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식사하러 가시겠습니까?”

서넛이 얇은 푸른색 겉옷을 라틸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라틸은 옷에 팔을 꿰어 입는 대신 건성으로 두르기만 하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 망아지 달래러 갈 겁니다.”

라틸의 말에 서넛의 미간이 반사적으로 찌푸려졌다.


“아. 그 집 망아지요. 피곤할 텐데. 그냥 쉬라 두는 게 낫지 않을까요?”

라틸이 문가로 걸어 나가다 돌아보자, 서넛이 뒤를 따라오다가 반듯한 미소를 지었다. 상대를 배려하는 듯한 미소로, 절대로 나쁜 뜻 따위는 없어 보였다.


“하이신스가 쓰러졌잖습니까. 아직 구해오지 못했고. 본인은 무사하지만 아직 마음이 안 좋을 겁니다.”

서넛은 어깨를 으쓱했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더 말을 얹지는 않겠다는 듯.

라틸은 그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고서 다시 긴 복도를 지나 하렘으로 걸어갔다.

게스타나 칼라인, 대신관, 라나문 등과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시간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후궁 중 타시르만 쏙 뺄 수는 없으니 그도 챙겨야 하고.

므라딤은 하렘에서 지내고 있긴 하지만 후궁은 아니니 안 챙겨도 되겠지. 어차피 본인도 로드 편에 붙기 위해 온 거지, 진짜 국서나 후궁이 되러 온 것도 아니고.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클라인의 방문이 앞에 보였다. 라틸은 문을 노크하고서 “클라인.”하고 방 안까지 들리도록 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10초를 세기도 전에 문이 발칵 열리더니 클라인이 나와 라틸을 꽉 끌어안았다.
 

 
라틸은 가만히 서서 그의 등을 몇 번이나 쓸어주다가, 뒤뚱뒤뚱 앞으로 걸음을 옮겼고 클라인도 그 자세 그대로 후진해 이동했다.

발로 문을 닫은 라틸은 그를 소파까지 데려간 다음 등을 동그랗게 쓸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권했다.


“일단 앉아라, 클라인. 뭘 좀 먹어야지.”

클라인이 간지러운지 허리를 빠르게 폈다가 조금 구부정하게 다시 숙였다.


“입맛이 없습니다, 폐하.”

“그래도 먹어야 해. 다가 공작이 널 잡아두고서 음식을 먹이진 않았을 거잖아.”

“다가 공작의 피를 마셔서 괜찮습니다.”

서넛이나 칼라인이 들었더라면 웃음을 터트렸을 말이었다. 하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그는 다가 공작의 목 옆을 완전히 물어뜯어 놨으니.


“뱀파이어가 될 소질이 있네.”

라틸이 농담하자 클라인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희미하게 따라 웃었다.


“별로 맛은 없었어요.”

“맛있으면 더 큰 일이지.”

클라인은 방 안을 한 번 좌우로 살피더니 더욱 풀이 죽어 웅얼거렸다.


“바닐이랑 악시안이 없는 것도 기분이 이상합니다. 여기 온 후로는 늘 붙어 다녔는데.”

“둘은 무사히 도착할 거야. 염려 마라. 흑사신단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용병들이니까.”

사람이 아니거든. 라틸은 뒷말은 하지 않고서 낮은 나무 탁자에서 종을 집어 흔들었다.


“클라인이 좋아하는. 아니, 소화가 잘될 만한 음식으로 내와.”

라틸은 하인이 방 안에 다 들어오기도 전에 명령했고, 하인은 반쯤 들어왔다가 도로 문을 닫고 나갔다.

하인이 들어올 때는 감자 퓌레를 덮은 샐러드와 연호박색의 수프, 흰살생선 요리가 담겨 있었다. 달콤한 냄새와 고소한 냄새, 감미로운 냄새가 방 안을 금세 채웠다.

하인은 탁자에 접시를 보기 좋게 내려놓고서 재빨리 나갔다.

라틸은 짙은 자주색 음료수를 집어 클라인에게 건넸다.


“마셔라.”

클라인은 순순히 라틸이 지시하는 대로 했다. 음료수를 마시고, 수프를 먹으라면 먹고, 생선을 발라 주면 입에 넣고 씹었다.

입맛이 정말로 있다기보다는 라틸이 걱정할까 봐 따르는 게 분명했다.

그걸 보자 걱정되는 마음에 언짢아졌지만, 라틸은 적당히 배가 찼다 싶을 즈음까지 그에게 계속해서 음식을 먹였다. 혹시 체할까 봐 클라인의 안색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충분히 음식을 다 먹은 것 같자 라틸은 더 명령하길 멈추고서 욕실을 눈으로 가리켰다.


“이제 씻고 누워서 한숨 자. 이렇게 며칠만 있다 보면 바닐이랑 악시안이 올 테니까.”

“……네.”

“하이신스는 내가 꼭 구해줄 테니 걱정 말고. 머리가 있으면 하이신스는 저들도 무슨 수를 써서든 살려두려 할 테니. 응?”

클라인은 한 번 힘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풀고서 욕실로 들어갔다. 라틸은 그사이 다시 하인을 불러 음식을 죄다 치우게 했다.

방 안이 깨끗해지고도 20분쯤이 지나서야 클라인은 욕실 밖으로 나왔는데, 안에서 한 차례 울고 왔는지 눈 주위가 불그스름했다.

그래도 본인은 운 티가 나지 않는다 여기는 듯 그는 평소처럼 씩 웃고서 라틸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침대 가서 누우라니까.”

“폐하랑 잠시만 더 이렇게 있고 싶습니다. 그래야 안정이 될 거 같아요.”

클라인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라틸의 손을 잡아 왔다. 손가락 사이사이 그의 손가락이 들어왔고, 곧 단단한 힘이 라틸의 손을 아프지 않게 움켜쥐었다.

그 손길이 꼭 매달리는 것처럼 보여서 라틸은 깍지를 푸는 대신 손을 들어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내려놓았다.

라틸은 클라인이 어떤 느낌일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탈출해서 여기에 올 때는 상황이 너무 휙휙 변하니까 정신이 없어서 슬픈 마음도 여력도 없었을 거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좀 안정을 찾자 여러 가지 슬프고 힘든 감정이 한 번에 몰려온 거겠지.

라틸도 그랬다. 틀라와 경쟁할 때는 하루하루가 바쁜 데다 위태로웠기에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모든 게 끝난 후에야 라틸은 좀 슬픈 감정을 진득히 마주할 수 있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때의 라틸은 슬픔에 넋을 놓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단 거고, 클라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클라인의 눈꺼풀이 내려오는 듯해서 라틸은 천천히 그의 손에서 깍지를 풀고 어깨를 쓸며 속삭였다.


“클라인. 누워서 자. 얼른. 응?”

많이 피곤하긴 한지 클라인은 순순히 몸을 일으키며 반쯤 비몽사몽 한 채 중얼거렸다.


“그 둘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악시안이랑 바닐? 오고 있겠지. 바삐 오고 있을 거다. 아마 피곤할 거야. 둘이 오면 걔들도 좀 며칠 푹 쉬라 해.”

“아, 쉬라 해야지요. 해야 하는데. 그 둘 말고요. 다른 둘이요.”

“또 누구 올 사람 있어?”

“형님 근위기사랑…… 누군지 모르겠는 남자랑.”

“그 사람들이 여기 온다고?”

“아니요. 형님 근위기사. 좀비가 방을 막 돌아다닐 때요. 형님이랑 같이 있던 그 근위기사요.”

“아, 어어. 그래. 얼핏 기억난다, 나도.”

“형님 쓰러지고. 복귀를 원하는데도 안 시키고 있다 했거든요.”

“이런.”

라틸은 혀를 찼다. 다가 공작이 한 짓일까? 다가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 보고 나니, 그가 ‘너무 많은 것을 본 사람들’을 처리하기 위해 그 근위기사를 빼돌린 건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자가 제가 감옥에서 빠져나오게 도와줬습니다. 그 후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무사할 거다.”

라틸은 클라인을 침대에 앉혔다. 클라인은 스스로 꾸물꾸물 이불 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계속 말을 이었다.


“한 명이 더 있는데요…….”

“근위기사 둘?”

“아니요. 하얀 머리…… 근위기사 아니고…… 누군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감옥에 나타났습니다. 나타나서 도와주겠다고…….”

라틸은 ‘하얀 머리’란 말을 듣자마자 기르골을 떠올렸으나, 하얀 머리가 기르골만이 아니란 걸 알기에 그 생각은 얼른 지웠다. 여기서 지내는 기르골이 갑자기 거기서 나타날 리가 있나.

그 순간.


“!”

이불 안에 들어간 클라인이 갑자기 라틸의 어깨 너머를 쳐다보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덩달아 고개를 돌린 라틸은 자신의 등 뒤에 선 기르골을 발견하고 입을 벌렸다.


“너?”

클라인도 잠이 확 달아났는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면서 외쳤다.


“저자요!”

기르골은 방긋 웃고서 한 손을 흔들더니, 라틸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야 아가씨. 내가 도움을 줬어.”

“뭐?”

네가 어떻게 거기서? 라틸은 입을 뻐끔거리다 뒤를 보고, 클라인의 표정을 보았다. 클라인 역시 놀란 얼굴. 기르골의 주장이 맞는 게 분명했다.

라틸은 더욱 황당해졌다. 아니, 기르골이 왜 거기서 갑자기 클라인을 도왔단 거야? 아니, 대체 언제부터 카리센에 있던 건데?

당황한 라틸의 표정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던 기르골은 클라인에게 춤을 추듯 다가가더니 한쪽 팔을 그의 어깨에 얹고서 웃었다.


“도련님. 내가 도련님을 도왔다고 얼른 말해.”

라틸은 인상을 찌그러뜨렸다. 뭐야. 무슨 꿍꿍이야? 왜 저렇게 자기가 클라인을 도왔단 걸 강조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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