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잘 생각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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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화. 잘 생각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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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화. 잘 생각해 봐
2022.10.16.
타리움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카리센에서는 다가 공작이 깨어난 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앞두고 있었다.
깨어난 직후에는 틀라가 근처 무덤에서 시체를 구해와 다가 공작에게 주었고, 그걸 먹고 한숨 자고 일어난 다가 공작은 아낙차의 말처럼 훨씬 더 자연스럽게 말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니는 이걸 ‘제대로 된’ 식사라고 여기지 않았다.
공작 정도쯤 되는 인물은 사람과 함께 어울리는 일이 많다. 사교 생활도 많이 해야 하고 여럿이 식사하는 일도 많다. 아이니는 이걸 ‘제대로 된’ 식사라고 표현했다.
“식시귀는 일반적인 식사로는 영양소를 얻지 못해요, 황후 폐하.”
아낙차가 알려주었지만 아이니는 굳이 다가 공작의 측근들을 모아 놓고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항상 시체만 먹을 수는 없다. 시체를 먹고 살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음식 먹는 모습을 보여야 해. 설마……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
“먹는 게 불가능하진 않답니다. 염려 마시지요.”
다가 공작은 좀 멍한 상태로 보이긴 했으나, 아이니가 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부르자 딸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측근들을 모아 놨어요. 그 사람들 앞에서 수프만 조금이라도 마시고 들어가요, 아버지. 어차피 치료한 지 얼마 안 된 상태라 이것저것 다 먹을 필요도 없어요.”
“……그래…….”
다가 공작은 목을 감싼 붕대를 더듬으며 말했다.
그 붕대 아래에는 클라인에게 물어뜯긴 상처가 남아 있었는데, 아낙차는 시간이 지나면 그 상처가 겉으로는 사라질 거라고 했다.
“하지만 세게 누르거나 만지면 상처에서 다시 피가 나오니 조심해야 합니다.”
다가 공작이 계속 붕대를 만지작거리자 아이니는 아버지의 팔목을 잡고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또 피가 나요.”
식사 준비가 마치고 사람들이 다 모이자, 다가 공작은 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측근들은 치료가 잘 되었단 이야기만 들었지 다가 공작을 코빼기도 보지 못하고 있다가, 공작이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나오자 안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많이 걱정했습니다, 공작님.”
“혈색도 괜찮고. 다 나아가는 것 같아 안심입니다.”
“공작님께서 솜씨 좋은 의사들을 후원하고 계실 줄이야. 깜짝 놀랐지 뭡니까.”
측근들은 웃으면서 다가 공작에게 말을 걸어댔으나, 다가 공작은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이상한 냄새에 제대로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다가 공작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계속해 말을 걸던 측근들은 하나둘 입을 다물고 서로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가 아직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보군.”
아이니는 옆자리에서 상황을 살피다가 분위기가 이상해질 듯하자 얼른 끼어들어 그에게 스푼을 쥐여주었다.
다가 공작은 약속한 대로 몇 모금 수프를 마셨고, 측근들은 공작을 힐긋거리면서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자기들끼리 이야기했다.
대부분은 언제 수도로 돌아갈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갑자기 튀어나온 “웩!” 하는 소리에 측근들은 모두 조용해져서 다가 공작을 보았다.
다가 공작이 입에서 초록색 토사물을 뱉어내고 있었다.
“아버지!”
벌떡 일어난 아이니는 황급히 하녀에게 지시했다.
“안으로 모시고 들어가라!”
한 하인은 손수건을 가져와 공작의 입가에 대어주었고, 다른 하녀는 얼른 휠체어를 뒤로 빼서 식당 밖으로 옮겼다.
하지만 이 모습을 보고 식사를 계속하긴 어려운지라, 측근들은 황후의 눈치를 보며 하나둘 스푼을 내렸다.
상황이 진정되자 아이니는 아낙차를 찾아가 항의했다.
“음식을 먹을 수 있다더니! 왜 수프를 두 입 마시고 토하시느냐!”
“토했다고요?”
“그래. 초록색의 이상한 걸 토했다. 제대로 처리한 게 맞긴 맞느냐?”
아낙차와 틀라가 시선을 빠르게 주고받았다. 아이니의 우려가 맞았다. 뭔가 공작을 식시귀로 만드는 과정에서 이상이 생긴 게 분명했다.
아이니는 그 표정을 눈치채고서 눈을 부릅떴다.
아낙차는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살아 있는 분을 식시귀로 만들려다 보니, 좀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몸이 좋지 않으니 식사는 당분간 따로 한다 하세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제가 따로 찾아보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아이니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새로운 흑마법사를 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너무 오래 황궁을 비워두어서 슬슬 돌아가야 했다.
“황궁에는. 따라올 수 있느냐.”
“물론입니다.”
아낙차가 부드럽게 웃었으나 아이니는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
* * *
라틸은 기르골의 의도가 찜찜하게 여겨졌다. 다른 사람이 저런다면 그냥 그러려니, 할 텐데. 기르골은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뱀파이어다 보니 행동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게 여겨졌다.
“저 사람이 절 구해준 게 맞아요, 폐하.”
클라인은 난데없이 방 가운데 나타난 기르골이 영 떨떠름한 듯 표정을 구기긴 했으나, 기르골의 말을 수긍하긴 했다.
기르골이 다시 한번 라틸을 향해 미소짓자, 라틸은 일단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잘했어.”
기르골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일단 기분이 상한 눈치는 아니었다. 하긴. 이 와중에 기분이 상하면 진짜 미친놈이지. 물론 기르골은 미친놈이 맞지만.
라틸은 어색하게 웃고서 그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고 나서 아주 기묘하고 이상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클라인은 침대에 앉아 있긴 했으나 잠들지 못했고, 기르골은 라틸과 클라인 사사이에서 웃는 얼굴을 한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서 있었다.
클라인은 계속 기르골과 라틸 사이에서 눈동자를 정처 없이 굴렸고, 기르골은 미소를 짓고는 있으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라틸은 할 말이 이쪽에도 많고 저쪽에도 많았으나, 셋이 있는 자리에서 할 말은 딱히 없어서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그러기를 15분 정도.
카리센에서 고생하며 좀 길어진 듯한 클라인의 인내심이 다 닳아 가는 게 그의 떨리는 눈꺼풀로 나타나자, 라틸은 일부러 소리를 내어 “클라인?” 하고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는 그의 어깨를 눌러 침대에 눕게 한 다음 가슴을 팡팡팡 세 번 정도 두드리며 말했다.
“얼른 쉬어라. 고생 많이 했지? 내일 또 올게. 푹 자. 잘 자.”
“폐하, 저자-.”
“잘 자.”
그의 입술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클라인이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힘없이 스르륵 떨어져서는 부루퉁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라틸은 그의 팔을 두어 번 주무르다가 기르골에게 따라 나오란 눈짓을 하고서 밖으로 나갔다.
기르골은 나타날 때와 달리 가벼운 걸음걸이로 라틸을 따라나섰다.
하지만 그 가벼운 걸음걸이는 함정이었다.
요란스럽게도 따라오는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걷다가 주위에 아무도 없는 정원에 들어갔을 무렵, 라틸이 휙 뒤돌아보니 기르골의 표정이 무척이나 무서웠던 것이다.
라틸이 우뚝 멈춰 서자 기르골은 같이 멈춰 서서 라틸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또 표정이 그러냐고 항의하려다가, 라틸은 다시 한 번 더 칭찬했다.
“클라인을 구해줘서 고마워.”
기르골의 입꼬리 양옆이 완벽하게 대칭을 그리며 올라갔다. 여전히 눈빛은 오싹했지만, 그래도 웃고 있으니 조금 무서운 분위기가 덜해졌다.
라틸은 대체 그의 감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길이 없어 갑갑해졌다. 갑자기 나타나 자랑질을 할 때는 언제고. 이번엔 왜 또 기분이 상했을까.
그때 기르골이 라틸의 목덜미 옆을 잡았다. 라틸은 차가운 손이 닿자 몸을 움찔했다. 기르골은 라틸의 목 옆을 건조하게 쓸면서 중얼거렸다.
“난 아무나 도와주고 구해주고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아가씨.”
“사람도 아니잖아.”
“물론 사람도 아니지.”
기르골이 갑자기 픽 웃자 그의 분위기가 한층 더 풀어졌다. 라틸은 그의 생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커녕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조차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기르골은 갑갑한지 목을 죄는 넥타이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걸 한 손으로 쥐어뜯듯 반쯤 헝클어뜨렸다. 그 과정에서 그의 창백한 피부가 잠시 드러났다 감추어지길 반복했다.
마침내 온전히 숨을 쉴 수 있다는 듯 기르골은 손을 떼더니 다시 라틸을 내려다보았다. 라틸은 그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움직이는 걸 보았다.
뱀파이어도 숨을 쉬고 침을 삼키나? 꼭 그렇게 보였다.
한참 만에야 기르골은 방긋 웃더니 장난스럽게 온순한 분위기로 돌아와 옆에 핀 봄꽃을 뜯어 씹었다.
라틸은 문득 저 꽃을 씹어 먹는 행위가 기르골에게 일종의 의식 같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자제하는 의식.
봄꽃 몇 개를 뜯어 먹은 기르골은 곧 히죽 웃더니 허리를 숙여 라틸과 눈을 맞추고서, 아까와 완전히 달라진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알아, 아가씨? 나 아가씨가 검 뽑는 걸 봤다?”
라틸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카리센에 왔었어?”
기르골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내가 카리센 황자를 구한 곳이 카리센이었어, 아가씨.”
라틸은 입술을 씹으며 인상을 구겼다. 자신이 검 뽑는 걸 보았단 건 라나문과 아이니가 뽑는 것도 보았단 건데. 물론 아이니에겐 아예 검을 주고 오기까지 했으니 일전에 봤겠지만.
라나문이 검 뽑는 걸 봤다는 건…… 라틸은 초조한 기분에 계속 콧잔등을 찌푸렸다 펴기를 반복했다.
라나문이 대적자 일에 관심을 끊도록 유도하기 전에 기르골이 그에게 다가가 대적자가 되자고 설득하면 어쩌지? 아이니에게서는 뚝 떨어뜨려 두었지만, 라나문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데?
그러다 라틸은 기르골이 아주 만족스럽게 웃고 있단 걸 알아차렸다. 라틸은 조금 화가 났다. 사람을 심란하게 만들 말을 던져 놓고서는, 본인은 그걸 보며 즐거워하다니.
그 덕인지 클라인의 방에서 나올 때의 그 서늘한 분위기는 다 풀려 있었으나, 이번에는 라틸이 화가 나서 그의 양어깨를 꽉 잡고 요구했다.
“몇 사람이 검을 뽑든 상관하지 마. 나만 보고 있어. 약속했잖아.”
“약속 내용이 점점 바뀌는데?”
“무슨 상관이야.”
“큰 상관이 있지.”
라틸이 그의 어깨를 계속 잡고 뚫어져라 쳐다보자, 기르골이 레몬향을 풍기는 독처럼 웃으며 물었다.
“내가 아가씨만 보면? 그게 나한테 뭐가 좋지?”
미쳤는데 계산적이기까지 하다니. 라틸은 속으로 욕을 뱉으며 물었다.
“뭐가 좋길 바라는데?”
“아가씨는 우리 가문 검을 뽑았어.”
“뭐?”
“그 검을 뽑은 사람하고 나는 결혼해야 해.”
기르골이 이미 사기라 들통난 지 오래인 ‘대적자의 검’에 대한 첫 사기를 다시 치려 시도하자 라틸은 인상을 구겼다.
설마 그새 까먹고 또 같은 사기를 치려는 건 아닐 테고.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기르골이 라틸의 코끝에 자신의 코끝을 가볍게 문지르며 놀렸다.
“난 대적자의 검을 뽑은 사람과 결혼해야 해, 아가씨. 내 말 못 알아듣겠어?”
“……라나문과 결혼하고 싶단 거야?”
라틸이 떨떠름하게 묻자 기르골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들어갔다.
“농담이야.”
라틸은 얼른 정정했으나 기르골의 얼굴에서는 장난기가 사라져 있었다.
기르골은 한 팔을 들어 라틸의 입술을 소매로 쓱 건성으로 닦고서 웃었다.
“내가 다른 데 한눈 안 팔게 하려면 뭘 해야 하나, 잘 고민해 봐. 우리 제자님은 황제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