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난 무섭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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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화. 난 무섭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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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화. 난 무섭지 않아
2022.10.30.
다시 장면이 바뀌었을 때. 도미스는 빨래를 널고 있었다.
비 내리던 하늘은 이젠 티 없이 맑았고, 하얀 구름들이 양처럼 하늘을 기어다녔다.
하얀 빨래가 바람을 받아 펄럭거리는 사이에서, 도미스는 막 빨아 좋은 향을 내는 빨래들을 팡팡 털어 빨랫줄에 널고 날아가지 않게 잘 고정시켰다.
기르골은 그 뒤에서 열심히 변명하는 중이었다.
“그 여자가 아가씨한테 소중한 사람인 걸 몰랐어, 아가씨. 제발 화 좀 풀어봐. 응?”
“…….”
“대체 어떻게 해야 화를 풀 거야?”
도미스는 아무 말 없이 팡팡 빨래만 털어댔다.
그러고 있자니 이번에는 건너편 빨래 너머에서 칼라인이 보였다 사라졌다 반복했다.
그가 온몸으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빨래터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도미스가 빨래 터는 걸 멈추고 째려보자, 칼라인은 주춤주춤 다가오더니 그 빨래를 자기가 받아들려 했다.
“내가 하지.”
도미스는 이번에도 확 돌아섰다.
기르골이 수사관 안야가 죽어갈 때 동생 안야와 웃으면서 키득거리던 일 때문에 상대적으로 칼라인에 대한 분노는 줄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다리가 부러진 자신 앞에서 동생 안야를 두둔한 일이 잊혀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도미스는 헷갈렸다.
[칼라인은 대체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그가 잘해준 적이 없던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을 구해주었고, 그 별장에서 함께 있어 주기도 했다. 랑스터 백작가에서 다른 하녀와 하인들에게 죽을 뻔했을 때도 그가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꿍꿍이가 있을 거야.]
칼라인이 자신에게 대놓고 피해를 준 적은 없으나, 도미스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를 남몰래 가슴에 담아두고 신경 썼기에, 그가 다리가 부러진 자신 앞에서 안야를 두둔한 일이 마음에 남아 응어리졌다.
속이 좁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자신의 마음이었으니까.
그런데 늘 동생 안야와 붙어 다니던 이가 갑자기 자신을 저렇게 온몸으로 신경 쓰는 티를 내자, 좋기보다는 의심스러웠다.
[하려다가 멈춘 말은 또 뭘까.]
라틸은 도미스가 아주 잠시 ‘혹시 내가 대공의 후계자’까지 떠올렸으나, 곧 말도 안 된다고 부정하는 걸 느꼈다.
제대로 생각이 되지도 못하고 스치듯 지나 가버린 생각만으로도 도미스는 부끄럽고 민망한지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렇게 계속 무시를 해대자 결국 기르골은 주저하다 돌아갔고, 칼라인은 근처에 오지도 못하고 먼발치서 맴돌기 시작했다.
도미스는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빨래를 널고서 빈 바구니를 챙겨 돌아섰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서 이번에는 그들 이상으로 싫은 동생 안야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동생 안야는 표정이 서늘한 것이, 딱 보기에도 전투 의지가 풍성해 보여서 도미스는 얼른 바구니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동생 안야는 도미스가 달아날 것 같자 소리를 내서 그녀를 불렀다.
“멈춰 도미스.”
도미스는 우뚝 멈춰 서서 한숨을 내쉬고 돌아보았다.
“왜.”
도미스가 묻자, 안야는 가까이 오더니, 도미스를 무섭게 쳐다보며 물었다.
“아버지 어떻게 했어?”
“뭐가.”
“내 아버지. 어떻게 했냐고!”
“!”
자신이 죽인 건 아니지만 자신과 관련이 있는 건 맞기에, 도미스는 아주 살짝 움찔했다.
동생 안야는 의외로 상대를 관찰하는 능력이 대단한지, 그걸 보자 눈이 흉흉해져서 달려와 도미스의 어깨를 꽉 잡아챘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힘에 들고 있던 바구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놔.”
동생 안야도 악력이 센 편이었지만, 도미스는 동생 안야를 바로 뿌리쳤다.
“똑똑히 말해. 아버지 어딨어? 아버지 어디 있느냐고!”
그래도 동생 안야는 여전히 흉흉한 태도였다.
“왜 가만히 일하는 사람한테 와서 난리야? 네 아빠가 사라졌으면 사람들한테 묻고 다녀. 다른 사람들한테. 나는 너도 네 아빠도 싫어서 꼴도 보기 싫으니까!”
도미스도 지지 않고 외쳤으나, 동생 안야는 코웃음을 칠뿐 넘어가지 않았다.
“아빠가 널 보러 간다고 나섰다가 사라졌어. 이렇게 며칠씩 말도 없이 안 올 분이 아니야. 너지? 네가 뭔 짓을 한 거지?”
“아니라 했잖아! 너나 네 아빠나 왜 늘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와서 시비인데!”
“넌 랑스터 백작가에서도 사람을 죽였잖아. 너 때문에 죄 없는 하녀 하나도 죽었고.”
“!”
동생 안야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혐오감으로 가득해졌다.
“네가 만약 아버지를 죽인 거라면…… 넌 정말 쓰레기야. 널 언니라 인정하지도 않았지만. 너 같은 걸 양녀로 한때나마 거둔 부모를 죽인 쓰레기라고, 넌.”
라틸은 도미스가 ‘그건 기르골이 죽였다’라고 말할 줄 알았으나, 의외로 도미스는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눈에 힘을 줘서 동생 안야를 같이 노려볼 뿐.
그때. 칼라인이 성큼성큼 다가왔고, 도미스는 ‘그러면 그렇지’ 하고 생각하면서 허리를 굽혀 바구니를 도로 주웠다.
동생 안야는 “칼라인 씨.” 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그를 부르면서 명령했다.
“저 여자. 역시 수상해요. 저 여자가 아버지를 어떻게 한 건지도 몰라요. 칼라인 씨가 잘 조사해 봐요. 그래서 저 여자가 관련되어 있다면 제대로 전하께 말씀드려야겠어요.”
도미스는 그들을 무시하고 바구니를 챙겨 돌아섰다.
“도미스가 아니야, 안야.”
그러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도미스를 두둔하고 있었다. 도미스는 멈춰서서 고개를 돌렸다. 칼라인이 동생 안야 앞에 서 있었다.
동생 안야는 인상을 구기고 “뭐?” 하고 되물었다. 곧 그녀는 황당하단 투로 재차 말했다.
“칼라인. 내가 저 애가 범인이라고 했나요? 저 애일 수도 있으니 조사를 해보라 한 거잖아요.”
“도미스는 아니야.”
그러나 칼라인은 다시 한번 말하더니, 도미스 쪽을 돌아보았다. 도미스는 황급히 돌아서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칼라인이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도미스가 든 바구니를 들면서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같이 가지.”
도미스도 놀랐고 동생 안야도 놀랐다.
동생 안야는 늘 자신을 편들던 칼라인이 자신을 앞에 두고 도미스에게 가서 별로 무겁지도 않을 빈 바구니를 드는 데에 놀랐고, 도미스는 도미스대로 칼라인이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표정이 이상해졌다.
도미스는 여전히 칼라인을 불신했기에 ‘됐어요’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손을 뻗으려다가 도미스는 안야의 표정을 보고 말았다. 당황한 표정. 처음으로 보는 의붓동생의 당황한 표정. 무언가를 처음으로 빼앗기고 나온 표정.
그걸 보는 순간. 도미스 내면의 나쁜 마음이 쾌감에 웃음을 터트렸다. 라틸은 도미스가 여러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는 바람에 뭐라고 생각하는지 듣지 못했으나, 그 생각이 아주 밝고 희열에 들떠 있다는 건 알아차렸다.
도미스는 칼라인이 자신을 도왔다는 점도 그렇지만, 의붓동생의 멍한 표정에 더욱 기쁜 듯했다.
한편으로는 그런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으나, 곧 계단에서 떨어지던 수사관 안야의 모습이 드러나며 그 죄책감을 뻥 걷어찼다.
도미스는 칼라인에게 바구니를 달라고 하는 대신 그의 팔을 꽉 붙잡고 말했다.
“가, 가요.”
그 목소리는 양의 울음소리처럼 떨리고 있었으나, 동생 안야는 그것만으로도 더욱 큰 충격을 받았는지 비틀했다.
칼라인은 잠시 그쪽을 돌아보았으나, 도미스를 따라갔다.
* * *
장면이 또 바뀌었다.
칼라인도 기르골도 없는 곳.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수사관 안야의 침대 머리맡에 앉은 도미스가 그녀의 손을 자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점점 나빠지는 거 같아요, 안야 씨.”
“…….”
“처음으로 동생한테서 뭘 뺏어온 느낌이 났어요. 늘 뺏기기만 하다가. 그게 좋았어요. 이러면 안 되는 건데.”
그러고 있자니 다시 문소리가 났다. 도미스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으나 노크한 사람은 슬그머니 문을 열고 머리만 들이밀었다.
“아가씨.”
기르골이었다. 도미스는 그일 줄 알았던지 그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꽉 입술을 깨물고 안야의 손만 잡았다.
기르골은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고서 재차 말을 걸었다.
“아가씨. 내가 어떻게 해야 화를 풀겠어?”
마침 도미스는 자신이 좀 나빠지는 것 같다고 죄책감을 느끼던 터라, 이번에는 기르골을 완전히 무시하지 못하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꼭 화를 풀 필요 없잖아요. 이대로 떠나면 기르골 씨랑 나는 평생 안 보고 살 사람들인데.”
“그래도 난 아가씨 화를 꼭 풀어주고 싶어.”
“…….”
“우리 친구였잖아, 아가씨. 내가 아가씨의 유일한 친구였잖아.”
“!”
‘난처하겠네.’
라틸은 혀를 찼다. 힘들 때 유일하게 손을 건네준 친구가, 유일하게 같이 살자고, 가족이 되어주겠다고 나선 가족 같은 사람이 죽어가는 걸 보면서 웃어댔으니. 도미스도 참 난감하겠다 싶었다.
결국 도미스는 주저하다가 한결 약해진 소리를 했다.
“그럼 시간이 답이에요.”
“시간?”
“지금은 기르골 씨 볼 때마다, 그쪽이 안야 씨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안야랑 웃으며 놀던 것만 생각나요. 그러니 제발 오지 말아줘요. 시간 좀. 시간 좀 주세요.”
“언제까지?”
도미스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대답했다.
“안야 씨가 깨어날 때까지요.”
도미스의 머릿속에 기르골이 연회장에서 자신을 구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동료 하녀가 비명을 질렀지만, 기르골은 그녀만 챙겨 빠져나왔고, 이후 도미스는 동료를 혼자 두고 도망친 사람이 되어버렸다.
문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도미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기르골 씨가 친절한 사람인지 잔인한 사람인지 모르겠어.]
* * *
그 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으나, 다시 장면이 바뀌었을 때. 도미스는 자신의 방에 있었고, 그 앞에는 휠체어에 꽁꽁 묶인 양모가 있었다.
양모는 두려움에 차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기르골은 그 뒤에 휠체어 손잡이를 잡은 채 웃으며 도미스에게 자랑했다.
“아가씨, 이건 어때? 아가씨한테 엄마를 줄게.”
도미스는 눈을 커다랗게 떴으나 기르골은 더 활짝 웃으며 자랑하듯 말했다.
“이번엔 살아 있어. 살아 있는 엄마는 좋지?”
‘아이고오…… 기르골아 기르골아. 그냥 꽃이나 뜯어 먹지.’
라틸은 속으로 ‘아이고 등신아 등신아’ 하며 혀를 찼으나, 도미스는 기르골이 가족 중 유일하게 애정을 둔 양모를 납치해 와서 좋다고 웃고 있자 혈압이 한 번에 치솟았다.
기르골이 양모의 입을 막은 재갈을 빼주자, 양모는 ‘이번엔 살아 있어’란 말을 듣고는 대번에 양부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채고 이를 갈며 소리쳤다.
“네 아빠 말이 맞았다. 넌 저주를 몰고 다니는 존재야! 내 남편을 어떻게 한 거야? 죽여서 어디로 보낸 거냐고!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양모의 말에 도미스가 뚝뚝 눈물을 흘리자, 기르골은 이를 갈며 양모를 내려다보았다.
딱 봐도 죽이려는 태세였고, 이번에는 도미스도 그걸 알아차리고 외쳤다.
“그만! 그만하고 보내줘요!”
“하지만 아가씨. 네가 울잖아.”
“그만하고 제발 좀!”
도미스가 버럭 외치자, 기르골은 결국 손가락만으로 양모를 묶은 끈을 끊어냈다. 양모는 휠체어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화가 난 듯 휠체어를 벽에 집어 던지고서 황급히 달아났다.
그녀가 “안야!” 하고 외치며 뛰어가자, 도미스는 쪼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기르골은 주저하다가 도미스의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팔을 뻗었으나, 도미스는 그걸 알자 뒤로 황급히 물러났다.
그녀의 눈동자가 눈물과 두려움에 뒤섞여 흔들리는 바람에, 라틸은 기르골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뿌연 눈물 너머로 기르골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기르골 씨는, 기르골 씨는 무서워요. 제정신이 아닌 거 같아.”
“우리 친구 하기로 했잖아, 아가씨.”
“가주세요. 제발 좀 가주세요.”
기르골이 팔을 뻗다가 주저하며 내리는 게 보였다.
여전히 눈앞은 뿌연 눈물로 가득 차서 기르골을 볼 수 없었다.
“난 무섭지 않아.”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났고, 곧 눈 깜짝할 사이 그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도미스는 무릎을 끌어안고서 계속해 훌쩍였다.
그때, 반쯤 열린 눈 너머로 누군가 황급히 들어오며 외쳤다.
“도미스! 안야가 깨어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