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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화. 폐하는 관련이 없을 거다 (281/367)


281화. 폐하는 관련이 없을 거다
2022.11.06.


동생 안야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라틸은 도미스의 머릿속에서 그 어떤 생각도 읽어낼 수 없었다.

도미스의 지금 머릿속은 까맣기만 할 뿐. 어떤 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 라틸은 아까 병사가 던져지며 한 차례 깨지고, 주위가 폭발하며 붙어 있던 유리가 다 사라진 커다란 창틀 너머로 달려오는 양모를 보았다.

창문과 벽이 날아가 테라스의 상황을 뒤늦게 보게 된 사람들 틈에는 기르골과 칼라인도 있었다.


“역시 넌 괴물이었어.”

남들은 다 제자리에 서 있지도 못하는데. 동생 안야는 겁을 먹은 와중에도 꿋꿋하게 도미스를 욕했다.

도미스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표정에 변화조차 없었다.

천천히 동생 안야를 향해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도미스는 손을 움직이지 않았으나, 갑자기 동생 안야는 안구가 붉어지더니 기침하기 시작했다.


“너…….”

동생 안야가 자기 목을 붙잡고 발을 버둥거렸다.

보이지 않은 거대한 손이 그녀의 목을 잡고 들어 올리는 듯 동생 안야의 몸이 조금씩 위로 떠 올랐다.


“그러지 마 도미스!”

그때. 까맣게 변한 도미스의 의식을 뚫고 누군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내 동생 안야만을 쳐다보던 도미스가 힐긋 눈동자를 돌렸다.

아까 다급히 뛰어오던 양모였다.

양모는 친딸과 도미스 사이에서 우물거리더니, 도미스에게 다가와 울면서 애원했다.


“내가 이제 너랑 같이 있을게. 내가 안야 말고 네 엄마 해줄게. 그러니까 제발. 제발 우리 안야 좀 놔줘. 응?”

“…….”

“네 동생이잖아, 도미스. 네가 업고 다니고 안고 다니던 네 동생이잖아. 울다가도 너만 보면 좋아서 울음 그치던 네 동생이잖아. 기억 안 나니? 응?”

양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양모는 자신이 동생 안야에게 다가가면 도미스가 질투심에 자기 딸을 진짜 죽여버릴까 봐 그쪽으론 가지도 못했다.

그러나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이며 끊어질락 말락 하는 목소리는 그녀의 마음이 보듬고 있는 게 누구인지 명확히 알려주고 있었다.

도미스의 입꼬리가 올라가자 양모는 억지로 그녀를 따라 웃었다.


“엄마는. 안야 엄마구나.”

하지만 미소 너머로 도미스가 뱉은 말은 서늘하고, 허망했다.

양모의 표정이 굳었다.

허공에 들렸던 동생 안야가 바닥으로 떨어져 털썩 소리를 냈다.

양모가 동생 안야와 도미스를 번갈아 보았다.

라틸은 양모의 얼굴에 죄책감이 드리워진 걸 보았다.

어쨌건 양모는 남편이 도미스를 죽이려 도끼를 들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도미스를 감쌀 정도로는 그녀를 사랑했다.

단지 그 이상으로 친딸을 더 사랑했을 뿐.


“도미스. 엄마는…….”

도미스가 커다란 눈을 반쯤 감자, 양모는 결국 입술을 깨물고 돌아섰다.

그녀는 동생 안야를 부축해 끌어안고서 감싸듯 자신의 몸으로 덮었다.

동생 안야를 죽이려면 자신도 죽이라는 노골적인 표시였다.

라틸은 까맣게 변한 도미스의 마음속 너머에서 희미한 비명을 들었다.

도미스는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 엄마의 등과 그 아래로 삐죽 드러난 의붓동생의 이마를 보았다.

도미스는 그 광경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제 검은 안개는 연회장 안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도망갈 사람들은 다 도망갔고, 도미스를 거칠게 대하던 병사들과 왕은 폭발에 휩쓸려 날아가 기절한 건지 죽은 건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때. 도미스에게 검을 가르쳐주던 그 ‘믹스’란 남자가 도미스에게 손을 뻗었다.


“도미스.”

도미스가 그를 보자, 남자는 두려운 듯 손을 떨면서도 도미스를 향한 손을 떨어뜨리지 않고 말했다.


“병사들이 다 몰려오면 빠져나가기 힘들어. 이쪽으로 가자. 내가 지름길을 안다.”

“…….”

도미스는 수사관 안야를 안고서 그 손을 따라 걸었다.

믹스를 믿는 건 아니었다. 그가 배신하더라도 타격이 없단 걸 알기에 따를 뿐.

그 뒤를 칼라인과 기르골이 따라왔다.

그러다 문득 갑자기 도미스가 멈춰 서더니 기르골 쪽을 휙 쳐다보았다.

차가운 시선을 받자 기르골은 움찔하다 물었다.


“난…… 갈까? 따라가지 말까?”

  

 

* * *

라틸은 천장을 보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잠시 뒤. 라틸은 자신이 꿈에서 깨어난 걸 알고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여기서 깨다니!’

기르골이 따라간 건지 따라가지 못한 건지를 확인하지 못했다.

물론 기르골이 최종적으로는 대적자 편에 붙으니, 이번에 따라가더라도 나중에는 틀어지겠지만. 그래도!

다시 자기 위해 라틸은 도로 누워 이불을 덮었다.


“…….”

하지만 이미 깨어버려서 더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결국 상체를 도로 일으켰다.

그 상태로 멍하게 있으려니, 뒤가 궁금한 순간에 잠에서 깨어버린 탓에 제때 밀려들지 못했던 오싹함이 느껴졌다.

팔에 소름이 돋으면서 솜털이 죄다 일어섰다. 라틸은 팔을 손으로 삭삭 비비면서 치를 떨었다.

온몸에 어둠이 확 들어차던 그 감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실제로 핏줄이 까맣게 변했는진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혈관이 엄청난 속도로 다 검게 변하면서 온몸이 어둠으로 가득 차오르는 느낌.


‘게다가 성격이 좀 변하는 거 같던데.’

라틸은 괜히 이불을 움켜잡고 손안에서 문질렀다.

각성이란 걸 하면 자신도 그렇게 변하는 걸까?

게다가 각성 전의 그 상황. 궁지의 궁지의 궁지까지 몰리던 그…… 괴로움.

눈앞에서 죽음을 맞이한 수사관 안야와 그 피를 보았을 때의 충동과 폭발적인 상실감.


‘각성 조건이 소중한 사람이 죽고, 그 사람을 뱀파이어로 만드는 건가?’

이전에 얼핏 떠올랐던 그 환상이 기억난다.

라틸은 이불을 놓고 자기의 두 팔을 감쌌다. 그런 게 각성이라면…… 자신은 절대로 겪고 싶지 않았다.


‘내 사람들을 잘 지켜야 해.’

‘내 사람들’의 카테고리에 들어갈 만한 이들을 떠올린 라틸은 안도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도미스보다 자신은 환경이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이들 역시도 자체적으로 수많은 호위와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가지고 있었다.

칼라인과 서넛은 이미 뱀파이어였고, 라나문은 대적자이니 적들이 라나문을 지키면 지켰지 죽이진 않을 테니 제외.

대신관은 강하기도 하지만 웬만한 상처는 입고서도 혼자 치료한다. 심지어 그 주위로 성기사단까지 있으니 제외.

게스타는 연약하고 가냘파 보이지만, 기르골과 칼라인의 싸움을 막아설 때 보여준 솜씨로 보아 쉽게 죽은 사람은 아니니 제외.

타시르 역시 본인의 실력은 물론 수족 같은 암살자 부하들까지 다 갖춘 뛰어난 실력자이니 안전할 테고.

하이신스는…….


‘이미 쓰러져 있지. 하지만 아이니가 황후 자리에 머물려면 하이신스가 살아 있어야 하니 죽이진 않을 거야.’

그러면 또 누구? 누가 있지?

레안? 아, 레안이 죽으면 슬프겠지만 각성할 정도로 상실감이 크진 않을 거다.


‘엄마!’

라틸은 신전에서 지내고 있을 엄마를 떠올렸다.

라틸은 엄마를 사랑했다. 너무나.

엄마는 위엄 있고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었지만 검술 같은 걸 배우진 않았다.

라틸은 초조해져서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라도 적들이 엄마를 헤치려 들면 어쩌지? 인질로 삼는다거나 그러면서?


‘그쪽으로 호위를 늘려 보내거나 엄마를 이쪽으로 데려와야겠어.’

그런데 한참 라틸이 방 안을 빙글빙글 돌면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딸랑딸랑 종을 흔드는 소리가 나더니, 응접실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대신관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대신관이? 이 시간에? 라틸은 시계를 보았다. 새벽 다섯 시였다.

하지만 아직 하늘 밖은 어두웠고, 구름 저 너머에만 연한 주홍빛이 보일 정도였다.


“들어오라 해라.”

라틸이 허락하자 잠시 뒤 문이 열리고 대신관이 들어왔다.

머리부터 들어온 대신관은 라틸이 바로 보이지 않자 고개를 돌리다가, 문 뒤 소파 등받이에 앉은 라틸을 발견하고는 얼른 문을 닫으며 물었다.


“그러면 의자가 뒤집어지지 않을까요, 폐하?”

“적당히 균형 있게 앉아 있으니 괜찮아.”

라틸은 방긋 웃고서 물었다.


“그대는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왔어?”

대신관은 주저하다가 털어놓았다.


“새벽 운동을 하려고 일찍 일어났는데, 막 연무장을 뛰려고 보니 이쪽 부근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라틸은 미간을 찌푸렸다. 불길한 기운?


“또?”

생각해보니 전에도 비슷한 이유를 들며 대신관이 온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또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왔다고 하자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러고 보니 전에 자이신이 왔을 때도 평소보다 좀 더 그런…… 난폭하고…… 힘이 발휘되는 꿈을 꿨던 거 같은데.’

라틸은 얼른 소파에서 벌떡 내려서서 자신의 표정을 대신관이 보지 못하도록 그의 뒤로 가 섰다.

두 팔을 그의 허리에 두르고 등에 뺨을 대자 대신관이 움찔하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내가 걱정되어서 왔느냐?”

라틸이 일부러 기분 좋은 듯 말하자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등이 덩달아 흔들렸다.


“네. 바로 달려왔습니다.”

라틸은 그의 등에 뺨을 문질렀으나 속은 긴장감에 두근두근 뛰었다.

도미스가 로드로서의 능력을 쓸 때마다 대신관이 불길하다고 뛰어오다니. 이거 괜찮은 건가?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불길하다고 반응해서 달려올 정도면…….


‘만에 하나라도 내가 각성하게 된다면, 자이신은 로드 옆에 안 있을지도 모르겠다.’

“폐하?”

라틸이 우뚝 멈춰 서자 대신관이 걱정스럽게 라틸을 불렀다.


“아아. 네 등이 포근해서 잠깐 잠들었나.”

라틸이 둘러대자, 대신관이 자신의 허리를 감싼 라틸의 팔 위에 자신의 팔을 겹치며 중얼거렸다.


“역시 정화 작업을 빨리하는 게 낫겠습니다, 폐하. 카리센에서 일어난 일도 그렇고요.”

“……그래. 하지만 손님들이 돌아가면 하자.”

“네.”

“아, 그리고 자이신. 하이신스 황제를 치료하러 네가 직접 가진 못할 거 같다. 카리센에서 하이신스 황제를 보내지도 않을 거 같고. 사정은 들었지?”

“네. 백화에게 들었습니다.”

라틸은 대신관에게서 팔을 떼고 그의 등을 토닥토닥 쓸었다.


“신성력을 알약이나 물약 형태로 만들 수 있을지 연구해봐. 그 정도라면 몰래 카리센에 가서 약을 먹이고 올 수도 있으니까.”

 

* * *

황제와 대화를 나누고 아침 일곱 시쯤 밖으로 나온 대신관은 복도를 걸어가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굳게 닫힌 방문과 그 아래로 쭉 펼쳐진 화려한 대리석 길을 본 대신관은, 전에도 황제의 방 부근에서 불길한 기운을 느꼈던 걸 떠올렸다.

황제가 ‘사악한 존재를 감지하는 돌’을 쥐었을 때, 돌이 색은 변하지 않았으나 잘게 부서진 일도.


‘괜찮은가.’

혓바닥에서부터 슬그머니 불안한 마음과 긴장이 올라와 목 안을 꽉 채웠다.

한참을 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이 열리면서 황제가 밖으로 나온다.

그러다가 대신관과 눈이 마주치자, 황제가 잠시 놀란 표정을 하더니 활짝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대신관은 덩달아 따라 웃다가 황급히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폐하는 대적자의 검도 뽑았고. 내 치료도 아무렇지 않게 받으시지. 폐하는 그 불길한 기운과 관련 있진 않을 거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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