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무언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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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화. 무언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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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화. 무언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2023.01.11.
한편 그리핀은 게스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열심히 비행하는 중이었다. 카리센까지 날아가 다가 공작이 식시귀가 되었는지 아닌지 확인하라는 그 부탁 말이다.
[감히 이 몸에게 부탁을 하다니! 고얀! 고얀!]
그리핀은 씩씩대면서도 일단 시키는 건 다 하기로 했다.
로드의 심복들 중 자신처럼 우아하고 멋진 날개를 가진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이렇듯 빼어난 날개를 지닌 자신이 번거로워도 일을 좀 해줄 수밖에.
[여기인가.]
마침내 그리핀의 눈에 타리움의 황성과는 다른 분위기로 화려하고 커다란 궁전에 들어왔다. 카리센 수도에 있는 궁전이었다.
그리핀은 그 위를 한 바퀴 빙글빙글 날다가 모습을 감추고 창문에 내려앉았다.
창문에 앉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니, 인간들이 복도를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대고 있었다.
그리핀은 위치를 바꾸어 옆 창문으로 가보았다.
커다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몇몇 이들이 피로한 얼굴로 일을 하고 있다.
그리핀은 다시 이동했다.
그렇게 몇 번을 이동하다 보니, 마침내 제법 신분이 높아 보이는 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핀은 창문에 납작 얼굴을 가져다 대고서 눈에 힘을 주었다.
* * *
대신관을 찾아가 신성력을 알약이나 물약 형태로 만드는 연구가 성과가 있나 확인해본 뒤.
라틸은 심호흡을 한 다음 시종장을 불러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사블레 후작. 내가 후궁을…… 딱 한 명만 더 들이고 싶은데.”
시종장은 웃는 얼굴로 라틸을 보다가, 후궁을 하나 더 들이고 싶다는 말에 표정이 찰나 굳었다. 빠르게 표정 관리를 했으나 이미 라틸은 스쳐 지나간 그 표정을 본 후였다.
라틸은 억울해졌다. 이번엔 내가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닌데! 아니, 따지고 보면 므라딤도 그냥 자기들이 온 거였고, 대신관도 그를 보호하기 위해 받아준 거였다.
그런데 왜…… 왜 이렇게 이미지가 호색해지고 있는 걸까. 뭐 남들이 호색한이라고 떠들어대도 신경 쓰진 않지만.
그래도 어릴 때부터 자신을 보아온 사블레 후작이 저렇게 심란한 눈으로 바라보자 괜히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문제는 억울한 마음을 절대로 항의할 수 없단 점이었다. 기르골이 수천년 이상을 살아온 미친 뱀파이어이자 대적자의 스승인데, 자신은 로드라서 살기 위해 받아들인단 변명을 누구에게 한단 말인가.
이따 칼라인한테 해야지.
시종장은 입을 우물거리다가 곧 따뜻하게 미소지었다.
“그럼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데려가셔야지요.”
저 자애로운 미소가 사람을 더욱 들썩이게 한다. 라틸은 목까지 붉어져서 펜을 쥐고 몸을 책상 쪽으로 향한 다음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옆에서 짧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라틸이 쳐다보자, 시종장이 얼른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한 명을 더 들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 폐하께서 기존의 후궁들도 잘 찾지 않으시는 게 생각나서요.”
“음.”
“기존 후궁들을 하루하루 알차게 보듬으신다면 스무 명, 아니 백 명을 들이셔도 무슨 상관이겠습니다. 하지만 폐하는 후궁들과 식사만 하실 뿐 그리 찾지도 않으시니…….”
“으음. 아니, 백 명까지는 채우지 않을 겁니다. 아, 스무 명도 안 채울 겁니다. 그리고 다른 후궁들도 잘 챙겨야지요, 당연히.”
그래도 기르골은 들여야 한다. 기르골을 들이는 건 선택지를 위장하고 있지만 필수였다. 하나뿐인 선택지니까.
라틸이 입술을 달싹이며 민망해하자, 시종장은 얼른 밝게 물었다.
“그러면 이번에 폐하의 선택을 받게 될 운 좋은 사내는 누구입니까?”
하지만 밝던 시종장의 목소리는 곧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변했다.
“설마 윌랑…….”
“절대 아닙니다. 윌랑 사절단이랑 같이 온 사람은 맞는데. 윌랑 왕자는 아닙니다.”
“네?”
시종장의 표정이 혼란스러워졌다. 윌랑 사절단 중 하나인데 왕자가 아니라고?
“기르골이라고…… 머리카락이 하얗고 눈은 붉은색인-.”
라틸이 거기까지 말했을 뿐인데 놀랍게도 시종장은 바로 알아들었다.
“아, 항상 하얀 코트를 입고 다니는 그자로군요.”
“압니까?”
“눈에 띄니까요.”
웃으면서 대답한 시종장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미묘한 어조로 또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눈에 띄는 얼굴이었죠 확실히.”
나는 빼도 박도 못하는 호색한이 되어 버렸구나. 머리 위에서 ‘우르릉 쾅쾅’ 번개가 치는 느낌에 라틸은 얼른 서류로 시선을 내리며 지시했다.
“기르골은 꽃을 좋아해서 온실에 거처를 마련해 줄 생각이니, 그쪽에 자리를 준비해줘요.”
“온실이요?”
“온실 휴게실이 후궁들 침실보다 조금 작은 크기니까. 그 방을 쓰면 될 겁니다.”
“뭘 좋아하는지도 이미 아시는군요.”
라틸은 하하 어색하게 웃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기르골. 살려고 데려오긴 하는데. 정말 괜찮을까?
* * *
업무가 끝나고 해가 저물어갈 무렵. 라틸은 무거운 어깨를 문지르며 하렘으로 갔다.
후궁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므라딤을 보기 위해서였다.
지나갈 때마다 인사를 건네오는 궁인들에게 고개를 까딱여 대응해주며 라틸은 호숫가로 걸어갔다.
몇 번이나 문제를 일으켰던 호숫가는 피인어들이 입주한 뒤로는 아주 깨끗하고 평화로운 데다 훨씬 맑아 보였다.
저 중간 즈음에서 가끔 돌고래처럼 튀어나왔다 들어가는 인어 형상들이 이질적이긴 하지만.
라틸은 어떻게 므라딤을 부르나, 생각하다가 물을 손으로 톡톡 두드리고서 “므라딤?” 하고 불러보았다.
민망했지만 효과는 있었다.
라틸이 두드린 쪽 물살이 유난히 출렁인다 싶더니, 거기서 므라딤이 천천히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파란 머리카락이 호수 빛깔과 흡사했다. 그의 머리카락이 물에 흠뻑 젖어 호수에 늘어지자, 다 저물어가는 불그스름한 햇살이 그의 머리카락에 내려앉아 분위기를 유독 운치 있게 만들었다.
똑같이 물에서 나타나도 기르골은 색정적이고 위험하다면, 므라딤은 몹시 신비로웠다.
‘하지만 피인어들도 사람들과 우호적인 종족이 아니지. 저 신비한 얼굴에 방심하면 안 돼.’
상대적으로 기르골에 비해 온화해 보이는 므라딤이지만 절대로 방심해선 안 된다. 라틸은 속으로 다짐하고서 므라딤에게 물었다.
“므라딤. 잠시 얘기 좀 할까?”
“무슨 일이시오 로드?”
물 밖으로 나온 므라딤이 어디서 가져온 건지 손에 쥐고 있던 긴 천을 자신의 허리춤에 감았다.
라틸이 그걸 보자 므라딤인 설명해주었다.
“물 안에선 이런 다리 형태가 편하지 않소.”
“천은…….”
“안 두르고 다니니 사람들이 놀라서 말이오.”
안 두르고 다녀봤구나. 라틸은 속으로 생각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라틸이 고개로 가리키자, 므라딤은 바로 따라왔다.
라틸은 지나다니는 궁인들이 전혀 없고 주위로도 사람들이 오지 않는 곳에 도착해서야 멈춰섰다.
므라딤은 머리카락에 묻은 물기를 쭉쭉 짜내며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소 로드?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듯한데.”
“잘 지냈어?”
“수질이 나빠서 청소하느라 고생이었소.”
“아……. 고마워. 청소해 줬구나.”
어쩐지. 유난히 물이 반짝이고 맑아졌다 싶었지. 피인어들이 살아서 그리 변한 게 아니라 피인어들이 청소해서 그리 변했나 보다.
하긴. 피인어들이 청소 물고기도 아니고, 그냥 저기 거주한단 이유로 물을 깨끗하게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뭐, 우리가 사는 데니까.”
‘아주 당연하게 자기들 집처럼 말하네.’
라틸은 므라딤의 반듯한 미소를 보자 괜히 빈정이 상했지만, 지금은 므라딤을 달래러 온 것이기에 일부러 따뜻한 척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슬쩍 기회를 보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평온하게 본론을 꺼냈다.
“므라딤. 전에 궁전 안에서 기르골을 본 적이 있지?”
굉장히 평화로운 말투로 꺼냈는데도 순식간에 므라딤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강풍이 불어와 그의 얼굴에서 미소를 싹 앗아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므라딤은 무표정해졌고 눈은 건조해졌다.
“본 적 있소. 아직 있소?”
“음.”
후궁 이야기를 꺼내면 무슨 반응을 보낼지 짐작이 가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라틸은 므라딤의 싸늘한 표정에 심장이 철렁해졌다.
하지만 잘 지내다가 갑자기 기르골과 또 마주치는 것보단 미리 말해두는 게 나았다.
“므라딤. 기르골은 몇 주 뒤쯤에 후궁으로 올 거야. 여기에. 호수 근처에서 사는 건 아니고.”
말을 마치자마자 므라딤의 축축한 머리가 순식간에 말라버렸다.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
므라딤의 호수 같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저 깊은 심해처럼 이질적으로 변했다.
므라딤은 믿을 수 없단 눈으로 라틸을 쳐다보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그자는. 로드. 그자는 로드의 적이오.”
“알아.”
“그런데 후궁으로 받는다고?”
므라딤은 라틸을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았다.
라틸은 머릿속으로 몇십 번이나 고른 변명을 했다.
“전에 그대가 그랬지, 므라딤. 내 전대 로드가 염원이 있었다고. 내 생각엔, 로드와 대적자가 계속해서 싸워서는 그 염원을 이룰 수 없다고 봐.”
“어째서 그리 생각하시오?”
“누가 싸움판 벌이는 이들을 좋아하겠어?”
‘좀 더 멋지게 표현하려 했는데! 싸움판이라니!’
“로드? 왜 갑자기 인상을 쓰시오?”
“아니, 생각해 봐. 므라딤. 기르골을 하렘에 넣어두면, 수천년 간 계속되어 온 로드, 그러니까 나와 대적자 진영의 싸움 크기를 줄일 수도 있어. 딱 한 번. 한 번이라도 500년간 계속되어 온 싸움이 깨진다면, 그 500년 주기로 악이 부활하니 어쩌니 하는 전설이 없어질지도 모르잖아. 안 그래?”
라틸은 일부러 자신이 살고 싶어서 이런다는 말은 접어두었다. 너무 사적인 목표니까.
칼라인이나 서넛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지만, 피인어는 무조건 로드를 편드는 종족은 아니라지 않은가.
라틸의 설득에 므라딤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생명을 가진 것처럼 멋대로 너울거렸다.
새파란 눈동자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당장 화를 내진 않았다. 일단 라틸이 한 말을 들어주고는 있단 거였다.
라틸은 초조한 마음을 감추고, 모든 게 자신의 손바닥 아래에 있단 것처럼 웃고 있었다.
자신이 기르골에게 완전히 휩쓸리고 있단 걸 들켜서는 안 됐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어디선가 “폐하? 폐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라틸을 찾고 있었다.
그 소리에 하늘거리던 므라딤의 머리카락이 내려갔다.
라틸은 그의 눈동자를 빤히 보았다. 생각 정리를…… 한 건가?
“그러면 로드.”
“응.”
“나도 후궁으로 들어가겠소.”
‘뭐? 넌 왜?’
라틸이 기겁해 쳐다보자, 므라딤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타올랐다.
“인간들은 후궁들끼리 처절하게 암투를 한다지. 내가 따라 들어가 그놈을 아주 죽여버릴 거요.”
‘그건 암투가 아닐 텐데.’
“그리고 그놈을 누르고 국서 자리를 차지하겠소.”
므라딤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올라갔다.
“그놈을 공식적으로 내 발밑에 두도록. 하루에 세 번 그자 머리통을 밟고 지느러미로 뺨을 갈기겠소.”
‘아니, 국서는 후궁들을 밟고 괴롭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라틸은 그의 말에 몇 번이나 반박하고 싶었지만, 므라딤이 워낙 혼자 씩씩거리고 있어서 끼어들지 못했다.
어쨌든 지금 그는 최대한 분노를 누르고 있긴 했으니까.
라틸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마를 짚고 멍하게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겠다.”
기르골을 후궁으로 들인다고 하자 시종장이 짓던 표정이 떠오르면서 위가 아파왔다.
기르골 얘기를 꺼내고 므라딤 얘기까지 꺼내면 시종장이 라틸을 호색한 수준이 아니라 방탕황제라 볼지도 몰랐다.
“폐하?”
또다시 누군가 자신을 부르자, 라틸은 므라딤의 어깨를 두드리고서 얼른 그쪽으로 갔다.
“넌 게스타 시종 아니냐.”
뜻밖에도 라틸을 찾고 있는 건 게스타의 시종 트리였다.
라틸이 다가가자, 트리는 얼른 앞으로 달려와 꾸벅 인사했다.
“폐하께서 하렘 안에 들어오셨단 이야기를 듣고 게스타 님께서 폐하를 청해보라 하셨습니다. 꼭 말씀드려야 할 게 있으시다고요.”
“가지.”
트리를 따라가자 게스타가 처소 근처에 나와서 서성이는 게 보였다.
라틸을 보자 게스타는 얼굴이 붉어져서 들리지도 않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더니, 얼른 자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문을 닫자, 게스타는 문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소심하게 라틸을 끌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다가 공작이 식시귀인 게 맞다고 합니다.”
기르골과 므라딤 사이에서 납작해졌던 라틸의 화색이 다시 밝아졌다.
“그럼……!”
“네. 한 번만 다가 공작을 살필 기회가 온다면, 제가 끼어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