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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화. 둘이 깨진 거 아니었어? (307/367)


307화. 둘이 깨진 거 아니었어?
2023.02.05.


라틸이 문을 열자 공작가에서 일하는 하녀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공작부인께서 손님들 식사는 2식당에 따로 마련하라 하셨습니다. 함께 식사하면 손님들이 불편하실까 봐요. 저녁 7시쯤에 2식당으로 오시면 됩니다. 길은 지나가는 하인이나 하녀 누구에게든 물어보시면 되고요.”

하녀는 제 할 말을 마치자 꾸벅 인사하고는 다시 옆방으로 이동해 문을 두드렸다. 하녀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보고서, 라틸은 문을 닫고 시계를 확인했다.

공작부인이 정말 배려를 한 건지, 아니면 상인들과 함께 식사할 마음이 없단 걸 돌려 표현한 건지 속내는 알 수 없으나 아쉬웠다.

공작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한다면 다가 공작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었을 텐데. 다가 공작이 몸이 불편해 나오지 않더라도 최소한 소식은 들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이후 저녁 6시 30분까지, 라틸은 꼼짝도 하지 않고 창가에서 밖만 내려다보았다. 살인 사건이 벌어진 것 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진정된 공작가의 전경을.

그러다 40분쯤 밖으로 나가자, 하녀의 말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고용인들이 여럿 보였다.


“2식당 위치가 어딘가?”

그중 가장 가까이 지나가는 하녀에게 묻자, 그녀는 직접 식당까지 안내해주었다.


“고맙네.”

하녀가 인사를 하고 가자, 라틸은 아치문에 달린 차양을 손으로 걷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일찍 내려온다고 온 건데도 이미 대부분의 일행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라틸을 보자 상단주와 그 일행은 가만히 있었지만, 타시르와 게스타는 동시에 일어섰다.


“사비 양, 여기로.”

“여기 앉으세요.” 

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 자리는 딱 두 사람 사이였다. 혹여 벌어질 난감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상단 일행들과 거리를 두고 앉다 보니 이렇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가리킨 자리가 같았으므로 라틸은 갈등 없이 중앙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이 신기했나. 여기까지 오는 내내 라틸과 게스타에게는 아무 관심도 가지지 않던 상단주가 처음으로 라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하인들이 아직 음식을 내오지 않자, 슬쩍 타시르에게 물어보았다.


“바쁘게 오느라 타시르 님 일행을 제대로 소개받지 않았군. 타시르 님은 이분들과 어떻게 알게 된 건가?”

황제의 밀사라고 소개 들었잖아. 관계도를 알고 싶은 건가? 라틸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앞에 놓인 하얀 포크를 만지작거렸다. 은 식기로 주지.

그러다 타시르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웬일로 주춤하기에 옆을 보니, 그가 미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내’라고 대답하면 라틸이 황제인 게 발각되거나, 그가 황제를 두고 바람피우는 구도가 되어버려서 대답을 못 하는 모양이다.

타시르가 이렇게 주춤하는 건 평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어서, 라틸은 포크에서 손을 떼고 그를 구경했다. 뭐라고 둘러대려나. 친구? 그냥 황명으로 같이 오게 된 거?

대답은 의외로 얌전한 게스타가 선수를 쳤다.


“저는 사비 양의 남편입니다.”

말을 뱉어 놓고서 게스타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였다가 힐긋 고개를 돌려 라틸을 건너뛰고 타시르를 보았다.

타시르도 눈썹을 치켜올리고서 게스타를 보았다. 서로 분명 미소를 주고받는데, 놀라울 정도로 친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둘을 번갈아 보고 있자니, 상단주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타시르가 너털웃음을 뱉으며 물었다.


“어라? 둘이 아직 사귀고 있었어? 깨진 줄 알았는데.”

“사귀는 게 아니라 결혼까지 한 사이인걸요, 타시르 님. 남의 가정을 왜 멋대로 파탄 내고 그래요…….”

“이상하네. 하지만 게이미, 너 다른 애인 있잖아? 그 여잔 누구야?”

“!”

가짜 관계도라고 아주 제대로 꼬아대는구나. 라틸은 혀를 차고서 상단주를 보았다.

상단주는 동공이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관계인데, 여기서 누군가의 바람이 발각되는가 싶어 놀란 눈치였다.


“그런 여자 없는데요, 타시르 님. 타시르 님이 애인을 서넛씩 둔다 해서 모두가 그러진 않아요.”

“무슨 소리야, 게이미. 내가 봤어. 근육도 많고 애정도 많고 인자함도 많고 신앙심도 많은 키 큰 애인 있잖아.”

그거 대신관 얘기 아냐? 라틸은 황당해 타시르를 보았지만, 타시르는 눈꼬리가 반달 모양으로 휘어져 게스타만 보고 있었다.

자신이 라틸과 부부 행세를 못 하게 되니 게스타까지 못 하게 하려나 보다.

게스타는 타시르를 흘겨보고서 라틸에게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했다.


“사비 양, 거짓말인 거 알지요? 타시르 님은 늘 거짓말만 합니다. 듣지 마세요. 저는 사비 양뿐이에요.”

“알아.”

근육도 많고 신앙심도 많은 키 큰 애인은 내 애인이니까. 라틸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하자, 이번에는 옆에서 타시르가 게스타의 말투를 따라 했다.


“사비 양, 내가 거짓말할 사람입니까? 내 말 안 믿어요? 내가 분명 봤다니까요?”

“식사나 하게, 그쪽은.”

“너무해…… 타시르 상처받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식사도 안 나왔는데.”

그 분위기 때문일까.

질문 한 번 던졌다가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상단주가 자기 가슴을 두어 번 두드리더니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십니까?”

타시르가 묻자 상단주는 힐긋 게스타 쪽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좀 체한 거 같아서.”

“아직 식사도 안 나왔잖아요. 아니, 왜 다들 나오지도 않은 식사를 두고 먹어라 체했다 하지?”

타시르가 짓궂게 물어댔지만, 상단주는 손을 휘젓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난데없이 살인 사건 때문에 공작가에 갇힌 것도 모자라 이런 말다툼 현상을 보고 있으려니 머리가 지끈대는 모양이었다.

상단 사람들도 상단주가 나가자 눈치가 보이는지, 슬그머니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다가 나가버렸다.

순식간에 식당 안에 남은 건 라틸과 타시르, 게스타 세 사람뿐이었다.


“아이쿠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 늦잠을…… 잤는데. 아무도 없네. 다 어디 갔지?”

지각한 상단 사람 한 명이 추가되긴 했으나, 그 사람도 자기 일행이 아무도 없자 당황해서 도로 나가버렸다.

공교롭게도 하녀들은 그제야 음식을 날라오기 시작했다.

아몬드 타르트와 크림을 넣은 수프, 하얀 달 모양 빵, 바삭하게 튀긴 생선 요리 등, 공작가 식구들과 함께 먹는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신경을 쓴 메뉴들이었다.

며칠간 마차 여행을 하느라 제대로 된 음식은 먹지 못한 참이라, 음식을 보자 바로 허기가 졌다.

라틸은 품에서 은으로 된 침을 꺼내 다음 여기저기 찔러본 다음, 괜찮다 싶자 식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타시르와 게스타는 상단 사람들이 나가자 더욱 본격적으로 말다툼을 이어갔다.


“타시르 님. 왜 멋대로 사람을 바람피우는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요?”

“그러는 도련님은 왜 예정에도 없던 부부 행세를 하는데?”

너도 했잖아. 부부 행세. 불법 경매자랑 나랑 둘이 갔을 때. 라틸은 하얀 생선 살을 입에 넣으면서 속으로 생각했으나, 게스타는 아무래도 말싸움에서 타시르에게 밀리는 듯했다.

하긴. 저 순한 성격에 누구랑 말싸움을 하겠어. 라틸은 게스타가 일방적으로 밀린다 싶자, 둘의 등을 두드리고서 지시했다.


“먹어. 양옆에서 싸워대지 말고. 싸울 거면 둘이 맞은편에 가서 나란히 얼굴 맞대고 싸우던가.”

자리를 이동하긴 싫은지 둘 다 순순히 포크며 나이프를 들었다.

그러나 5분 이상 조용하기 어려운지, 타시르가 이번에는 라틸에게 또 말을 걸었다.


“우리 사비 양은 이제 뭐 어떻게 할 겁니까? 다가 공작과 게스타 님이 만나게 할 거라 했던가요? 상황을 보니 이방인은 근처에도 못 오게 할 거 같은데요.”

“그건 나와 사비 양이 알아서 할 일이니 타시르 님은 신경을 꺼주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주선한 일인데 내가 신경을 끄면 쓰나.”

“주선하는 것까지가 타시르 님 일이었잖아요…….”

두 후궁이 또다시 말다툼을 시작하려 하자, 라틸은 다시 포크를 내려놓고 둘의 등을 살짝 두드렸다.


“그만들 싸우라니까? 그리고 타시르. 이 일은 게스타랑 우선 좀 말을 나눠보고. 나중에 알려주던가 할게.”

“저도 함께 가면 안 됩니까, 폐하?”

“일이 끝나고 나서. 머릿수가 많으면 돌아다니기 더 번거로워지잖아.”

타시르는 서운한 눈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게스타는 흑마법을 익힌 사람으로서, 식시귀가 된 다가 공작을 살피러 가는 거 아닌가.

타시르는 게스타가 마법 공부를 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으니, 현장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이후 식사가 끝나자, 라틸은 타시르에게 먼저 들어가라 한 다음 게스타만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타시르가 복도에서 둘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미안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라틸은 타시르가 따라올 수 없을 만한 곳으로 걸어간 다음, 주위에 아무도 없자 게스타에게 작게 물었다.


“뭐 사악한 기운 같은 게 느껴지고 그러진 않아?”

“느낌이 오는 방향이 있긴 해요…….”

“그럼 그쪽으로 가보자.”

“괜찮을까요……?”

“산책 나왔다고 하면 돼.”

라틸은 주저하는 게스타를 데리고서, 그가 ‘이상한 느낌’이 온다고 하는 방향으로 걸어가 보았다.


“수상해 보이는 표정 좀 풀어봐.”

“그게 잘되지 않아요…….”

자꾸만 움츠러드는 게스타를 데리고 간 곳은 다른 층에 있는 복도였다.

복도 끝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다 보니, 복도 중앙 부근에 사람들이 가득 몰려 있는 게 보였다.


“저긴가 본데.”

라틸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이 다가 공작의 방일 거라 추측했다.


“실례합니다. 여기론 오면 안 됩니다.”

하지만 근처에 가기도 전에, 복도를 돌아다니던 경비병이 먼저 다가와서는 단호하게 라틸과 게스타를 밀어냈다.


“누군데 여기 온 거죠?”

“일이 터져서 여기 머물게 된 상단 사람이라네. 방금 식사하고 산책 중이었어. 밖에 잠깐 비가 내리길래 안에서 걸으려 했지.”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경비병에게, 라틸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둘러댄 다음 게스타를 챙겨서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뒤에서 의심스럽게 쳐다보긴 했으나, 경비병은 라틸과 게스타를 쫓아 내려오진 않았다.

상단이 얼결에 여기 머무르게 되긴 했지만, 시간대를 잘 따져보면 일이 터진 다음에야 마차가 이 안으로 들어온 걸 그들도 알기 때문이었다.


“다른 상단 사람들에게도 이쪽으로는 오지 말라 전하십시오.”

계단 위에서 들려오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들으며, 라틸은 게스타를 자기들이 머무는 방 근처로 데려갔다.


“까다롭네. 당연하겠지만. 어쨌든 아까 그 경비병들이 모인 곳에 다가 공작이 있는 건 확실한가 봐.”

“사람들이 너무 많네요…….”

“전에 그 인형 같은 거 있잖아. 꼭두각시 인형 같은 거. 그거 좀 작은 사이즈로 조종해서 다가 공작을 보고 오진 못해?”

“작은 사이즈는 없어요…….”

“새로 만들진 못해?”

“여기서는 재료를 못 구해서…….”

머리를 맞대어도 당장 다가 공작의 방에 조용히 들어갔다 나올 방법이 없어서, 라틸은 우선 게스타와 헤어져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얼굴을 아이니 황후의 모습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지만, 지금 이 저택엔 황후가 와 있지 않다.

게다가 얼굴이 바뀌는 거지 옷이 휙휙 바뀌는 건 아니기에, 아이니 황후의 흉내를 내는 것도 아직 쓸만한 패는 아니었다.

그러나 라틸이 그런 고민에 잠긴 사이. 게스타는 이번엔 혼자서 조용히 방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다가 공작의 방 근처 복도로 간 게스타는 아까 방에서 가져온 돌멩이를 꺼내 거기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돌멩이는 곧 쑥쑥 자라더니 사람의 머리처럼 변했고, 게스타는 그걸 복도 한쪽으로 굴렸다.

모양이 바뀌었을 뿐 원래는 돌멩이인 그것은 데굴데굴 사람들 발치를 빠르게 굴러갔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굳은 얼굴로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다가, 웬 목이 굴러간 걸 뒤늦게 눈치채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다 사람들이 그쪽으로 뛰어간 찰나. 게스타는 눈 깜짝할 사이 그 방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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