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8화. 헛된 희망 (308/367)


308화. 헛된 희망
2023.02.08.


다가 공작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사실은 의식이 거의 다 있었지만, 깊은 생각에 잠긴 상태는 설핏 무의식과 비슷하기도 해서 그는 이런 자신의 상황을 ‘잠들었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정말로 깊은 수면에 잠긴 건 아닌지라,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란, 목이 굴러갔다는 외침, 사람들이 목소리를 낮추어 수군대는 소리, 타이밍 나쁘게 붙잡히게 된 상단 이야기…….

그러다가 다가 공작은 희미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착각일까?

그러나 착각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다가 공작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가 잠들어 있으면 다들 소리를 죽여 왔다 갔다 했다.

누군가는 공작가에서 계속 벌어지는 사건이 담 밖으로 넘어갈까 쉬쉬했고, 누군가는 공작이 빨리 제정신을 차리기를 바랐다.

집사나 시중드는 하인은 다가 공작이 먹을 만한 요리를 여러 가지 가져다가 식탁에 차려두고 물러난 다음, 공작이 손도 안 댄 그 음식을 도로 물리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했다. 희미한 문소리에 이어진 미약한 발소리. 그 이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를 깨우는 시늉조차 없다.

누가 왔기에? 다가 공작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귀여운 여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여우?

다시 보니 여우는 여우이지만, 여우 가면을 쓴 사람이었다. 교묘하게 만들어져서 진짜 여우처럼 보이는 여우 가면을 쓴 키가 큰 사람.

정신이 퍼뜩 돌아온 다가 공작은 흠칫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누구-.”

누구냐고 물으려던 건지, 누구 없냐고 외치려던 건지도 모르겠다. 말은 입 밖으로 나가자마자 커다란 손에 가로막혔다.

다가 공작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는 식시귀가 된 이후 힘이 비약적으로 세졌으나, 상대는 그보다 더 힘이 셌다.

입을 가로막은 손을 억지로 떼려 했지만, 상대는 그저 손을 뻗은 자세만으로도 그의 온 힘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다가 공작이 후들후들 떨며 여우 가면을 보자, 여우 가면은 그의 입을 막지 않은 쪽 손을 자기 입으로 가져가더니 검지를 들어 올렸다.


“쉿.”

조용히 하란 신호였다.


 
다가 공작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이 가로막혀서 머리가 잘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 안쪽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러나 여우 가면은 그의 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대신, 자기 입에 가져다 댔던 손을 떼더니 다가 공작의 상의를 위로 올렸다.


“!”

이윽고 그 손이 다가 공작의 배를 여기저기 조물조물하기 시작했다. 배의 여기저기를 손가락 끝으로 눌러대는 걸 보니,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배려심이라고는 일말도 없는 거친 손아귀는 다가 공작의 몸뚱이를 찰흙 덩이처럼 대했다.

다가 공작은 여우 가면이 왜 자기 입을 계속 틀어막았는지 알았다. 그 별거 아닌 손놀림이, 그에겐 꽤 강한 통증으로 다가왔다.

특히 여우 가면이 갈비뼈 어딘가를 누를 때면 저절로 으악 비명이 터져 나오려 했다. 식시귀가 된 이후 한번도 느끼지 못한 고통이었다.


“음.”

마침내 제 볼일을 마친 건지, 여우 가면이 다가 공작의 배에서 손을 떼더니 상의를 도로 내려주며 중얼거렸다.


“가엾네요. 몸을 엉터리로 만들어 놨네.”

묘한 말이었다. 몸을 엉터리로 만들었다고? 마치 그가 사람이 아니란 걸 아는 뉘앙스이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아낙차 역시 다가 공작의 상태를 점검할 때 배와 목을 자꾸 확인한 것 같다.

다가 공작은 눈을 부릅뜨고 여우 가면을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다가 다가 공작은 눈을 번쩍 떴다. 공작은 식은땀을 흘리고서 눈동자를 보통 사람들이 낼 수 없는 속도로 굴렸다.

방 안 여기저기를 샅샅이 훑다가, 다가 공작은 상체를 일으켰다. 저절로 헉 헉 숨이 찬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가 공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가 내려놓았다. 그는 잠들어 있었다. 여우 가면도 없었다. 그럼 아까 그건 꿈이었나?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다가 공작은 손을 이불 위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들어와라.”

문이 열리고 빼꼼 고개부터 들이민 건 그의 딸 라이디였다. 아이니와 나이 차이가 많이 어린 딸.


“우리 공주님.”

다가 공작은 라이디를 보자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식시귀가 된 뒤로 그는 최대한 둘째를 보지 않으려 했지만, 아이는 지치지도 않는지 쉴 새 없이 제 다가 공작을 찾아와 물었다.


“아빠 아직 아파?”

다가 공작이 빨리 자신의 몸을 멀쩡하게 바꾸려는 건 라이디 때문이기도 했다.

아이니는 공작의 몸 상태를 알고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제 안전도 챙길 수 있지만, 라이디는 아직 그런 걸 몰랐다.

그저 아빠가 아프다고 하니 아프구나, 생각하면서 걱정할 뿐.


“응. 아직 아빠 아파.”

다가 공작이 힘없는 척 대답하자, 아이는 쪼르르 달려와서는 공작을 답삭 끌어안았다.

아직 키가 작아서, 공작이 침대에 앉아 있는데도 아이는 공작의 가슴께까지 밖에 머리가 오지 않았다. 물론 침대가 높은 침대이긴 하지만.

그런데 평소라면 어디가 얼마큼 아프냐고 묻다가 나갈 아이가, 오늘은 재채기를 하더니 입을 퉤퉤 거렸다.


“라이디? 왜 그래?”

혹시 내게서 시체 냄새라도 나는 걸까. 다가 공작은 섬뜩해져서 물었다.

아이가 웃는 건지 기침하는 건지 알 수 없게 콜록대며 공작의 배를 가리켰다.


“아빠 강아지 샀어?”

공작은 고개를 내렸다. 그의 상의 여기저기에 자세히 보니 동물 털이 묻어 있었다. 옷이 갈색이라 바로 티 나지 않았던 것이다.


‘꿈이 아니었나!’

여우 가면이 다녀간 게 꿈이 아니란 걸 알자마자 무서운 마음보다 기대가 치솟았다.


“라이디, 아빠 심부름 하나만 해줄래?”

“할래! 내가 할래!”

“그럼 집사 아저씨 좀 데려 와줄래?”

“할게! 아빠 쫌만 기다려!”

아이는 자기가 아빠에게 도움이 된단 생각에 신이 나서 밖으로 나갔다.

아이가 나가자 ‘아가씨 언제 들어가셨냐’ ‘아가씨 어디 가셨던 거냐’면서 소란이 들려왔다.

다가 공작은 옷에 묻은 여우 털을 손으로 삭삭 긁어모았다.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가면이 탈모에 걸렸을 리는 없으니, 자연적으로 떨어진 건 아닐 거다. 이건 여우 가면이 일부러 떨어뜨리고 간 게 분명하다.

즉, 여우 가면은 그와 손을 잡고 싶은 생각이 있는 자였다.

게다가 보는 것만으로 아낙차가 미숙하단 걸 알아차릴 정도로 더욱 솜씨 좋은 흑마법사!


“주인님.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먼 곳에 있지 않았던 듯 몹시 빠르게.

다가 공작은 여우털을 협탁에 내려놓았다. 집사는 힐긋 그쪽을 보았지만 순순히 공작이 먼저 지시하기를 기다렸다.


“집사. 아낙차가 지금 어디 있지?”

“황후 폐하께서 궁전 별궁에 데려가셨습니다. 황후 폐하의 통제하에 두어야겠다고요.”

“당장 이리로 오라 하게.”

“예.”

집사는 한 번 더 여우털을 보고서 나갔다.

다가 공작은 희망에 차 이불을 쥐었다.

식시귀가 되어 살아났단 기쁨보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과 사람의 살에서 느껴지는 식욕에 괴로움이 더욱 컸다.

살아 있는 사람이 옆을 지나가면 죽여서 시체를 먹고 싶었고, 시체가 근처에 있으면 저절로 입에서 침이 떨어졌다.

좋은 냄새를 풍기는 요리가 차려져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이런 꼴로 깨어나고 나니, 때때로 아이니가 왜 그를 깨운 건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같은 식시귀인데도 틀라 황자와 자신의 몸상태가 전혀 다르단 걸 알았을 때는 아낙차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틀라 황자는 다르다고 했다. 그도 시체를 먹고 살긴 마찬가지지만, 평범한 음식에 대한 식욕이 사람일 때만큼 없을 뿐 평범하게 음식을 먹고 마실 수 있었다.

만약 그녀에게 그의 몸 상태를 원래대로 되돌릴 가능성이 없었다면, 다가 공작은 당장 은혜를 원수로 갚은 아낙차와 틀라 황자부터 물어뜯었을 것이다.


‘몸을 고칠 수 있다. 몸을!’

 

* * *



“그게 무슨 소리요? 오늘은 돌아갈 수 있다 하지 않았소!”

하품을 하며 복도로 나온 라틸은 상단주가 집사와 싸우는 소리를 듣고 멈춰섰다.

두 사람은 복도의 끄트머리 계단 부근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상단주는 몹시 화가 난 얼굴이었고 집사는 쩔쩔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직 범인을 찾지 못해서요. 공작님께서 하루나 이틀 정도 더 머물게 하라 하셨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 시간을 잘 계산해 보면 알 거요. 우리는 사건이 터질 때 아직 이 저택에 들어오지도 않았소!”

“예, 물론 잘 압니다. 범인으로 의심하는 게 아닌걸요. 다만 일을 확실하게 하려는 거지요.”

“그럼 다가 공작님을 뵙게 해 주시오. 내가 뵙고서 말씀드리겠소.”

“죄송합니다. 공작님은 편찮으셔서요. 누구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럼 공작부인이라도 뵙게 해 주시오!”

“공작부인께서는 범인을 잡느라 바쁘셔서…….”

“난 이 집안에만 물건을 대는 게 아니요!”

집사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다가, 라틸은 인기척을 죽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왜 갑자기 말이 바뀌었을까?’

라틸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걸어갔으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반대쪽 복도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라틸은 어제 다가 공작을 만나보지 못했다. 상단주에겐 미안하지만 하루나 이틀 더 기회가 생긴 게 더 좋았다.

무슨 꿍꿍이로 남게 되었는지가 걸리긴 하지만.

그런데 몇 걸음을 지나지 않아, 작고 여린 목소리가 라틸을 조심스레 불렀다.


“사비 양.”

이렇게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듯 힘없는 목소리. 누구의 목소리인지 뻔했다. 라틸이 돌아보자 게스타가 가발을 쓰고 어색하게 쭈뼛거리고 있었다.


“어디 있다 왔어? 나올 때는 안 보였는데.”

“저기…… 쪼그리고 앉아 있었어요…….”

“왜?”

라틸이 웃으면서 묻자, 게스타는 얼굴이 벌게져서 손을 꼬아댔다.

얼결에 그 손을 잡자, 게스타는 더욱 부끄러워하더니 소심하게 다가와 허리를 숙여 라틸의 귀에 입술을 댔다.


“실은 밤에 다가 공작을 얼핏 봤어요…….”

평소에는 너무 작고 힘없이 말해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게스타는 목소리가 아주 낮고 그윽하기 때문에 이렇게 귀에 직접 대고 말하면 저절로 솜털이 오싹 일어났다.

라틸은 내용보다 목소리에 먼저 반응해 어깨를 움찔했다.

게스타가 쳐다보자, 라틸은 그의 목소리에 살갗이 떨렸단 말을 하는 게 민망해서 얼른 둘러댔다.


“어디서 봤는데?”

“돌아다니다가요. 공작이 식시귀가 맞긴 한데…… 엉터리예요…….”

이미 들었던 내용이지만 게스타에게 한 번 더 듣자 기쁨이 몰려들었다.

라틸은 게스타를 잡은 손에 힘을 더 꽉 주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우리한테 유리하겠어?”

“아낙차는 공작을 일부러 꼭두각시 식시귀로 만들었어요…… 아낙차가 공작을 조종하는 데 쓰려고 준비한 게 있을 건데. 그걸 뺏어오면 공작을 조종할 수도 있어요.”

“정말이야?”

“정 안되면 제가 처음부터 공작을 재조립할 수도 있긴 해요. 내키진 않지만요.”

게스타는 말을 하고서 라틸의 눈치를 살폈지만, 라틸은 그 말을 듣자 너무 기뻐서 그를 꽉 끌어안고 말았다.

다가 공작을 조종할 수 있다고? 그렇게 되면 최소한 하이신스라도 고칠 수 있었다.


“폐, 사, 사비 양.”

 

* * *

집사에게 이틀 정도 더 머무르란 말을 들은 상단주는 타시르를 불러 그 이야기를 전해 주다가, 정원에서 서로 꼭 끌어안은 부부를 보고 감탄했다.


“정말 사이가 좋군!”

상단주는 자기 자식들이 슬슬 결혼할 나이여서, 젊은 부부가 서로를 저렇게 아끼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참 예쁜 부부라고, 감탄하면서 타시르를 본 상단주는 곧 입을 다물어야 했다.

타시르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고서 부부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기분이 나빠 보였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긴 하지만 절대로 좋은 미소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타시르가 저 부부 사이에 자꾸 끼어들면서 훼방을 놓으려 했지. 상단주는 힐긋 타시르를 한 번 더 보고서 혀를 찼다.


“타시르 님. 자네는 후궁이네.”

“압니다.”

“그럼 행동에 조심하게. 저 둘은 폐하의 밀사라면서. 자네의 짝사랑은 자네뿐만 아니라 자네가 사모하는 저 사비 양에게도 해가 될 수 있어.”

말을 하면서도 상단주는 앙제스 상단주에게 타시르를 잘 감독하라 한마디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황제의 후궁이 황제의 밀사, 그것도 유부녀 밀사에게 반해 치정 스캔들을 벌이는 건 굉장한 추문이었다.

타시르에겐 미안하지만, 그의 미래와 안전을 위해서는 양친에게 알려서 아들을 단속하라 해야 했다.

이를 모르는 타시르는 불쾌한 감각이 어디서 오는 건가, 고민하면서 연신 사비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원의 다른 쪽에서는, 다가 공작의 부름을 받고 몰래 뒷문으로 들어오던 아낙차가 게스타의 얼굴을 알아보고 흠칫 놀라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