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칼끝은 내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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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화. 칼끝은 내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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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화. 칼끝은 내부에서
2023.03.05.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하면서도 라틸은 우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긴 회랑을 지나 하렘 내에 있는 칼라인의 방으로 가니, 듣던 대로 소란이 벌어져 있었다.
“우리, 우리 도련님은 제가 없으면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할 정도로 겁이 많은 분인데, 혼자 돌아가셨단 게 말이 됩니까? 문 앞에는 제가 계속 서 있었고, 창문은…… 왜 도련님이 창문으로 나가시냐고요. 말이 안 되잖아요!”
게스타의 시종인 트리는 엉엉 울면서 칼라인의 뱀파이어 시종 데먼에게 무서운 줄도 모르고 항의 중이었다.
데먼은 트리가 무어라 말할 때마다 “네가 한눈 팔았겠지.” “갑자기 창문으로 나가고 싶으셨겠지.” “네 주인이니 네가 찾아라.” 등 딱딱하게 대답하고 있었으나 누가 보아도 그 태도는 건성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 번씩 조용히 트리의 목덜미를 쳐다보는데, 트리가 번거롭게 굴자 ‘죽일까 참을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라틸이 다가가자 주위에 있던 사람 몇몇이 서둘러 무릎을 굽혔다. 곧 근처에 있던 이들도 무릎을 굽혔고, 소란의 당사자들도 조용히 인사했다.
“무슨 일이냐.”
라틸이 인상을 찡그리고 묻자 트리는 데먼을 눈으로 가리키며 하소연했다.
“폐하, 저희 도련님께서 칼라인 님과 차를 마실 거라고 한 시간 전쯤 여기로 오셨습니다. 하지만 이후 도련님은 저 방 안에서 감쪽같이 사라지셨어요.”
“게스타가?”
“네. 그런데도 칼라인 님과 데먼 저자는 게스타 님이 혼자 돌아갔단 거짓말만 합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폐하. 문 앞에는 제가 계속 지키고서 있었으니 도련님이 혼자 나가셨다면 보았을 겁니다. 데먼은 게스타 님이 창문으로 나갔다고 계속 우기는데, 우리 도련님이 뭐 하러 창문으로 나가신단 말입니까.”
라틸이 들어보니 트리가 의혹을 가질 만했다.
트리가 데먼을 노려보고 데먼도 트리를 서늘하게 보았다. 두 시종의 날 선 분위기를 보며, 라틸은 탄식이 나왔다.
‘당장 국서를 뽑진 않더라도 하렘 내부를 통솔할 사람은 뽑아야겠다.’
그러면 이런 소소한 싸움 같은 건 알아서 해결해 줄 테지.
‘돌아가면서 시켜본다고 하면, 국서감을 고르느라 그렇다고 생각해서 다들 잘해내려 할 거야.’
라틸은 골머리가 아파서 트리에게 우선 방에 돌아가라 지시하고, 데먼에게는 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문 두 개를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가보니, 칼라인은 이미 밖에서 나는 소란을 다 듣고 있었던지 평소보다 무뚝뚝한 얼굴로 서 있었다.
라틸이 들어서자 데먼이 다시 문을 단단히 닫았고, 방 안에는 순식간에 라틸과 칼라인 둘만 남게 되었다.
“들었어?”
라틸이 안으로 들어서며 묻자, 칼라인은 “예.” 하고 대답하고는 라틸에게 앉으라며 의자를 권했다.
라틸이 동그랗고 푹신한 의자에 앉자, 칼라인은 직접 주전자에서 차를 따르고 얼음을 넣어 건네주었다.
“게스타는 대체 어디 간 거야?”
라틸은 걱정스레 물었다. 트리는 몸이 약한, 진짜로 약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약하다고 생각하는 게스타를 위해 남들보다 두 배 세 배로 열심히 뛰어다니는 이였다.
속마음이야 어쨌든 굽힐 사람에게는 굽히면서 지내고 다른 사람들과도 충돌하려 들지 않았다. 적어도 라틸이 알기로는.
그런데 칼라인 방 안에서 울고불고할 정도면, 무언가 칼라인이 관련이 있긴 있는 듯했다.
칼라인은 라틸의 대답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찻잔을 두 손으로 쥐고서 입술 끝을 올렸다 내리길 반복하는 걸 보니, 뭔가 알기는 아는 것 같은데 대답을 망설이는 눈치였다.
“왜 그래?”
라틸은 떨떠름해서 물었다.
“나한테 말하기 곤란해?”
“솔직하게 말씀드려야 할지, 아니면 게스타를 위해 돌려 말해주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주인.”
“대체 어디 갔길래?”
마침내 결정을 내렸는지 칼라인이 입을 열었다.
“카리센에 갔습니다.”
“카리센?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다가 공작을 해부하러 간다던데요.”
라틸은 차를 한 모금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목을 붙잡고 기침했다. 뭘 하러 가?
“해부?”
칼라인은 자기 찻잔을 내려놓고 라틸의 곁으로 와 등을 같이 두드려주었다. 라틸은 가까스로 진정해서 칼라인을 올려다보았다.
“해부를 왜?”
칼라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취미인가 보죠. 흑마법사들은 다 좀 그렇게 음침합니다, 주인. 왜 흑마법사이겠습니까.”
“아…….”
“하지만 이런 얘길 사람들에게 하지 못하니 좀 난처합니다. 게스타의 시종은 특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니 뭐라 말할 수도 없고요.”
“그렇겠네.”
라틸은 아직도 해부가 취미라는 말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멍하게 중얼거리다가, 게스타의 맑은 표정을 떠올리고서 칼라인을 불신하는 눈으로 보았다.
진짜일까? 거짓말 아니야?
* * *
황제가 고개를 기웃하며 나가자, 마침 소란을 듣고 온 대신관이 트리를 다독이면서 어디론가 데려갔다.
대신관이라 아프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면 저절로 발길이 가는 모양이었다.
데먼은 대신관이 등을 두드릴 때마다 피를 토할 것처럼 힘겨워하는 트리를 지켜보다가, 불필요한 사람들이 다 사라지자 방 안에 들어가 칼라인에게 물었다.
“폐하께 그 이야기를 다 해도 괜찮을까요, 단장님?”
뱀파이어이기에 트리의 집요한 울음을 들으면서도 안쪽에서 나는 소리를 다 들은 듯했다.
칼라인은 발 받침대에 긴 다리를 쭉 펼치면서 덤덤하게 대답했다.
“다 말해달라고 내게 맡기고 간 거 아닌가.”
데먼은 안색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단장님. 이번에 폐하게 이런 말 한 걸 알면 게스타 그자가 또 집요하게 복수하려 들 텐데요…….”
데먼은 여우 가면이 성격이 좋은 것처럼 굴지만, 물론 실제로 좋을 때도 있지만 착한 사람이 아니란 건 알았다.
게다가 속이 얼마나 좁은지, 그 인간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누군가 해를 끼친다면 그걸 죄다 기억해 놨다가 되갚아주었다.
상대방이 그 일을 잊고 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황제에게 다가 공작을 해부하니 어쩌니 하는 말을 해버리다니. 이 일을 알면 분명 이를 갈면서 여기저기서 공격해올 텐데…….
“해볼 테면 해보라지.”
그러나 칼라인은 조금도 걱정되지 않는다는 듯 태연히 말했다.
“대적자와 싸우게 된다면 좋든 싫든 같은 팀끼리 힘을 합쳐야겠지. 하지만 그런 구분 없이 하렘 안에서 주인의 총애만을 두고 다투게 되면, 아군 따윈 없다. 모두가 적인 거지.”
“그게 가능할까요?”
“게스타가 다가 공작을 손에 넣고 돌아온다면…… 가능해지겠지.”
그때가 되면 아이니는 역대 대적자들 중 최초로 아군을 만들지 못한 대적자가 될 것이다.
대적자가 힘을 기르는 것도 로드가 나타나서 사람들이 경계심을 품어야 가능한데. 이번에는 로드가 힘을 숨기고 있는 데다 기르골과 신전을 아예 먼저 손에 넣어버려서 그럴 틈을 안 주고 있으니까.
대적자와 싸울 필요 없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데먼은 잠시 멍하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 시각.
타시르는 게스타가 사라진 일과 그로 인해 트리가 난동을 부린 일, 칼라인의 시종이 짜증을 내고, 라틸은 칼라인에게 잠시 들른 일 등을 전해 듣고 있었다.
히얼란은 이야기를 끝내고서 타시르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타시르가 웃고만 있을 뿐 별 기분 나쁜 내색이 없자, 한숨을 내쉬고서 투덜거렸다.
“좀 섭섭하지 않으세요, 소단주님? 폐하는 소단주님 힘이 필요할 때만 찾아오시고, 폐하 마음은 절대 안 주시잖아요.”
“아예 안 찾아오는 것보단 낫지.”
“그래도요. 폐하께서 이러다 소단주님을 후궁이 아니라 부하로 여길까 봐 걱정이에요. 차라리 진짜 부하면 승진이라도 하지요…….”
하지만 타시르는 후궁이니 승진을 할 수도 없다. 승진이라고 해 봐야 국서 자리인데, 국서 자리가 말을 잘 듣는다고 올라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타시르는 그런 히얼란의 투덜거림에도 가볍게 웃으며 오히려 그를 달래주었다.
“폐하는 겉보기엔 사람들에게 잘 대해주는 거 같지만 아니야. 가까운 사람들이 연이어 배신해서인가,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벽을 세우고 있어. 무리해서 넘어가는 것보다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가까워지는 게 나아.”
타시르는 말은 잘했으나, 히얼란은 그래도 안도가 되지 않았다. 타시르가 바람둥이라면 모를까, 별로 연애에서 신통한 효과를 거둔 적이 없지 않던가.
결국 히얼란은 말을 더 꺼내지 못하고 빈 찻잔만 들고 밖으로 나왔다.
무거운 걸음걸이로 걸어가고 있자니, 저 먼발치에 클라인 황자가 빠른 걸음으로 뛰어가는 게 보였다.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니, 클라인 황자가 제 호위와 시종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돌아오셨으니 오늘은 몸이 개운하시겠지! 얼른 안 가면 타이밍을 놓치잖아! 빨리! 얼른 와!”
서두르는 세 사람을 보다가 히얼란은 다시 한번 타시르의 방 쪽을 돌아보았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타시르 님은 머리는 좋지만, 폐하를 사랑하진 않는 거 같은데. 너무 이성적으로 계산만 하셔서. 괜찮으실까?’
본인 말처럼 천천히 곁에 다가가는 것도 괜찮긴 하지만…… 그러다가 폐하께서 타시르 님을 진짜 총애하게 되었을 때, 타시르 님이 폐하를 사랑하지 않는단 걸 폐하께서 아시면?
* * *
라틸은 그 길로 곧장 타시르를 찾아가려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약속대로 타시르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려고 하니, 용기가 나지 않는 탓이었다.
타시르는 한때 선황을 살해한 범인을 찾느라 이쪽을 조사한 적도 있는데. 로드니 어쩌니 하는 걸 알면 다시 의심하게 되지 않을까?
결국, 라틸은 마음을 바꾸어서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시종장을 불러 이야기했다.
“사블레 후작. 후궁 숫자가 많아져서 내가 세세하게 하나하나 통제하기가 힘들어지는데. 당장 국서를 뽑진 않더라도 책임자가 있으면 합니다.”
시종장은 점심시간에 급하게 올라온 보고서 몇 부를 라틸의 앞에 내려놓다가 놀라서 물었다.
“책임자요?”
“네. 한 달은 짧고. 두 달 단위로 돌아가면서 시켜보고 싶은데요.”
“혹시…… 누구를 국서로 뽑을지 고민하시는 겁니까?”
사블레 후작의 말에 라틸은 쑥스럽게 웃기만 했다. 민망해하는 표정이었으나, 실제로 라틸은 전혀 민망하지 않았다.
국서를 뽑자고 이러는 게 아니니까. 물론 누군가 일을 맡겼는데 놀라울 정도로 잘 해낸다면 국서감으로 좀 더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사블레 후작은 눈에 띄게 기뻐하며 물었다.
“그럼 누구에게 책임자를 시킬까요?”
질문을 하면서도 그는 당연히 라나문일 거라고 여겼다. 라나문 외엔 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까.
그러나 라틸은 잉크병 뚜껑을 돌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타시르에게 맡겨봐요.”
시종장은 알겠다고 대답을 했으나 영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다가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걱정스레 물었다.
“폐하. 타시르 님은 평민 출신인데, 첫 책임자로 운영하면 말이 나오지 않을까요? 라나문 님이나 클라인 님, 아니, 차라리 게스타 님께-.”
“아니. 타시르한테 시켜봐요.”
라틸 나름대로는, 며칠 전 카리센에서 타시르에게 한 약속. 모든 사정을 설명해 주기로 해 놓고서 아직도 말해주지 않은 게 신경 쓰여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라나문이 국서가 되기를 누구보다 바라고 있는 시종장을 초조하게 했다.
쉬는 시간. 시종장은 타시르에게 이 일을 알리기 위해 집무실을 빠져나와 하렘으로 걸어갔으나, 결국 참지 못해가고 라나문에게 먼저 가고 말았다.
“후작님?”
“급하게 의논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