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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같은데 (318/367)


318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같은데
2023.03.15.


아버지가 꼭두각시가 되었다고? 아이니는 당황해서 입을 뻐끔거리다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아버지가 꼭두각시가 되었으면 적들 손에 놀아나는 거 아닌가?”

“진정하세요.”

아낙차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아이니의 팔을 잡았다.


“적들은 그런 의도였겠지만 괜찮습니다, 황후 폐하.”

“어디가!”

“황후 폐하. 대리 황제는 황후 폐하이지, 다가 공작님이 아니에요.”

“!”

“다가 공작님의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건 맞지만, 그건 다 황후 폐하에게 명분이 있기 때문이지요. 다가 공작님이 꼭두각시가 되었다고 해서 황후 폐하까지 꼭두각시가 되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

아이니는 초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아버지와 반대로 갈 수 있을까?

게다가 적이 뭘 노리는지 모르겠지만, 하이신스를 치료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긴 하지 않던가.

아낙차는 두려움과 암담함에 몸을 떠는 황후를 힐긋 보고는 차분하게 설득했다.


“자, 황후 폐하. 다가 공작님이 흑마법사 이야기를 꺼낸 건 퍼퓸 로즈 상단이 함께 있을 때였답니다. 게다가 공작님은 그들이 떠나던 날 하루 동안 사라지셨지요.”

“맞아…….”

“그러니 우선 그 상단 사람들을 불러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어떤가요?”

“하지만 그중 문제가 된 세 명은 상단과 다른 쪽으로 갔다던데?”

“어쨌건 한때 일행이었지 않습니까. 정보를 알지도 모릅니다.”

아낙차의 또박또박한 말에 아이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알았다. 그들을 불러오려면 며칠이 걸리지?”

 

* * *



‘게스타가 슬슬 왔을 것 같은데.’

기르골이 무슨 꿍꿍이일까 싶어 손님들이 지내는 궁전 주위를 맴돌던 칼라인은 몇 시간이 지나자 정신이 피로해져서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다녀오셨습니까, 단장?”

인사하는 시종 겸 용병 부하에게 고개를 끄덕인 칼라인은 직접 문 두 개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발을 내딛는 순간. 그는 몸이 아래로 훌렁 빠지는 감각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

커다란 미끄럼틀에 갇힌 듯 그는 아래로 아래로 계속해 내려갔다. 안이 텅 빈 대나무 안에서 홀로 미끄러지는 거나 다름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내려가다가, 칼라인은 힘을 주어 미끈미끈한 벽에 양손을 박아넣었다.

그러자 몸이 멈추면서 그의 그를 둘러싸고 있던 동그란 미끄럼틀이 사라졌고, 몸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바닥을 몇 바퀴 구른 칼라인은 욕을 뱉으며 손으로 땅을 짚었다.

부드럽고 뜨거운 모래가 그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며 손이 모래 깊숙이 들어갔다.


‘모래?’

칼라인은 다른 손으로도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하얀 모래가 보였다.

황당해서 입을 벌리고 있자니, 저만치 먼 곳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줄지어 이동하는 게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 칼라인은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깜짝이야!”

사람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칼라인을 보고 기겁했다.

칼라인은 그들이 상인들이란 걸 알아보았다.

사람들은 칼라인을 도둑이라 생각했다가, 한 명뿐인 걸 알고는 조금 긴장을 푸는 눈치였다.


“누구시오?”

개중 하나가 물었다. 칼라인은 대답 대신 그들의 복식을 뚫어져라 보며 되물었다.


“여긴 어디지?”

“뭐?”

“여기가 어느 나라인가.”

“어느 나라라니. 여긴 당연히 디제트…….”

“젠장, 게스타.”

칼라인이 욕설을 뱉자 나라 이름을 알려준 상인이 그 어둡고 위압적인 분위기에 흠칫해 몸을 뒤로 뺐다.

칼라인은 이를 갈며 돌아섰다.

디제트는 타리움과 가장 먼 나라였다. 여우 가면 그 음침한 놈이 돌아오자마자 칼라인의 방 출입구에 여우굴을 파둔 것이다.

시종이 걱정하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단장님. 이번에 폐하께 이런 말 한 걸 알면 게스타 그자가 또 집요하게 복수하려 들 텐데요…….

칼라인은 전 세계 지도를 머릿속으로 떠올려 본 다음, 타리움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방향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 * *



“응? 칼라인은?”

기르골이 들어오기 전에, 기존 후궁들을 다 데리고 오랜만에 다 같이 식사나 하자 싶어 저녁에 모이란 명령을 내렸는데.

막상 와서 보니 칼라인이 보이지 않았다.

라틸이 자리에 앉으며 묻자, 모인 후궁들이 서로를 눈짓하며 고개를 저었다. 자기들은 모른단 뜻이다.

라틸은 칼라인과 오래전부터 알아 온 듯한 게스타를 보았다. 게스타는 라틸의 눈길을 받자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폐하.”

“그래?”

라틸은 고개를 기웃했으나,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나 동료라고 해서 행방을 하나하나 다 알진 않지.

* * *

식사하는 내내 분위기는 괜찮은 편이었다.

라틸은 누가 말을 하든 귀 기울여 들어주었고, 게스타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라틸이 말하면 홀린 듯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쪽은 타시르와 클라인이었는데, 가끔가다 대신관이 열정적으로 참여하곤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라나문은 대화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남들의 대화를 즐겨 듣지 않는데, 머리 아픈 상황에서 억지로 대화에 맞춰줄 마음도 없거니와, 그가 자칫 대화에 잘못 끼면 분위기 전체가 삭막해지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식사가 끝나갈 즈음이 되자 라나문은 조금 초조해졌다.

끼기 싫어도 말을 좀 보탤 걸 그랬나? 분위기가 가라앉아도 나서볼 걸 그랬나?

그러나 이미 식사 시간은 거의 끝나갔고, 라틸은 누구의 방에서 자지 않고 돌아갈 생각 같았다.

라나문은 라틸에게 소화시킬 겸 잠시 같이 걷자고 말을 할까 말까 주저하며 타시르 쪽을 힐긋 보았다. 보통 이런 건 타시르가 많이 하니까.


“라나문?”

그런데 뜻밖에도 입가를 닦은 라틸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라나문을 불렀다.

라나문이 얼결에 따라 일어나며 보자, 라틸이 손을 내밀었다.


“잠시 같이 걸을까?”

후궁들의 시선이 동시에 라나문을 향했다.


“그러지요.”

라나문은 생각보다 앞서 대답부터 하고, 너무 초조해하는 티가 나지 않도록 차분하게 라틸 쪽으로 다가갔다.

라나문이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밀자 라틸이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라나문은 어리둥절해져서 자신의 시종인 카르둔을 보았다. 카르둔은 이미 입이 귀에 걸릴 만큼 크게 웃고 있었다.


“저쪽으로 가지.”

라틸이 어느 방향을 가리키자, 라나문은 여전히 머리가 굳은 채 그쪽으로 움직였다.

말없이 조금 걸어간 후에야 라나문은 지금 자신에게 기회가 왔단 걸 알았다.

국서가 되고 싶단 라나문의 말에, 타시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충고했다.

라나문은 그 말이 옳다고 여기고서, 머릿속으로 자신이 그간 읽은 연애 조언 서적들을 빠르게 뒤졌다.

좋은 인상을 남길 방법…… 호감 가는 인상…… 두근거리는 마음…… 연애의 시작…… 친구에서 연인이 되는 법…….

가까스로 라나문의 머릿속에 조언 하나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상대의 열정적인 모습에 끌린다

라나문은 속으로 수긍했다. 맞다. 생각해보니 그는 라틸 앞에서 늘 게으르고 의욕 없는 모습만 보여주었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그의 얼굴을 가지고서도 라틸이 별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 건지도 몰랐다.

생각을 마친 라나문은 힐긋 옆을 보았다. 라틸은 뭘 생각하는지 초조하게 입술을 씹고 있었다.

그러다가 라틸도 슬쩍 라나문을 보았는데,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웃는 게 아닌가.

분위기가 꽤 괜찮다고 생각한 라나문은 조심스럽게 라틸에게 자신의 의욕적인 모습을 조금 어필해보았다.


“폐하. 아직 어두운 존재들이 나타난 건 아니지만, 무엇이든 방비해서 나쁠 게 없다고 봅니다.”

“응?”

“지금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평화로울수록 더욱 방어를 튼튼히 해야 하지 않습니까. 카리센 좀비 사건도 있었고요.”

“…….”

“그래서, 제게 접근했던 그 단백이란 성기사단장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는 건 어떨까 합니다.”

라나문을 어떻게 유혹해야 그가 대적자 노릇을 안 하려나, 생각 중이던 라틸은 청천벽력 같은 발언에 깜짝 놀라 외쳤다.


“하지 마. 그러지 마. 그런 거 하지 마.”

“무슨 말씀이신지…….”

그 노골적인 거부에 라나문이 주저하자, 라틸은 자신이 너무 대놓고 대적자 반대파란 걸 보여주었단 생각에 말을 슬쩍 돌렸다.


“난 사실 그런 거 다 옛날얘기라 생각한다. 실제라면 기록이 남았겠지. 게다가 좀비도 별로. 상대하기 어렵지 않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래. 그러니 넌 그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라나문. 미리 대비했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그것도 별로지.”

“?”

 

* * *

라나문은 라틸의 말을 수긍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하긴. 라틸이 라나문에게 한 말은 일국의 황제가 하기에 적절하지 못한 말이기도 했다.

다른 왕이 그 말을 했다면, 라틸은 상대를 우습게 여겼을 것이다.

어쨌든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기에, 라틸은 라나문을 보내자마자 집무실로 돌아와 서넛을 불러다 라나문의 의지를 알리고 물었다.


“어쩌지? 라나문이 갑자기 정의감이 깨어나나 봅니다. 갑자기 대적자 일에 의욕을 보입니다.”

“죽이겠습니다.”

라틸은 휙 돌아서는 서넛을 얼른 붙잡았다.


“절대 안 됩니다. 다른 방법 없습니까?”

“유혹해서 다른 생각 못 하게 하신다면서요.”

“그게 쉽게 되면 내가 이러고 있겠습니까?”

라틸은 민망해서 왈칵 짜증을 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라나문을 유혹하기 위해 일부러 따로 시간을 내어서 산책하자 했는데. 라나문은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걸어가는 내내 정면만 바라보았다.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 말이 일 얘기고.

자기가 지원해서 온 거라면서. 라나문은 라틸과 둘만 있는 시간에 별 의욕이 없어 보였다.

그 모습조차 아름다워서 더 짜증 났지만. 그러다가 간신히 꺼낸 얘기가 대적자 얘기라니…….

서넛은 라틸이 기운 없는 모습을 보며, 이 상황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아리송해졌다.

하지만 라틸이 계속 시무룩하게 둘 수는 없었다. 게다가 라나문이 대적자의 임무를 하려 드는 건 서넛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면 라틸이 지키고 싶어 하는 이 평화가 깨질 테니까.

서넛은 잠시 생각하다가 아이디어를 냈다.


“칼라인 님에게 궁중 암투로 괴롭히라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 성격이 암투할 성격입니까. 게다가 지금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게스타 님은요?”

“암투는커녕 머리만 굴려도 들킬 겁니다.”

“…….”

“왜 표정이 그렇습니까, 서넛 경?”

“아닙니다. 그러면 할 일을 몰아 줘서 바쁘게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다른 데 신경을 아예 못 쓰도록 말입니다.”

“그건…… 좋은 방법이네!”

 

* * *

그 시각.

퍼퓸 로즈 상단을 불러온 아이니는 비밀스러운 일을 처리하는 이들과 아낙차를 시켜 그들을 조사해보라 지시했다.

퍼퓸 로즈 상단주는 처음엔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다가 공작저를 나와 헤어진 세 사람’에 대해 말하라 추궁하자 미리 입을 맞춰둔 대로 발뺌했다.


“상단에 훈련을 하러 들어왔다가 나간 사람들입니다. 이후 공작저에 며칠 갇혀 있더니, 도저히 못 해 먹겠다고 나가 버렸지요. 저도 그 외엔 아는 게 없습니다. 정식 소속도 아니었으니까요.”

상단주는 어릴 때부터 봐온 타시르를 보호하기 위해서, 헤어진 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말하지 않으려 애썼다.

아낙차는 그 모습을 보다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곁에 선 사람에게 눈짓했다.

그 사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들어 상단주를 베어버렸다.

상단주가 풀썩 앞으로 쓰러지고 가려진 몸에서 피가 배어 나오자, 덜덜 떨던 상인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피가 흘러 아낙차의 신발에 묻자, 아낙차는 발을 들어 신발 바닥에 묻은 피를 쓰러진 상단주의 등에 닦으며 다시 물었다.


“너희도 아는 게 없어?”

상인들은 쓰러진 상단주를 보며 계속 떨었다.

마침내 한 명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세, 셋, 셋 다 타리움 사람이라 들었어요.”

“타리움?”

“네. 직접 들은 건 아닌데, 둘이 대화하는 걸 들었, 들었어요. 둘은 모르겠는데, 하, 하나는, 한 명은 앙제스 상단 후계자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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