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속이 보이지 않아
(326/367)
326화. 속이 보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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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화. 속이 보이지 않아
2023.04.12.
다음 날 아침.
라틸이 눈을 뜨자 기르골이 라틸의 머리카락 여기저기에 꽃을 꽂아주다 말고 웃으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야, 제자님.”
라틸은 멍하게 그를 올려다보다가 열이 올라와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쳤어!’
후궁으로 들일 생각은 했지만 그와 이렇게 저렇게 애정을 나눌 마음은 없었다.
뭐, 언젠간 나눌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빨리 나눌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조명으로 가득한 밤의 그 아득한 분위기와 사방에 가득한 꽃들, 그윽한 향기, 그리고 베일을 벗고 모습을 드러낸 아름다운 그의 모습과 정신을 차리기 전 퍼부어진 열정적인 키스까지.
라틸은 거의 홀린 듯 거기에 따라가고 말았다. 라틸은 미남에 약하단 자신의 세간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자책했다.
‘그나마 중간에 끊어낸 게 다행인가.’
“머리에 꽃 그만 꽂아.”
“목소리가 쉬었어, 아가씨. 나 때문인가?”
라틸은 끙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숙취한 기분이었다. 지독한 꽃향기 때문이다.
라틸은 머리카락을 흔들어 꽃을 털어내며 기르골에게 당부했다.
“기르골. 이제 진짜 후궁이 되었으니까, 꼭 지켜야 할 이야기 하나 할게.”
“모든 말해봐, 제자님.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그런 이야기 아니거든.”
“일단 해봐.”
기르골의 표정이 맑았다. 적어도 꿈속에서처럼 슬퍼 보이진 않는다.
눈동자 투명도 점검. 맑네.
동공 크기 점검. 보통.
기르골의 상태를 체크한 라틸은 말해도 좋겠단 판단을 내리고서 진지하게 당부했다.
“다른 후궁들을 절대로 괴롭히거나 죽이면 안 돼. 알았어?”
“꽃처럼 대해주면?”
“먹지 마.”
“가꿔주는 건?”
“무슨 뜻이야?”
“먹진 않고. 꽃처럼 가꿔주는 거.”
라틸은 기르골이 혼자 있을 때 화분에 심어둔 꽃을 어떻게 관리했던가 떠올렸다. 나름 물을 주면서 잘 관리했던 것 같았다.
“좋아.”
라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괜찮아.”
* * *
점심때가 되자마자 라틸은 자신의 허락을 후회했다.
“폐하. 기르골 님이 하렘 정원에 땅을 파고 계신다고 합니다.”
한 시종이 전해준 이야기에 라틸은 기겁해서 점심 먹는 것도 잊고 하렘으로 달려갔다.
하렘에 가보니 정말로, 정원 한가운데를 기르골이 열심히 파고 있었다. 거의 나무라도 심는 수준으로.
“뭐 하는 거야?”
당황한 라틸이 다가가며 묻자, 기르골은 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가꿔주려고. 묻어서.”
“!”
라틸은 기르골이 아침에 한 말을 떠올리고 기겁했다.
‘다른 후궁들을 묻어 버리려고?!’
라틸은 황급히 삽을 뺏어 들었다.
“안 돼.”
기르골은 실실 웃으면서 물었다.
“왜?”
웃고는 있지만, 라틸이 자기 취미 생활을 방해하기라도 했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움찔했으나 라틸은 단호하게 당부했다.
“내 후궁들은 식물이 아니야. 묻어서 가꿀 필요 없어. 아니, 네가 애들을 가꿀 필요는 아예 없어. 그냥 건드리지 마.”
“그러면 친해지지 않을 텐데.”
라틸은 삽을 그 자리에서 부순 다음 기르골에게 도로 건넸다.
“친해지지 마. 그댄 나랑만 친하면 되잖아?”
* * *
라틸은 기르골을 달래느라 한 말을 그로부터 네 시간 뒤에 또 후회했다.
어젯밤, 다른 후궁들의 충격에 젖은 표정이 떠올라서 우선 라나문부터 달래기 위해 하렘에 가는 도중이었다.
“안녕, 제자님.”
하렘으로 가는 회랑에 기르골이 서 있더니 이렇게 부르는 게 아닌가.
기르골의 뱀파이어 시종은 낮에는 보이지도 않더니 드디어 뒤에 서 있었다.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기르골이 자신의 온실을 가리키며 웃었다.
“놀아줘, 아가씨.”
“그대 시종이랑 놀아.”
라틸이 단호하게 말했으나 기르골은 고개를 젓고 버텼다.
“난 아무하고도 친해지지 말라며, 제자님. 그러면 제자님이 나랑 놀아줘야지.”
라틸이 한소리를 하려는데 기르골이 셔츠를 뜯더니 한 손으로 빙글 돌리다가 훌쩍 벗어버렸다.
달빛 아래에서 그의 피부가 놀라울 정도로 매끄럽게 반짝였다.
“…….”
라틸은 입을 다물고서 그를 노려보다가 조용히 따라갔다.
* * *
“그게 무슨 소리지?”
책상 앞에 앉아 꾸역꾸역 가을 축제 계획안을 짜던 라나문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라나문이 서늘한 시선을 던지자, 카르둔은 울상을 지었다.
“폐하께서 라나문 님께 가신다 하셨는데, 기르골 그 빌어먹을 작자가 도중에 벌거벗고 유혹해 폐하를 데려갔답니다. 그 뱀 같은 작자, 체면 따위는 있지도 않은가 봅니다.”
라나문은 입을 벌리고 말을 듣다가 하,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뱉었다.
카르둔은 모르겠지만 라나문은 기르골이 대적자의 스승이란 걸 알다 보니 정말로 이 일이 황당무계하게 여겨졌다.
대적자의 스승이라는 전설 속 존재가 밖에서 옷을 벗고 황제를 유혹해?
그래서 대적자의 아내를 데려가버려? 그게 대적자의 스승이라고?
사람을 유혹해 타락시킨다는 무슨 전설 속 몬스터가 아니라?
“도련님. 어쩌지요? 염치가 없는 놈이다 보니 부끄러움도 없고. 그런 식으로 헐벗고 계속 유혹하면…… 도련님이 그런 작자와 똑같이 굴 수도 없지 않습니까.”
“…….”
라나문은 귀찮은 마음을 억지로 끌어모아 보고 있던 가을 축제 계획안을 내려다보았다.
그에겐 이런 걸 쥐여주어 놓고 황제는 지금 아름다운 새 후궁을 끼고 놀고 있다.
라나문은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 * *
다음날. 평소보다 좀 더 느긋하게 일어난 라나문이 뜻밖의 지시를 했다.
“완두콩으로 만든 수프를 가져와라.”
“네?”
카르둔은 놀라서 라나문을 보았다.
“하, 하지만 도련님은 완두콩을 안 드시잖아요.”
“가져와라. 다른 건 섞지 말고.”
카르둔은 불안해졌다. 라나문이 싫은 음식을 먹는 건, 그보다 더 싫은 일을 하기 직전이었다.
카르둔은 라나문이 저러는 이유를 몰랐지만 시키는 대로 완두콩 수프를 가져왔다.
라나문은 완두콩 수프를 한 숟가락도 남기지 않고 다 먹은 후, 입을 씻은 다음 처소를 나섰다.
그 길로 곧장 라나문이 향한 곳은 새로운 후궁이 받았다는 온실이었다.
“도, 도련님. 가서 뭐 하시려고요?”
카르둔이 걱정되어 물었지만 라나문은 말없이 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카르둔은 혹시 아직 황제가 있을까 봐 염려했지만, 라나문은 황제가 자신의 일정을 되도록 철저히 지키려 한단 걸 알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이미 업무 시간이니 새 후궁이 왔단 이유로 여기에 머무를 리가 없었다.
“응? 이게 누구야?”
예상대로 기르골의 침실에는 그 하나뿐이었다.
카르둔은 다른 후궁들과 다른 구조 탓에, 방문을 알리고 뭐고 하지도 못하고 바로 남의 침실에 들어오자 얼떨떨해서 눈을 굴렸다.
“나가 있어라.”
라나문은 그런 카르둔을 내보냈다.
기르골은 침실에 나른한 자태로 누운 채 그 모습을 웃는 모습으로 지켜보았다.
라나문이 뭘 하든 지켜봐 주겠단 태도였다.
느긋한 태도는 우위를 점한 자처럼 보여 거슬렸으나, 라나문은 침착하게 굴었다.
그는 기르골에게 반응하는 대신, 카르둔이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는 대적자의 스승이라 했지.”
“그렇지. 왜, 예비 제자님?”
“내게 가르쳐라.”
“!”
“강해지는 법.”
잠시 의외라는 듯 라나문을 바라보던 기르골의 눈꼬리가 가늘게 접혔다.
“왜 마음이 바뀌었을까.”
* * *
“폐하.”
각국의 정보원들로부터 온 보고서를 읽다가, 라틸은 서넛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던 서넛이 어느새 곁에 돌아와 허리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은근히 할 말이 있다는 듯.
“왜 그럽니까?”
라틸이 묻자, 서넛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칼라인 님에게서 소식이 왔습니다. 기르골이 하렘 연무장에서 라나문을 훈련시키고 있다 합니다.”
“!”
라틸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휙 고개를 돌렸다.
“정말입니까?”
“네.”
라틸은 펜을 쾅 소리가 나게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비서들이 놀라서 라틸을 바라보았다.
라틸은 눈을 멍하게 깜빡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기르골. 후궁이 되면 대적자 스승 노릇을 안 하겠단 거 아니었어?’
라틸은 눈가를 문지르며 기르골과 자신의 대화를 하나하나 다 되새겨 보았다.
어떤 건 생각이 잘 났지만 어떤 건 어렴풋할 뿐 생각이 다 나지 않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기르골이 라나문의 스승이 안 되겠단 소리는 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아이니에게 가지 않겠다고는 한 것 같은데…….
‘끝까지 방심하지 말라 했던가.’
* * *
“기르골은 원래 그런 놈입니다, 주인. 그자가 하는 말은 믿어선 안 됩니다.”
휴식 시간, 라틸은 칼라인과 서넛, 게스타를 불렀다.
칼라인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라틸은 인상을 찡그렸다. 도미스의 기억 속에서 그가 의도치 않게 도미스에게 몇 번 충격을 주긴 했지만…… 도미스를 속인 적은 없던 거 같은데.
라틸은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자신과 한 침대에서 그토록 행복하게 웃고서 이틀 뒤에 라나문을 가르치고 있다니.
원래도 속을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더욱 그랬다.
“가서 왜 라나문을 가르치는지 물어보면 또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겠지요.”
칼라인의 목소리에는 짙은 혐오감이 배어 있었다.
라틸은 게스타를 보았다. 게스타는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않은 듯 그저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라틸은 서넛을 보았다. 서넛은 조용히 대화를 들으며 라틸을 보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라나문을 죽여야 합니다.”
* * *
그 시각. 아이니는 친히 미셜 후작을 데리고 신전으로 갔다.
“세상에, 대적자님.”
그 신전의 책임자인 고위 신관은 아이니를 보자 감격해서 친히 달려 나와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황후 폐하’가 아니라 ‘대적자님’이라고 부르면서.
그 호칭에 아이니는 놀랍게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황궁에서 아버지와 아버지의 측근들, 하이신스의 측근들 사이에서 샌드위치처럼 눌린 황후가 아니라, 오롯한 자신을 누군가 불러준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은은히 찾아온 그 감정을 느끼기 전, 밖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무슨 소리냐.”
아이니는 고위 신관과 말을 나누려다가 그에게 ‘실례’ 하는 표시로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서 부하에게 물었다.
미셜 후작도 뒤를 돌아보고, 고위 신관도 아이니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부하는 그렇게 대답하고서 돌아섰다. 하지만 부하가 나가기 전, 한발 앞서 다른 신관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웃으면서 알려주었다.
“황후 폐하. 다가 공작님께서 미셜 후작님께 힘이 되고 싶으시다고, 직접 여기로 오셨습니다.”
신관의 목소리는 밝았으나 아이니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버지가 오시다니? 누가 아버지께 이 이야기를 했느냐!”
미셜 후작은 아이니가 자신을 쳐다보자 당황해서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다가 공작님이 몸이 좋지 않으시니 신경 쓸 일을 만들지 말라 하셔서요.”
다른 사람들도 모두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아이니는 긴 소매 안에서 주먹을 틀어쥐었다.
식시귀인 아버지가 신전에 오는 건 좋지 않다.
신관들이 미셜 후작이 삿된 존재인지 아닌지 검토하다가 갑자기 다가 공작도 해보자 권하진 않을 것이다. 간이 배 밖에 나오지 않고서야.
하지만 혹시 모르지 않는가. 누군가 어두운 기운을 느낄 수도 있고.
이런 여러 가지 경우를 떠올리고서 일부러 아버지를 데려오지 않은 것인데. 어째서……!
밖으로 나가자, 마차 밖으로 나온 다가 공작이 자신을 가로 막고 선 아이니의 호위들에게 화를 내는 게 보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내가 못 올 곳에 온 것도 아니고. 내 딸과 내 친우가 여기 있단 걸 알고 왔는데 날 가로막다니.”
신관들과 신전에 온 백성들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모여들어 수군거렸다.
다가 공작은 어떻게 해서든 신전 안으로 들어가려 애쓰고 있고, 황후의 부하들을 이를 막고 있다.
사람들은 왜 황후의 부하들이 공작이 신전에 들어가는 걸 막나 싶어 어리둥절한 듯했다.
아이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버지가 지금 고집부리는 일. 혹시…… 이것도 라트라실이 아버지를 조종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