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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화. 모두가 질투하는 기르골 (329/367)


329화. 모두가 질투하는 기르골
2023.04.23.



 
헤움은 당황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

아낙차와 트라탈라 황자는 라트라실 황제에게 패배해 이 처지가 되었다.

물론 트라탈라 황자를 식시귀로 만든 건 그를 로드로 이용하려 했던 무리들이지 라트라실 황제가 아니지만…….

어쨌건 라트라실 황제가 트라탈라 황자를 사형시키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터.

당연히 원한을 가졌고 복수를 노릴 거라 여겼는데?

목만 남은 헤움의 그 멍한 표정을 보다가 아낙차는 웃음을 터트렸다.


“복수는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거야, 황자. 누가 복수를 인생의 목적으로 잡겠어? 그것만큼 허무한 게 어디 있다고. 인생을 남에게 거는 건데. 안 그래?”

헤움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그럼 당신들은…….”

“우리가 원하는 건 황위란다.”

“!”

헤움은 뜻밖의 말에 멍하게 있다가 이를 갈며 외쳤다.


“그러면 타리움에서 싸워라! 왜 남의 나라에서!”

“남의 나라니까?”

“뭐……?”

“우리는 타리움 사람이잖아, 황자. 카리센에서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 가야지.”

아낙차가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에 헤움은 기가 막혔다.

저 몹쓸 모자……! 뒤에서 온갖 악한 짓을 하는 주제에 자기 나라를 향한 애국심은 강하다니.

그럴 수도 있긴 하지만, 카리센 사람 입장에선 정말 민폐였다.


“무슨 짓을 꾸미든 타리움 황족인 너희가 카리센 황족이 되진 못할 거다.”

헤움은 이를 갈았지만, 아낙차는 더 대꾸하기 귀찮은지 그의 머리 위에 담요를 덮어버렸다.

* * *

카리센에서 목만 남은 헤움 황자가 타리움 사람들을 욕하는지 뭐 하는지 알 길이 없는 라틸은 지금 골치 아픈 새 후궁을 달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기르골에게 계속 휘둘릴 수 없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어쨌건 그를 당장 풀어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라틸은 비서들이 내놓은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살피다가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자신이 생각한 대로 지시했다.


“수도 안에서 파는 꽃을 전부 다 사서 기르골의 온실에 넣어주어라.”

“전부 말입니까?”

파격적인 명령에 비서들이 놀랐지만, 라틸은 꽃 정도로 기르골을 달랠 수 있다면 차라리 안심이라 여겼다.


“그래. 전부다. 꽃이면 된다. 꽃 없는 식물은 안 사도 괜찮아. 그자는 꽃을 좋아하니까.”

그로부터 몇 시간 동안, 궁전에서 나온 사람들은 황제의 명에 따라 수도 전체를 돌아다니며 모든 꽃을 사들였다.

당연히 이 광경은 사람들이 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사람들은 꽃다발을 한가득 실은 마차가 황궁으로 연달아 들어가는 걸 보며 혀를 내둘렀다.


“기르골이라면 최근에 새로 들어온 후궁 아닌가.”

“평민 출신이라 들었는데요. 이렇다 할 뒷배도 없고.”

“그런데 폐하께선 그자에게 주시려 저 많은 꽃들을…….”

“정말 대단하네. 후궁들 중 조건이 가장 나쁜데. 폐하께서 가장 챙기시는 거 같지 않아?”

“그러니까. 다른 후궁들, 심지어 인어가 왔을 때도 이런 건 안 하셨잖아.”

“인어는 아직 후궁 안 됐어.”

사람들은 가십지에 올라온 기존 후궁들의 초상화를 떠올린 뒤, 그들을 다 제쳐 놓고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후궁은 대체 어떤 얼굴일까 상상해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깨달았다. 아직 기르골의 초상화를 본 적이 없다. 므라딤의 초상화도.

이 분위기를 누구보다 빠르게 읽은 건 황제의 후궁 특집을 연달아 내놓고 있는 가십지 직원들이었다.


“기르골이란 자, 초상화를 입수해 와!”

“뭐? 담이라도 넘어가! 넘어가서 얼굴을 그려 오라고!”

“황궁에 아는 사람 없어? 인맥 많다며!”

“초상화를 그려야 해. 가장 먼저!”

누구든 기르골의 초상화를 가장 먼저 입수하면 그 가십지의 판매 부수는 배로 뛸 게 뻔했다.

기자들은 소속 화가들을 데리고 황급히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기르골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한 행동이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킬지 짐작하긴 했으나, 라틸은 사람들이 그 정도로 요란을 부릴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라틸은 가십지에 큰 흥미가 없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읽어보니 재밌긴 했지만, 안 그래도 내부의 여러 가지 일거리로 머리가 폭발할 것 같은데, 자신의 후궁들을 두고 이렇다저렇다 말하는 걸 챙길 열정까진 들지 않았다.

라틸은 기르골의 마음이 풀리기를 기다리며 집무실에서 하던 일만 마저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나 일했을까.


“폐하. 타시르 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시종이 들어와 타시르가 방문했다고 알렸다.

라틸은 사람들을 내보내고 타시르만 들여보냈다.

무슨 일로 찾아왔나, 싶어서 슬쩍 머리카락을 가다듬고 있자니, 타시르는 품 안에 굵은 서류 뭉텅이를 안고 들어와 라틸 앞에 내려놓았다.


“짠. 제가 정리한 하렘 관련 사안들입니다, 폐하.”

“……전부다?”

“한 번 확실하게 정리를 해야 다음부터 점검하기 편할 거 같아서요. 중간에 빠지거나 그런 것들도 있을 테고요.”

“잘했어.”

라틸은 서류를 들춰보며 감탄하다가, 타시르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걸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라틸은 타시르가 혹시 온실에 들어간 꽃다발 건에 관해 물으려나 싶어 주춤했다.

그러나 타시르는 전혀 다른 일을 물었다.


“이번에 새로 받는 황궁 궁인들이요, 폐하.”

“그래.”

“하렘 쪽에도 신입들이 들어오는지요?”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렇군요.”

라틸은 타시르가 꽃다발 이야기를 하지 않자 안심해서 어깨에 힘을 풀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말했다.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이번에 사람을 들일 때. 혹시 모르니 좀 조심하고 잘 신경 써야겠다.”

“왜 그러십니까? 물론 당연히 신경 쓸 거지만요.”

“외부에서 므라딤과 기르골 초상화를 그리려고 난리가 나 있대.”

“오호. 그렇군요.”

타시르는 꽃다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이쪽에서 먼저 기르골 이야기를 해버렸다.

라틸은 말을 하고 나니 타시르에게 자신이 새 후궁들을 잘 챙겨주라고 말한 기분이 들어서 멈칫했다.

괜히 타시르가 준 보고서를 만지작거리다가 슬며시 눈을 들어 보니, 타시르가 어느새 코앞에 턱을 괴고 웃고 있었다.


“!”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뜨자 타시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가자미 하세요. 왜 눈치를 보십니까?”

기르골이 들어와서 네가 서운할까 봐. 라틸은 이 말을 할까 말까 주저했다.

말을 하자니, 말을 한다고 기르골을 내보낼 것도 아니라, 타시르를 달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말처럼 여겨졌다.

결국 라틸은 기르골 이야기를 하는 대신 걱정스럽게 물었다.


“지금은 좀 괜찮아졌느냐? 상단주…….”

타시르는 눈썹을 치켜올리다가 입꼬리를 미묘하게 올렸다.


“아직 좀 뒤숭숭합니다.”

“…….”

라틸은 마음이 아파서 종이에서 손을 놓고 그의 손을 잡다가, 그냥 아예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타시르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꽃 좋아하는 새 후궁에 취하셔서 절 잊어버리신 줄 알았는데요.”

“누가 오든 널 어떻게 잊겠느냐. 몇 사람이 오든 널 잊진 않아.”

“누가 또 오는 건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타시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입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잠시 밖으로 나가 산책로를 거닐었다. 라틸은 주저하다 속삭였다.


“너는 짐이 가장 아끼는 후궁이다.”

타시르는 부드럽게 웃고서 라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라틸은 그를 따라서 웃었다.

이전에도 타시르와 있으면 편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에. 그런 감정이 카리센에 다녀온 후로는 조금 더 깊어진 것 같은데. 착각일까?


‘그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타시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좋아하는 건데. 이쪽이 타시르를 사랑하게 되어버리면 그때부터는 타시르와의 거리가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 되는 거 아닌가.

* * *



“…….”

기르골은 황제가 웬 여우처럼 생긴 놈과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가 쑥스러워하며 말하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때. 뒤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기분인진 알겠지만 사고 치진 마라.”

경고하는 목소리였다.

기르골은 미소를 띠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쪽에서 당장이라도 떠밀어 버리고 싶단 얼굴로 서 있는 건 그의 오랜 지기인 칼라인이었다.


“칼라인. 나의 친구.”

기르골은 히죽 웃으면서 그에게 팔을 벌렸다.

끌어안을 것 같은 자세였으나, 칼라인은 그의 동공이 평소보다 좀 더 커진 걸 눈치채고 뒤로 반보 물러났다.


저 미친놈은 사람들 앞에서 뱀파이어의 힘으로 싸우면 안 된단 자제력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한다. 미칠 기미가 보이면 알아서 조심해야 했다.


“우리가 한 아내를 두는 사이가 될 줄은 몰랐어.”

아니면 이쪽이 먼저 미쳐서 저자를 공격해 버리거나.

칼라인의 관자놀이에 파랗게 혈관이 두드러지자, 기르골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런데 저 밑에서 내 제자님과 끌어안고 있는 인간은 이름이 뭐지, 칼라인?”

 

* * *

며칠 뒤.

라틸이 라나문이 올린 가을 축제 보고서를 살피고 있는데, 시종장이 새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찜찜한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 이번에 새로 궁인들을 들이는데, 윌랑 왕자가 자기 하인 셋을 기르골 님에게 보내고 싶다 청합니다.”

“응?”

라틸은 바쁘게 눈을 움직이다가 황당해서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누가 누구를 어디에 보내?”

못 들어서 되물은 건 아니었다. 들었는데 어이가 없어서 되묻는 것일 뿐.


“윌랑 왕자가 왜 기르골에게 하인을 보내는데?”

“본인 말에 따르면, 기르골 님에게 딸린 하인 수가 너무 적다더군요. 기르골 님은 자기가 여기로 데려온 사람이기도 하니, 잘 살라는 선물로 하인을 붙여주고 싶답니다.”

라틸은 목에 힘을 주고 고개를 뒤로 뺐다.


“잘 살란 선물일 리가. 암살자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요.”

시종장은 그래도 상관없단 투로 대답했다.

라틸은 눈썹을 찡그렸다. 윌랑 왕자가 기르골한테 그런 호의를 베풀 이유가 없는데. 라틸이 기르골을 찾아갈 때마다 늘 불쾌해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어차피 기르골은 후궁이 됐고 물릴 수 없으니 기르골과 인맥을 다져두려는 건가?”

잠시 생각해보다가 라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르골이 받아들이겠다면 보내고, 아니면 보내지 말라 해요.”

 

* * *

시종장이 보낸 사람을 통해 라틸의 대답을 들은 윌랑 왕자는, 자신의 앞에 선 하인 셋을 득의양양하게 보았다.

이 중 둘은 진짜 하인이지만, 다른 하나는 남장한 무희 아페라였다.

남장을 해도 그 빼어난 외모는 그대로여서, 아페라는 동화책 속 등장인물처럼 보였다.

윌랑 왕자는 만족해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잘됐군. 기르골은 분명 받으려 하겠지. 데려온 시종이 하나뿐이라니까.”

윌랑 왕자는 그 길로 곧장 기르골을 찾아갔다.

처음부터 아페라를 데려갈까 생각도 했지만, 직접 보고 충격을 받으라고 일부러 아페라는 데려가지 않았다.

그래도 막상 찾아가다 보니 ‘너무 심한가?’ 하는 후회가 슬며시 들었으나, 온실에서 만난 기르골이 그가 왔는데도 인사는커녕 수북이 쌓인 꽃에 물만 주는 걸 보자 그 미약한 후회조차 싹 사라졌다.


‘건방진 자식.’

처음 접근할 때는 거의 운명이 이끈 소울메이트라도 되는 양 다가와 놓고서는.

윌랑 왕자는 기르골의 무시에 속이 뒤틀렸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서 제안했다.


“늦었지만 후궁이 된 걸 축하한다, 기르골.”

“반지가 너무 커서 무거워 도련님. 후궁 노릇도 쉽지 않아.”

‘이 자식이……!’

“축하는 받아들일게, 도련님.”

기르골이 화사하게 웃는 모습에 다시 속이 뒤틀린 왕자는 표정을 감추려 일부러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아보니 아직 네겐 하인이 배정되지 않았던데. 전에 넌 윌랑 사람이라 그랬지? 그래도 같은 나라 사람이 도와주는 게 편할 거 같아서 하인을 세 명 정도 네게 보내주마.”

“내가 그랬던가?”

“뭐?”

“난 윌랑 사람 아닌데, 도련님.”

“이 자식, 국적도 속인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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