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지독하게 아름다운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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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화. 지독하게 아름다운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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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화. 지독하게 아름다운 남자
2023.04.26.
윌랑 왕자가 참지 못하고 비속어를 뱉자, 그를 따라온 시종이 뒤에서 살짝 옷을 잡아당겼다.
안 됩니다, 왕자님. 아페라를 저자에게 보내러 온 거잖아요. 싸우고 나서 하인을 보내주겠다고 하면 당연히 꿍꿍이가 있다 생각해 안 받는다고요!
시종도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한 발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다 보니, 윌랑 왕자만큼 흥분하진 않은 덕에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것이었다.
윌랑 왕자는 퍼뜩 제정신을 차리고서 얼른 자기가 한 말을 수습했다.
“미안. 네가 우리 우정을 이용했다 생각해 잠시 울컥했다. 하지만 아니겠지. 자넨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시종은 윌랑 왕자가 좀 더 목소리에서 힘을 빼줬으면 싶었지만, 끼어들지 못하고 기르골의 눈치만 살폈다.
다행히 기르골은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승리감에 취한 건지, 기르골은 물뿌리개를 들고 이리저리 물만 뿌리다가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하인은 잘 받을게, 왕자님. 어느 나라 인간이건 맛은 별로 신경 안 쓰거든.”
“뭐? 맛?”
순간 튀어나온 섬뜩한 말에 윌랑 왕자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는 순간. 기르골이 묘한 미소를 짓고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무슨 소리야 저게?”
윌랑 왕자는 시종에게 작게 물었다. 시종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습니다. 워낙 이상한 소리를 자주 하잖아요.”
* * *
해가 지고 서서히 하늘에서 붉은빛이 가실 무렵.
몸을 숨기고 하루를 보낸 자이오르는 이불 정리를 하기 위해 온실 안에 있는 기르골의 방을 찾아왔다가,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그곳에 웬 요정처럼 생긴 아름다운 하인이 먼저 이불 정리를 하고 있던 것이다.
새하얀 이불이 흔들릴 때마다 드러났다가 가려지길 반복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이 ‘이게 현실인가 환상인가’ 헷갈릴 만큼 아름다웠다.
멍하게 그 모습을 보다 눈을 비비고 있자니 맑게 웃는 소리가 났다.
자이오르는 손을 내렸다. 그 하인이 이불 정리를 끝내고서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왜 그러고 계세요?”
하인의 질문에 자이오르는 그제야 제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누군데 여기에……?”
하인은 침대 옆으로 걸어와 공손하게 인사했다.
“새로 기르골 님을 모시게 된 하인입니다. 아페라입니다, 선배님.”
하인의 인사는 예법을 완전히 그대로 따르진 않았으나, 움직임이 춤추는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나, 난 자이오르라고 한다네.”
하인은 빙그레 웃고서 이번에는 한쪽에 놓인 빗자루를 집었다.
방 안을 청소하려는 모양새에 자이오르는 서둘러 달려가 빗자루를 뺏어 쥐었다.
“아니, 내가 할게. 내가 할 테니 후배님은 저기서 쉬시게.”
“괜찮은데요. 제가 할 일인걸요.”
“아니, 아니야. 내가 할 일이라.”
“정말 괜찮습니다, 선배님. 앞으론 계속 여기서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아니, 그래도 내가-.”
빗자루 하나를 두고 주고받던 실랑이는 문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끊겼다.
“시끄러운데.”
힘이 빠진 나른한 목소리에 자이오르는 얼른 빗자루를 내려놓고 기르골을 보았다.
기르골은 그들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고서, 발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걸어가 침대에 앉았다.
저자가 기르골이구나. 아페라는 대번에 눈치채고서 그를 보며 인사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기르골은 아페라가 인사를 하기 전, 침대에 눕더니 눈을 감으며 지시했다.
“시끄러우니 내 방엔 한 사람만 들어와. 자이오르. 네가 해. 내 침실에 인간들이 오가는 거 별로다. 배고파.”
“네, 주인님.”
이 새로 들어온 하인이 기르골의 먹이가 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진 자이오르는 얼른 즉답했다.
실제로 기르골은 미로 저택에 머물 때도 그 큰 저택 안을 자이오르 혼자 담당하게 하고 다른 인간들은 근처에도 못 오게 했다.
그 저택을 오가던 인간은 제자인 사디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배려를 모르는 아페라는 황당해졌다. 뭐야. 인사도 안 받아?
게다가 근처에 오지도 말라고? 그럼 뭘 하란 거야?
“그럼 저는 뭘 해야…….”
이대로 물러설 수 없던 아페라는 결국 상대가 귀찮아하는 걸 알면서도 조심스럽게 묻다가, 눈치껏 깨달았다.
“아. 온실 화초에 물을 줄까요?”
“온실 화초는 내 담당이니 풀뿌리 하나도 건드리지 말라고 해, 자이오르.”
“네, 주인님.”
아페라는 기가 막혔다. 뭐야 저 새끼. 사람이 바로 근처에 있는데 지시까지 자이오르를 통해서 하네?
저거, 일부러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나?
* * *
“하하, 미안하네 후배님. 우리 주인님은 나 외 다른 심복은 아예 근처에도 못 오게 하시거든.”
“좀…… 놀랐습니다.”
“새로 온 하인이 후배님뿐인가?”
“아니요. 둘이 더 있습니다.”
“그 둘에게도 똑같이 전하게. 온실 안으로는 아예 들어오지 말라고.”
“그럼 저희는 뭘 해야 합니까?”
아페라의 질문에 자이오르는 “음.” 하고 고민하다가 낮의 일을 맡기기로 했다.
“하렘 안에서 지내진 않지만 하렘 소속이라, 우리 주인님도 그쪽에서 생필품과 먹을 걸 받아 오지. 하렘 쪽에서 물건을 받아 가라고 사람을 부르면 받아와서 온실 옆에 붙은 창고에 넣어두면 돼.”
“먹을 것도요?”
“아니. 먹을 건 온실 문 앞에 놓고 문을 두드리면 돼.”
미친 거 아냐? 먹을 것도 못 가지고 오게 한다고?
아페라는 당황했다. 그러면 유혹해서 바람나게 하기는커녕 얼굴도 못 보게 되지 않는가.
이를 모르는 자이오르는 그저 순하고 귀여운 후배가 마음에 들어서 웃는 낯으로 지시했다.
“자, 그럼 하렘 조리실에 가서 오늘 우리 주인님 몫 식사를 받아와보게.”
“……네.”
아페라는 마지못해 대답하고 하렘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걸어가면서 당혹스러운 마음을 애써 눌렀다.
괜찮아. 시간은 충분하다. 단기간에 일을 처리해 달란 건 아니니, 몇 년에 걸쳐서라도 마음을 뺏으면 된다.
‘그래. 시종 한 명만 곁에 두는 걸 보니 경계심이 심한 성격인 거 같아. 그러니 경계를 풀 때까지 시간을 들여 기다리면 돼.’
그렇게 생각하자 아까의 혼란스러움이 조금 풀려서 아페라는 편안하게 미소지었다.
그러자 아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몇몇 후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저녁 산책을 하는 듯했는데, 하나같이 모습이 수려하고 옷차림이 화려해서 현실 속 사람들 같지 않았다.
아페라는 얼굴이 붉어져서 괜히 앞만 쳐다보고 걸어갔다.
타리움의 황제가 얼굴을 많이 밝혀서 이곳 후궁들은 전부 절색의 미남들이란 소문은 들었지만, 그래도 좀 과장되었을 거라고 여겼는데. 이렇게 보니 소문이 사실 같지 않은가.
아페라는 황후 소생의 황녀로 태어나 평생 사랑받으며 크다가, 젊은 나이에 강대국의 황제 자리에 올라 이런 사내들을 독차지한 라트라실 황제가 몹시 부러워졌다.
그러다가 아페라는 호숫가에 선 한 남자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카락이 물살처럼 흔들리고, 그런 머리카락이 귀찮은 듯 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연신 뒤로 넘기는 남자.
아까 얼핏 본 후궁들도 모두 아름다웠지만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리려고 해도 그릴 수 없을 듯한 아름다움에 아페라는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식사를 가지러 가야 한단 걸 알면서도 넋이 돌아오지 않았다.
당장 그의 앞에 남장을 풀고 원래 자신의 모습으로 다가가 이름을 묻고 싶을 정도였다.
거울을 볼 때면 늘 보는 게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이라 아페라는 웬만해선 누군가의 아름다움에 이렇게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저 남자는…….
“아이고 또 하나 걸렸네.”
“!”
옆에서 놀리는 목소리에 아페라는 화들짝 놀라 옆을 보았다.
처음 보는 하인이었는데, 오래전부터 있었던 듯 여유로워 보였다.
그 하인은 아페라의 붉어진 얼굴을 보더니 낄낄 웃으며 놀렸다.
“처음 오면 다 그쪽처럼 놀라더라고.”
아페라는 손부채질을 해 얼굴 열기를 떨구며 물었다.
“네. 너무 아름다워서 놀랐습니다. 저분은 대체 누굽니까?”
“타리움의 자랑인 라나문 님이시지.”
심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아페라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호숫가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 남자가 라나문…….
* * *
게스타는 그 모습을 자신의 창가에서 구경하면서 한쪽 입꼬리를 만족스레 올렸다.
그리핀은 그 곁에서 사탕을 까먹다가 혀를 찼다.
[무슨 생각이길래 그리 못되게 웃소?]
“저 여자.”
게스타가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키자, 그리핀은 고개를 기웃거렸다.
[저기 여자가 어딨소?]
“우두커니 서서 라나문을 쳐다보는 여자.”
[응? 눈이 어찌 됐소? 저건 남자 아니오?]
“여자야. 딱 보면 알지.”
게스타는 중얼거리더니, 소리를 내어 웃었다.
“라나문은 가만히 있어도 사건을 끌어들이는구나. 저 아름다움 때문일까, 아니면 운명이 안배한 폐하의 적이기 때문일까.”
* * *
다가 공작은 별장에 가는 걸 거부하고 저택에 틀어박혔고, 동생은 언니가 아버지를 괴롭힌다고 원망하고, 어머니 역시도 아이니가 아직 몸이 성치 않은 다가 공작을 궁지로 몰아간다고 생각하는 상황.
아이니는 나랏일과 집안일 양방향으로 골머리가 아파져와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얹었다.
시녀는 곁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폐하. 요즘 머리가 너무 자주 아프신 거 같아요.”
“안다. 하지만 의사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니…….”
그때. 시녀가 들어오더니 아이니에게 기쁜 얼굴로 알렸다.
“황후 폐하. 전에 말씀하신 성기사단장이 황후 폐하를 찾아왔습니다.”
아이니는 눈을 뜨고 머리에 얹은 물수건을 시녀에게 건넸다.
“들어오라 해라.”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으려니, 문이 열리고 노란 제복 차림의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는 정갈한 걸음걸이로 가까이 걸어와 인사를 올렸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단백술의 성기사단장입니다. 그냥 단백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단백은 아이니가 자신을 불러준 게 몹시 기쁜 듯 활기찬 표정이었다.
“라나문 님이 저를 거절하셔서 어쩌나 했는데. 황후 폐하께서 불러주셔서 안심했습니다. 대적자님에게 거절당하는 건 생각해보지도 못했거든요.”
실제로 단백은 지금 아주 기뻤다.
원래는 대적자의 검을 가장 쉽게 뽑은 라나문을 찾아갔는데, 라나문이 영 미적지근하게 반응하다가 그대로 가버리고 이후 소식이 없는 탓이었다.
그래서 아이니 황후를 찾아가야 하나, 그래도 기다리기 시작한 거 좀 더 기다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황후가 자신을 먼저 찾아주다니!
아이니도 아까까지의 고된 생각을 누르고, 책상 앞에서 일어나 친절하게 그녀를 대해주었다.
“다른 두 대적자들은 대적자로서의 의욕도 열정도 없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짐작이 가네.”
“타리움 폐하도 그러십니까?”
“그렇겠지. 라나문은 타리움 황제의 후궁 아닌가. 둘 다 뜻이 같겠지.”
“그렇군요.”
아이니는 따뜻한 미소를 짓고서 단백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꼭두각시가 된 후. 단백을 불러오는 건 그녀가 자신의 의지대로 내린 첫 중대 결정이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미약한 희망이 솟기도 했다.
일이 잘못되더라도, 자신이 결정한 일을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라면 갑갑하고 억울한 마음은 그나마 덜하겠지.
“그러면 황후 폐하. 황후 폐하께서는 로드를 처치하는 데 의욕을 가지신 거지요?”
“당연하지. 하지만 로드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그건 문제없습니다. 찾아낼 방도가 있거든요.”
아이니는 단백을 직접 잡고 소파로 데려가다가 놀라서 물었다.
“찾아낼 방법이 있다니? 정말인가?”
“그럼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