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피를 마시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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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화. 피를 마시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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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화. 피를 마시게 해줘
2023.04.30.
뜻밖의 말에 아이니는 정말로 놀랐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도미스의 기억이 있다지만 일부일 뿐이고, 대부분이 칼라인과의 애정에 관련된 내용이어서일까. 아예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그게 무엇인가? 그런 게 있는데 왜 아무 말이 없었지?”
“없으니까요.”
“없다니?”
갑자기 말이 바뀌었다. 아까는 있다면서 지금은 없다니? 아이니는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단백은 영리하게 미소 지었다.
“한때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물건입니다.”
아이니는 기가 막혀 탄식했다.
“그러면 소용없지 않은가.”
“있습니다.”
“?”
“그게 지금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폐하. 그런 게 있단 말만 흘려도, 로드를 따르는 이들이나 로드 장본인은 그걸 훔치거나 없애려 나타날 테니까요.”
“!”
아이니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건…… 거짓말이지만 좋은 수였다.
“가짜 미끼를 던지잔 거로군.”
“네.”
아이니의 표정이 환해졌다. 적들이 거기에 엮이든 엮이지 않든 던져볼 만한 수였다.
적들이 엮이면 좋고, 적들이 엮이지 않는다고 해도 누군가 그 물건을 훔쳐 갔다고 하면 된다.
“나는 왜 이제야 자네를 찾았을까.”
아이니는 라나문이 단백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떠난 데 감사했다. 단백이 라나문을 따라갔더라면…….
“저…… 그런데 황후 폐하.”
“무엇이든 말해보게.”
“혹시 평소에 머리가 아프지 않으십니까? 몸이 무겁거나요?”
아이니는 단백이 또다시 로드를 잡을 방법에 대해 말할 거라 생각하다가 이상한 말에 놀라 그녀를 보았다.
“어떻게 아는가?”
“황후 폐하께 뭐가 붙어 있습니다.”
아이니는 헤움 황자가 루이스를 통해 자신에게 전해준 말을 떠올리고 굳었다.
이후 혹시나 싶어 신관을 불렀지만, 그 신관은 그런 것 따윈 없다고 했는데. 진짜 있었다고?
헤움을 생각하자 마음 한구석에 다시 강한 통증이 왔다.
‘죽기 직전까지 날 위해준 건 결국 헤움뿐이었구나.’
심장을 쥐고 흔드는 통증에 아이니는 표정이 일순간 흐트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멍해진 기분을 얼른 이겨내고 물었다.
“그걸 뗄 수 있겠나?”
“잘 될지 모르겠지만…….”
한번 해보겠다면서 단백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단백은 아이니 주위에 둥둥 떠 있는 까만 연기를 손으로 흩어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이니는 내내 탄 설탕 덩어리가 그녀의 뇌에 달라붙은 듯한 감각이 사라지며 정신이 맑아졌다.
그러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칼라인은 그녀에게 ‘로드는 늘 환생한다’고 말했다. 헛소문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그러면서 도미스의 외모와 기억을 가진 그녀에겐 흔들리지조차 않았다.
그런 칼라인이, 도미스의 나이트인 칼라인이 라트라실 황제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라트라실 황제의 또 다른 후궁 타시르는 흑마법사일 확률이 높다.
아낙차는 틀라 황자를 자신이 식시귀로 만들었다지만, 다가 공작은 제대로 식시귀로 만들지 못했다.
즉, 그녀는 솜씨가 좋지 않고, 틀라 황자를 식시귀로 만든 이는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낙차는 그자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왜? 자신이 솜씨 좋은 흑마법사라 속이기 위해서? 아니면 말할 수 없어서? 그 흑마법사가 로드의 사람이라?
아낙차와 틀라는 라틸의 적이지만, 동시에 타리움 황족이었다.
카리센이 대적자의 국가이고 타리움이 로드의 국가가 되어 부딪치게 되면 타리움은 다른 나라들의 공적이 될 텐데. 타리움 황실에 속한 그 둘이 과연 이걸 달갑게 여길까?
타리움이 로드의 국가가 된다면, 그들이 라트라실을 황위에서 몰아낸다 한들 나라를 되찾기 힘들 텐데?
그 순간. 아이니는 보지 못하는 까만 연기가 다시 그녀의 머리로 모여들었다.
단백은 당황해서 연기를 휘저었지만, 연기는 단백의 손길을 피해가며 아이니의 머리와 목덜미 근처에 머물렀다.
그러는 동안 아이니의 생각은 다시 방향을 바꾸었다.
‘아니. 이것만으로 라트라실이 로드라 확신할 순 없다.’
칼라인은 예전에도 대공의 가신을 자처하고 돌아다녔다. 로드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타시르가 후궁으로 함께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지도 모른다. 칼라인과 붙어 있어야 하니까.
“폐하?”
아이니의 표정이 밝아지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하자 단백이 걱정스레 불렀다.
아이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
“어쩌면 라트라실 황제가, 혹은 그녀의 근처에 로드가 있을지도 모르네.”
* * *
기르골을 유혹해 황제에게 버림받게 해달라는 75억 퀘펜짜리 의뢰는 온실 앞에서 막혀버렸다.
아페라는 굳건한 온실 문을 원망스레 바라보며 빗자루를 잡고 건성으로 온실 주위를 쓸고 다녔다.
어떻게 해서든 자연스럽게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럴 방안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나.’
지금 모습으로 무작정 저 안에 들어가 봐야 건방지다고 잘리기만 하겠지.
남장을 풀고 기르골이 오갈 만한 장소에 가 있어야 하나.
‘장소’를 떠올렸을 뿐인데 자연스럽게 호숫가에 서 있던 라나문이 떠올라서 아페라는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빗자루를 쥐고 소리 나는 쪽을 보니, 화려한 제복 차림에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게 묶은 여자가 뒤에 사람들을 거느리고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황제다.’
아페라는 대번에 눈치챘다.
황제의 이복형제자매들은 모두 궁전 밖으로 나갔으니, 현재 저런 복색에 저런 호위들을 거느리고 다닐 젊은 여자라면 황제뿐.
그녀는 얼른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감추었다.
그녀가 남장한 모습은 스스로도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뼈대가 얇고 근육이 춤에 맞게 발달했다 보니 남장한 모습이 좀 여리여리하긴 했지만, 그래도 얼굴만큼은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듣자 하지 저 황제는 남자 얼굴을 지독히 밝힌다던데. 혹시라도 자신에게 반하기라도 하면 정말 곤란하지 않은가.
하지만 무언가 느낌을 받은 걸까.
황제가 갑자기 그녀를 발견하더니 앞으로 다가와 멈추어 섰다.
아페라는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설마…… 일이 그렇게 꼬이진 않겠지?
* * *
‘윌랑 사람들은 다들 자기애가 강하네.’
아페라가 얼마나 떨던지, 그녀의 속마음이 부분 부분 들려온다.
황제가 자신에게 반할까 봐 몹시 염려하고 있었다.
‘저거 예전에 윌랑 왕자가 하던 건데.’
라틸은 아페라의 속마음을 들으며 혀를 찼다.
자신감을 가질 만한 외모이긴 하지만 저 하인은 절대로 라틸의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이 꼬여?’
하인의 생각 중 ‘일이 그렇게 꼬이진 않겠지?’라는 부분은 신경이 쓰인다.
일이라니? 무슨 일?
‘윌랑 왕자가 기르골에게 준 하인이겠지. 그 왕자. 뭔가 다른 명령을 내린 건가?’
앞에 두고 말없이 쳐다만 봤더니 하인의 몸이 점점 긴장으로 떨리기 시작한다.
라틸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감추며 물었다.
“넌 새로 기르골에게 온 하인이던가.”
그제야 하인은 눈에 띄게 안심해서 대답했다.
“네, 폐하.”
안심하던 태도는 라틸의 지시에 바로 사라졌지만.
“목이 말라서 찬 음료를 마시고 싶은데. 10분 내로 가져오거라.”
“10분이요?”
아페라가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라틸은 “그래. 10분.”하고 대답한 뒤, 아페라가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 하던 온실 안으로 쉽게 들어갔다.
[뭐야 저 황제. 10분 내로 부엌에 어떻게 다녀오란 거야? 날 괴롭히는 건가?]
뒤에서 아페라의 당황한 속마음이 들려왔지만, 라틸은 명령을 정정하지 않았다.
대신 온실 안으로 들어서며 서넛에게 작게 지시했다.
“안 들키게 따라갔다 와봐요.”
“왜 그러십니까?”
“뛰는 거 보면 훈련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나올 겁니다. 진짜로 일하러 온 건지 아닌지도.”
서넛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온실 밖으로 나갔다.
“너희는 이쪽에 있어라.”
라틸은 다른 수행인들에게도 지시하고서 혼자 기르골을 찾아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또 멘탈이 나가 사라졌으면 어쩌나, 생각했지만 기르골은 자신의 침실에 얌전히 있었다.
“안녕 아가씨.”
아무리 봐도 피 같은 게 담긴 병을 한쪽에 늘어놓으면서.
“그거 피…… 아닌가?”
라틸이 당황해서 묻자, 기르골은 병을 정리하다 말고 해맑게 웃었다.
“맞아.”
“피를 거기 두려고?”
“부엌에 맡길까?”
“아니!”
“그래서. 둘 데 없잖아.”
대체 왜 조금도 방심할 틈을 안 주는 거야! 라틸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황급히 기르골 앞으로 다가와 항의했다.
“윌랑 왕자가 그대한테 하인 셋 붙였다며. 셋 중 하나라도 이게 피인 걸 알면 어쩌려고? 그 하인들이 왕자 사람인지 그대 사람인지 어떻게 알 건데? 그대 사람이어도 보통 사람들은 상대가 피 마시는 걸 알면 정이 뚝 떨어져!”
“아가씨도 나한테 정이 떨어졌어?”
“뭐?”
말이 왜 거기로 새? 라틸은 기가 막혀서 기르골을 보았으나 기르골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난 그대가 내 피 빨아 마시는 걸 보고서도 후궁으로 들였다, 기르골.”
저 약하디약한 정신이 상처라도 받을까 봐 얼른 말해주자, 기르골은 잠시 생각하다 수긍했다.
“그건 그래.”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피로 가득 찬 병을 손으로 휘휘 저었다.
“저것들은 치워. 꼭 여기 둘 필요 없잖아.”
“그럼 난 뭘 먹고 살아야 해?”
“꼭 뭘 먹어야 해?”
“굶는다고 죽진 않는데.”
‘굶어도 안 죽는다고?’
뱀파이어라 그런 건가 아니면 뱀파이어 나이트라 그런 건가, 아니면 기르골이라 그런 건가.
뜻밖의 정보에 라틸이 놀라고 있자니, 기르골의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배가 고프면 내가 좀 예민해져서, 아가씨. 인간들도 배가 고프면 이성을 잃잖아. 나도 그래.”
넌 배가 부를 때도 이성을 잃잖아. 라틸은 속으로 툴툴거렸다.
하지만 기르골이 배가 고플 때 상태가 지금보다 더 나빠질 거라 생각하면 끔찍한 상황이긴 했다.
기르골은 대답 없이 서 있는 라틸을 재밌다는 듯 보다가, 라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싸면서 이마를 대고 물었다.
“그럼 아가씨. 배고플 때마다 하나씩 지나가는 인간을 잡아먹을까? 실종자가 나타나면 아가씨가 권력으로 잘 묻어줄래?”
“그건…… 안 돼.”
“왜? 아가씬 황제잖아.”
“황제니까.”
춤을 추듯 그가 라틸의 허리를 잡고 몸을 빙글빙글 돌려댔다.
라틸은 그를 따라 왈츠를 추듯 뒤뚱거리면서 어떻게 기르골을 달래야 할지 고민했다.
무작정 ‘먹지 마!’라고 하자니 정말로 그가 미칠 것 같고. 그렇다고 ‘먼데 가서 마시고 와’라고 하자니, 그것도 좀 그랬다.
먼데 사는 타리움 백성도 모두 자신이 지켜야 할 백성들인데. 안 보이는 데서 잡아먹으란 거 아닌가.
“음…….”
라틸이 머리를 굴리느라 이마를 구기다가, 기르골이 자신을 신기하단 눈으로 바라보는 걸 발견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구겨진 이마에 박혀 있었다.
“왜. 뭐. 왜 그래.”
그 시선에 멋쩍어서 묻자, 기르골이 라틸의 이마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서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마가 구겨질 수 있을까? 신기하지 않아?”
“하나도 안 신기한데. 사람은 다 그러잖아.”
“그 사람들한텐 관심이 없어서. 하지만 아가씨에겐 관심이 많아. 아가씨의 표정 하나하나가 신기해.”
무슨 헛소리야, 생각하고 있자니 기르골이 라틸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제자님.”
“이가…… 닿는 거 같은데.”
“제자님 피를 마시게 해줘.”
“!”
진심인가, 생각하기도 전에 뒤에서 쾅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기르골이 날아갔다.
라틸은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옆에 온 서넛이 눈가가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화가 나, 서 있었다. 그의 주먹이 꽉 말려 있었다.
기르골의 상태를 확인하기도 전에 막막한 걱정부터 솟아났다. 라틸은 천천히 삐걱삐걱 목을 움직여 기르골 쪽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