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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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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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2023.07.02.
안 그래도 차가운 라나문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아 있다.
“대답해.”
칼라인은 우선 몸을 일으켰다. 무슨 말을 하든, 라나문 저놈과 한 침대에서 마주 보고 나누고 싶진 않았다.
라나문 역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칼라인을 흉흉하게 노려보았다.
“여긴 어떻게 왔지?”
칼라인은 자신이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가장 자연스러울까 생각해 보았다.
“…….”
없다. 머리를 굴려도 떠오르는 게 없다. 해치러 왔다 하면 위험하고, 잘생겨서 보러 왔다 해도 위험하다.
지나가는 길에 안부가 궁금해서 들렀다고 하면 더 이상하게 들린다. 무슨 소리가 들리길래 와봤다고 해도 나란히 누워 있었던 게 기괴하다.
판단을 내린 칼라인은 침묵을 선택하고 옷만 괜히 툭툭 털었다.
“여긴. 어떻게. 왔냐고 물었는데.”
그 모습에 화가 났는지 라나문이 말을 음절마다 끊어서 내뱉었다.
칼라인은 그의 상상력에 대답을 맡기고, 창문과 문을 번갈아 보다가 문을 열고 나갔다. 창문으로 나가면 도둑 같을 테니까.
“깜짝이야!”
갑자기 라나문의 방에서 칼라인이 나타나자, 카르둔이 기겁해서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칼라인 님?”
칼라인은 무표정하게 외문까지 열고 나갔다. 하지만 속은 들끓고 있었다.
게스타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자주 하는 생각이지만, 오늘은 더 특별히. 많이.
* * *
“폐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도련님!”
칼라인이 떠나고 30분 뒤. 라나문에게 사정을 들은 카르둔은 기겁해서 권했다.
밤중에 갑자기 칼라인이 라나문 방에서 나오는 걸 보고 기겁했는데. 아예 침대 옆에 누워 있었다니!
그런데 언제 누운 건지도 모르게 누워 있었다니.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게다가 상대는 용병왕이었다.
“도련님이 첫 번째 황손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하니까 화나서 죽이러 온 거라고요!”
“그 정도로 멍청해 보이진 않았는데.”
“그런 게 아니면 왜 도련님 침대에 있었겠어요? 죽이러 온 게 아니라도 최소한 때리러 온 건 맞다고요.”
“…….”
라나문은 놀란 마음을 누르기 위해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이 일을 황제에게 말하는 게 좋을지 어떨지 고민했다.
하렘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황제에게 알릴 수는 없다. 알려서도 안 되고. 하지만…….
“그래. 이 일은 알리는 게 낫겠다.”
* * *
“오. 아기 아빠.”
아침. 라나문이 라틸의 방에 찾아가자마자 들려온 지칭은 새로워져 있었다.
그 소리에 라나문이 흠칫하자, 근처에 선 시녀들이 입술을 깨물고 웃음을 참았다.
라틸은 웃으면서 라나문을 올려다보다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침실로 따라 들어오라 고갯짓했다.
“안에서 얘기하지.”
라나문은 응접실을 지나가다가, 라틸이 아까까지 앉아 있던 곳을 보았다. 탁자 위에 파일첩이 여러 개 있는데, 얼핏 보아도 죄다 아기 용품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시녀들은 라나문의 눈길이 닿자 자기들끼리 키득키득 웃으면서 물었다.
“라나문 님도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라나문은 단호하게 말하고서 침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라틸은 소매를 걷고 침대에 편하게 앉다가, 라나문과 눈이 마주치자 두 팔을 벌리며 묻지도 않은 대답을 했다.
“내가 챙긴 거 아냐. 주문제작 하려면 미리 골라야 한다고 해서 보던 거야.”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네가 날 사기꾼처럼 쳐다봤잖아.”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이래서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는구나. 라나문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라틸은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면서 최대한 나태한 자세로 드러눕다가, 라나문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묻지 않은 말을 했다.
“임신했으니 자세를 바로 해야 한다면서 자꾸 잔소리들을 해대잖아.”
“전 이번에도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폐하.”
라틸은 흠흠 헛기침을 하고서 베개를 끌어안았다.
“그래?”
“예.”
“그래.”
라틸은 머쓱해서 베개 위에 턱을 올렸다.
라나문은 그 멍한 표정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황제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지, 황제에게 빠져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첫날밤 황제와의 분위기에 취해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가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가. 첫키스를 하면서 울던 황제의 모습은 또 어떻고.
라나문은 그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아주 고생했고, 그 자존심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
이 와중에 또 황제에게 혼자 호감을 가졌다가 마음고생을 할 건 그였다. 그는 황제를 유혹하되, 황제에게 빠져 허우적대서는 안 되었다.
“그래, 라나문. 아침부터 무슨 일로 왔지?”
라틸의 질문을 듣고서야 라나문은 상념에서 깨어 근처의 의자에 앉았다.
“칼라인 일로 왔습니다.”
“칼라인? 왜?”
라틸은 불안해서 되물었다. 칼라인은 안 그럴 것처럼 생겼는데, 의외로 대신관을 계단에서 떠민 적도 있고 클라인의 부적을 훔치고 발뺌한 일도 있었다.
물론 나름대로 자기 정체가 들통날 위험 때문에 한 행동들이지만. 라나문 역시 칼라인에게 위험한 상대 아닌가. 대적자니까.
그런데 라나문이 찾아와 칼라인 이야기를 꺼내자, ‘혹시 칼라인이 라나문을 해코지하려 하나?’ 싶어 걱정되었다.
“칼라인이 너한테 뭐 안 좋게 말을 한다거나. 공격한다거나?”
“밤중에 기척이 나서 눈을 떠보니 그자가 있었습니다.”
“공격하려고?”
“제 침대 옆에요.”
“무기를 들고?”
“그냥 누워서요.”
“어…… 어…… 음?”
“밤에요.”
“어…… 누워서 뭘 하던데?”
“제 얼굴을 보고 있었습니다.”
라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라나문은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말로 하니 위험해 보이지 않지만 이상한 분위기였습니다. 그자는 창문으로도 문으로도 오지 않았으니까요.”
“아…….”
라틸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상하네.”
* * *
“게스타의 여우굴에 들어갔는데, 목적지가 제 생각과 좀 달랐습니다.”
점심시간. 라틸이 칼라인을 불러 묻자, 칼라인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게스타가 또 이걸 알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원치 않지만 게스타를 위해 변명도 한마디 해주었다.
“도착지를 잘못 설정한 거 같았습니다. 실수로요.”
“그런 데 실수할 수도 있어?”
“그랬으니 제가 이상한 데 떨어졌겠지요.”
라틸은 게스타의 능력을 직접 겪어본 적도 있기에 수긍하고 넘어갔다.
라나문은 칼라인이 침대에 누운 채 자기 얼굴을 보고 있었다지만, 여우굴 안에 들어갔는데 코앞에 라나문의 얼굴이 있다면 ‘이게 뭐지?’ 싶어서 쳐다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치가 침대 위인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대신관도 하이신스 위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그래.”
다행히 라틸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넘어가자, 칼라인은 속으로 안도했다.
하지만 이 일의 원흉인 게스타에게는 몹시 화가 났다. 이전의 분노가 라틸과 아이를 가진 라나문에게 쏠려 있었다면, 지금의 분노는 전부 다 게스타를 향해 있었다.
사람이 장난을 칠 게 있고 안 칠 게 있지!
하지만 게스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잘못 복수했다가는 방에 갈 때마다 그놈의 빌어먹을 여우굴에 빠지게 될 테니.
‘내가 복수하는 줄 모르게 복수해야 한다.’
* * *
칼라인이 게스타에게 마주 물 먹일 방법을 고심하고, 카르둔이 현재 하렘 관리를 맡고 있는 타시르에게 부탁해 라나문 방을 지키는 호위 수를 더 늘리려 하고, 라나문이 가문 사람들이 보내온 육아 서적을 쌓아놓고 곤란해하는 사이.
레안 황자와의 혼담을 거절당한 밀로의 사절단은 라틸을 찾아와 또 혼담을 넣었다.
“타리움의 황족들 중엔 미혼이신 분들이 많지요. 꼭 레안 황자님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그분들 중 괜찮은 분과 혼담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정말로 피치 못할 특별한 사정 때문에 혼담이 거절된 게 아닌 이상 같은 가문에 비슷한 시기에 연달아 혼담을 넣진 않는다. 자존심이란 게 있으니까.
그런데 귀족도 아니고 왕족이, 그것도 직계인 공주의 혼담을 연달아 넣어 오자 라틸은 정말로 수상쩍게 여겨졌다.
‘뭐가 있나?’
그 표정을 눈치챈 사절 대표는 열심히 둘러댔다.
“3왕자님과 대공님의 다툼으로 밀로 내부의 사정이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전하께선 공주님을 외국인과 결혼시키고 싶어하시는 거고요.”
라틸도 밀로의 내부 상황이 좋지 못한 건 알았다. 대공과 3왕자가 라틸에게 동시에 도움을 청한 적도 있었고.
하지만…… 그렇더라도 외국이 타리움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정말로 공주의 안위를 위해 여기로 공주를 보내고 싶은 걸까. 아니면 공주가 성기사단 단장인 것과 관련이 있나.’
라틸은 망설이다가 이번에도 거절했다.
“안 됐지만, 이미 황궁에 성기사단 하나가 통째로 지내고 있는데, 다른 성기사단 단장을 황족으로 받아들이고 싶진 않네.”
사절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묻고 싶어서 라틸을 보았다.
라틸도 별로 타당한 논리로 거절한 건 아니었다. 그냥 그럴듯하게 둘러댔을 뿐.
잠시 뒤. 사절 대표는 라틸의 단호한 표정을 보고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폐하께서 그렇게 반대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국혼은요.”
* * *
황궁에 따로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자리폴시 공주 역시 수도 근처 마을에 변복하고 들어와 있었다.
공주는 사절단 대표에게 두 번째로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휘파람을 불었다.
“거기 황제는 내가 정말 마음에 안 드나 보구나.”
“아무리 강대국의 황제라지만 너무 오만합니다. 선대 황제라면 절대로 이런 식으로 공주님과 밀로를 무시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른 사절들도 기분이 나빠서 공주를 만류했다.
“굳이 타리움 황족과 결혼할 필요는 없습니다, 공주님.”
“맞습니다. 이런 식으로 결혼해 봤자 거기 황족들이며 귀족들이 얼마나 무시하겠습니까?”
“공주님을 두 팔 벌려 환영할 곳은 많으니-.”
“아니.”
그러나 자리폴시 공주는 사절들의 애탄 요청을 중간에 끊어버렸다.
“무조건 그곳에 가야 한다.”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약혼까지는 할 생각이었다. 가장 자연스럽게 황제의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서는, 그쪽의 친인척이 돼야 하니까.
사절로 가거나 유학생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황제의 가장 사적인 영역을 살피기 어려웠다.
‘황제 외, 하렘 내부에 들어가 구경을 핑계로 탐색할 수 있는 성인 여자는 후궁들의 가족. 가족이 아니라면 최소한 유모 정도는 되어야 해. 심부름 온 하녀도 잠시는 들어갈 수 있지만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반드시 거기 황족과 결혼해야 해.”
마음을 정리한 자리폴시 공주가 시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미혼 남자 황족들 거주지가 어디 어디지?”
“예?”
“국혼이 안 되면 연애를 해서라도 들어가야지. 그렇게 했는데도 황제가 거절하면 그건 정말 밀로를 무시하는 행동이야. 카리센과 타리움은 지금 사이가 좋지 않으니, 아무리 황제라도 우리나라까지 적대하고 싶진 않을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