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화.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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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화.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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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화.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야?
2023.08.16.
“흔적은? 다 지웠나?”
백화의 질문에 성기사 몇몇이 대답했다.
“네. 시체와 전투 흔적 모두 치웠습니다.”
“관은?”
“옮겼습니다. 아, 그리고-.”
“그리고?”
“치우러 갔을 때 안야 님이 아직 거기에 계셨습니다.”
백화가 인상을 찡그렸다.
“관 안에 있던 걸 먼저 이동시키지 않았나?”
“이동시켰습니다. 물어보니 원래 관에 떨어트린 게 있을까 봐 들렀다고 합니다.”
백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고한다고 말하다가, 갑자기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혹시라도 관 안에 든 로드를 깨우진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계속 잠든 걸 확인하고 왔습니다.”
“그래. 조심해라. 지키되, 절대로 깨어나게 해선 안 된다.”
“물론입니다.”
* * *
상단 일거리도 가득한데. 황제 역시 이쪽에 자꾸 일을 몰아주는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일까.
타시르는 상단 일거리와 하렘 책임자로서 맡은 일거리, 라틸이 개인적으로 맡긴 일거리, 자신이 따로 흥미가 돌아서 진행하는 일거리 등등을 나누어 놓고 내키는 대로 이것저것 집어서 살피다가,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히얼란은 타시르가 마실 커피를 타서 다가오다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 안타까워 혀를 찼다.
“우리 불쌍한 소단주님. 남들은 후궁이 돼서 논다는데 우리 소단주님은 일이 더 느셨네요.”
히얼란은 커피를 타시르의 옆에 놓았으나, 타시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커피잔이 떨어질 뻔했다. 히얼란은 다급히 커피잔을 받치며 물었다.
“소단주님? 왜 그러세요?”
“알아냈다.”
“예?”
* * *
“벌써?”
라틸은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일어서다가, 타시르가 찾아오자 그를 데리고 식당으로 갔다.
타시르는 식당에 앉자마자 라틸에게, 며칠 전에 맡긴 비밀 쪽지 내용을 해독했다고 알렸다.
“이야…….”
라틸은 진심으로 타시르에게 탄복했다.
“그대는 정말 대단해.”
“그렇지요. 그렇다면 애정을 좀 주시지요, 폐하. 말라비틀어진 타시르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하. 미안 미안.”
라틸의 건성인 사과를 들으며 타시르는 쪽지를 라틸의 앞에 펼치고, 자신이 새로 적어온 해석을 쪽지 암호와 짝을 맞추어 늘어놓았다.
라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 * *
레안은 창가에 우두커니 앉은 채 무릎에 책을 내려놓고 읽고 있었다. 갑자기 쾅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그는 책을 덮고서 피식 웃고 문을 보았다. 이렇게 그에게 등장할 수 있는 건 동복동생인 라트라실 하나뿐이었다.
“황제 체통은 어디 간 거냐.”
레안은 놀리면서 묻다가, 라틸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진 걸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그래, 이번엔 또 뭐가 화가 나서 달려온 거지?”
라틸은 성큼성큼 걸어가 허공에 대고 피아노를 치듯 손을 움직였다.
“뭘 연주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걸 본 레안이 심각하게 중얼거리자, 라틸은 허공에 대고 주먹을 쾅쾅쾅 내려치고서 팔을 내리며 외쳤다.
“연주한 거 아니야!”
“그럼?”
“머리카락을 잡고 양옆으로 잡아당기고 싶은 걸 참은 거라고!”
“이런. 그건 안 돼.”
레안이 자기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가리자, 라틸은 씩씩거리면서 그를 노려보다가 1인용 소파에 가 풀썩 앉았다.
“황제가 되니 체통이 더 없어졌잖아, 라틸.”
“왜 물어봤어?”
“네 체통? 없어 보여서.”
“말고!”
“그럼?”
라틸은 입술을 깨물고서 이번엔 소파 팔걸이를 주먹으로 두드리다 물었다.
“내가 일을 잘해나가는지, 나라는 어떻게 다스리는지 등등.”
“그야 걱정되니까. 우리나라고 내 동생 일이잖아.”
“웃기시네. 내가 일을 못 하면 사람들을 선동해서 쫓아내고 싶은 건 아니고?”
레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답을 정해두고 온 거야?”
라틸은 레안을 계속해 노려보다 다시 소파 팔걸이를 내려치며 물었다.
“책은?”
“방금 전까지 읽던 책이라면 요즘 유행하는 점성술-.”
“비밀 암호로 바꿔서 들여오는 책.”
레안은 눈썹을 치켜올리고서 라틸을 보다가, 그 부리부리한 시선을 눈치채고서 긴 소파에 앉았다.
“네가 한 말이 생각나서.”
“내가 뭐라 했는데? 내가 너한테 한 말 중 기억나는 건 욕뿐이라.”
“너는 로드가 되어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거라고. 네 존재만으로 사람들에게 해가 된다면, 그렇지 않을 방법을 찾아낼 거라고.”
“!”
라틸은 인상을 찡그리고서 레안을 노려보았다.
타시르가 라틸에게 해석해준 쪽지 내용은, 하나는 라틸이 어떻게 일을 해나가는지에 대한 전 식료품 관리인의 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책의 내용 일부분으로 추정된다 했다.
비밀 암호로 옮겨 적긴 했으나, 타시르의 말에 따르면 암호 자체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고 했다.
또한 라틸의 통치에 대한 평가 역시 다 좋은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어도, 그럭저럭 객관적으로 장단점 모두 포괄하고 있었다.
이에 라틸은 기가 막혀서 레안을 찾아온 것이다. 오빠 역할을 제대로 하고 싶었으면 배신하지 말고 옆에서 지켜주던가. 이제 와서 새삼 그가 자신을 신경 쓰는 척하는 게 짜증 났다.
무엇보다 책은 왜 그렇게 수상쩍게 내용을 운반한단 말인가?
“그런 내용의 책이면 왜 비밀 암호로 바꾸는데?”
“책을 조각조각 낸 거잖아, 라틸. 500년 전 황제에 대한 이야기지만 ‘500’이란 글자가 다른 쪽으로 가면 네 얘길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 그래서 그랬어.”
“비밀 암호로 바꾼 게 더 이상하지 않아?”
“아니지. 암호로 바꾸면 최소한 전부 다 합쳐서 읽어주긴 할 거잖아?”
“…….”
말은 잘하시네. 라틸은 그를 미워 죽겠단 듯이 노려보다 비꼬았다.
“그래서. 뭐 알아낸 건 있어? 이렇게까지 했는데 하나도 없진 않겠지?”
“없어.”
“예에, 그럴 줄 알았어.”
“하지만 이상한 점은 하나 찾아냈어.”
라틸은 소파에서 일어나다가 레안을 돌아보았다. 레안은 진지한 눈으로 라틸이 아니라 허공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이상한 거라니?”
라틸이 질문하자, 그제야 레안이 라틸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따라 일어섰다.
“대적자와 로드에 대한 기록 상당수가 시간이 오래돼서 유실된 게 아닐지도 몰라.”
“무슨 소리야?”
“누가 고의로 폐기한 걸지도 모른다고.”
라틸은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최근에?”
“누가 했는진 모르겠고. 최근은 아니야. 그 당시 일어난 일 같아.”
“당시라면…….”
“500년 전.”
“!”
라틸이 빤히 쳐다보자 레안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같이 마주 보았다. 그 구김 없는 시선을 보며 라틸은 한숨을 뱉었다.
대놓고 배신해 놓고서도 여전히 저렇게 자신을 볼 수 있는 레안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사이가 좋을 때도 라틸은 레안을 이해할 수 없긴 했다.
라틸은 잠시 뒷짐을 지고 생각에 잠겼다.
레안에 대한 분노는 그렇다 쳐도, 레안이 알아낸 건 확실히 호기심이 들었다.
전에 므라딤은 로드가 대적자와 무언가 거래를 했고, 원하는 게 있었다고 했다. 혹시 레안이 말하는 것도 그와 관련 있는 걸까? 아니면 관련 없나?
“라틸. 무슨 생각해?”
“누가 기록을 없앴는지.”
“그게 그렇게 궁금해?”
“대적자는 어차피 다 자기에게 좋은 이야기인데 그 기록을 없앨 필요가 없잖아. 없앴다면 로드 쪽이겠지. 그런데 패배한 건 로드잖아.”
“!”
“대적자는 이겼어. 로드가 기록을 없앴다면, 언제든지 대적자는 기록을 되살릴 수 있었어. 아니면 자기 입맛에 맞게 다시 적거나. 그런데 폐기된 채 복구되지 않았잖아. 그러니 이상하지.”
“……그렇군. 그건 또 새로운 관점인데.”
라틸은 레안을 잠시 째려보았다. 레안에 대한 신뢰나 감정은 그렇다 쳐도, 그의 학구열만큼은 확실히 엄청났다. 여기 틀어박힌 채 조각조각 난 책을 붙잡고 저걸 알아낼 정도라면.
한참 생각하던 라틸은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해. 밖으로 나가지 않고 혼자 연구하는 건 허락해줄게. 원하는 책이 있으면 보내주겠어.”
레안의 눈이 커다래졌다.
“라틸……!”
“하지만 반출은 안 돼. 오빠가 책에 어떤 수상한 비밀 신호를 적어서 오빠 지지자들에게 보낼지 모르니까.”
“내 지지자가 남아 있긴 할까? 네가 아주 잘 해내고 있다던대.”
라틸은 씁쓸하게 웃는 오빠의 등짝을 장갑으로 찰싹 때려버렸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마침내 성기사 단장 세 명이 도착했다.
단백은 자주 모이는 성기사단 숫자가 열두 개라고 했으니, 그나마 성기사 단장 열한 명이 오지 않은 게 다행한 일이었다.
게다가 단장 세 명 중 하나는 단백인 것도 그나마 나았다. 단백은 내내 오해받는 라틸의 처지를 좀 가엾게 여기는 듯했으니.
“자꾸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폐하.”
단백은 라틸을 보자마자 또다시 사과부터 했다.
“괜찮네. 밀로와 타리움은 친한 나라이지. 친한 나라의 공주이자 성기사단장이 사라졌는데, 당연히 도움을 주어야지.”
라틸은 인자한 척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속으로는 ‘오지 마 오지 마 제발 나한테 좀 오지 마!’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어 라틸은 단백의 옆에 선 새로운 얼굴 둘을 보았다.
하나는 아주 건들건들해서, 성기사가 아니라 성기사 제복을 뺏어 입은 것처럼 보이는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반쯤 눈이 풀려 있어서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남자였다.
“이쪽은 연활 경, 저쪽은 청월 경입니다.”
단백이 얼른 둘을 소개했다. 건들거리는 쪽이 연활, 졸린 듯한 쪽이 청월인 모양이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단백에게 물었다.
“그래,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
“부탁드리고 싶은 게 두 가지입니다.”
“말해보게.”
“대신관님이 피아르 경을 치료해주셨으면 합니다. 아, 피아르 경은 자리폴시 공주님의 부관이자 시녀입니다.”
“물론이지.”
“그리고 공주님이 여기서 무슨 정보를 듣고 어디로 떠났는지 조사해보게 해 주십시오.”
“여기서 정보를 듣고 떠난 게 아닐 수도 있을 텐데.”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계획에 없던 곳으로 간 건 확실합니다.”
“왜 그리 확신하는가?”
“공주님이 근처 성기사들을 이 부근에서 모아 가셨는데, 그때 저희 쪽으로 인편을 보내셨거든요. 그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
라틸은 순간 긴장감에 심장이 오그라들 뻔했다. 인편을 보냈다고? 그럼 떠나기 전에 무언가 말을 전달했단 건데.
과연 무슨 말을 전달했을까? 부적으로 황제의 측근들을 조사했단 내용? 아니면 백화에게 이상한 말을 들었단 내용?
‘부적 얘기는 없었어야 할 텐데.’
하지만 이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라틸은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짓고서 단백을 보았다.
실종된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웃는 것도 이상하단 생각은, 라틸을 희한하게 쳐다보는 청월의 시선을 받고서야 떠올랐다.
라틸은 다시 입꼬리를 내렸다. 다행히 단백은 이상하단 생각을 하지 않는 듯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샅샅이 조사해보았는데, 폐하께서는 로드가 아니라 하셨습니다. 폐하의 감시하에서 조사한 게 아니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조사한 거니 확실하다고요.”
‘잘했어 자리폴시!’
“또, 로드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되었다고, 그런데 정확하진 않다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해보러 가겠다 했습니다.”
라틸은 속으로 ‘잘했어 자리폴시!’를 한 번 더 외치다가,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로드 위치를 알아냈다고?
‘나 여기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