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대면 (2)
바람 한 점 없다.
푸른 창공을 장식한 하얀 구름은 멈춰 있고, 그 아래 펼쳐진 대자연은 더없이 고요했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 장소에 유일하게 세월에 풍화된 것이 있었다.
빛바랜 유적.
수백 년이란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색을 잃어버린 고대의 건축물.
그를 마주한, 성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조제프 대주교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찾았군요.”
루아스교의 옛 기록물에 실려 있던 풍경과 비슷하다.
두루뭉술한 설명문과 훼손된 그림, 그와 비교해 실제 모습은 차이가 있었으나 확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 너머에 있었을 때부터 느꼈다.
이 유적 아래…… 형용할 수 없는 신성력이 머물러 있는 게 희미하게 감지된다.
오직 대주교급 이상의 존재만이 간섭할 수 있는 고고한 빛이.
“다행히 봉인은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다.”
우려했던 사안이 해소되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수상했다.
팔라딘, 레일버가 경계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봉인이 그대로라니…… 대주교님의 판단을 믿어 의심치는 않습니다만, 의문입니다. 어째서 주검의 영광은 이곳으로 향하는 입구를 폐쇄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었는지.”
유적 아래 잠들어 있는 건 놈들의 궁극적인 목적이나 다름없다.
그걸 이렇게나 손쉽게 내준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팔라딘, 셰인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또한 네 번째 하인은 이곳이 아닌 왼쪽 문 너머에 있는 것 같습니다. 두 개의 문을 내버려 둔 건, 의도적으로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함이 아닐는지요.”
“그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요.”
조제프가 태연하게 답했다.
“아무래도 주검의 영광은, 유적 내의 봉인을 저희가 풀어 주길 원하는 것 같습니다.”
“……!”
왜 유적을 먼저 발견했음에도 봉인을 해제하지 못했을까.
왜 유적으로 향하는 입구를 내버려 두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주검의 영광은, 루아스교가 찾아오기 전까지 봉인을 풀 힘이 없으니까.
만약 그럴 능력이 있었다면 암약할 필요도 없이 진즉에 자취를 감췄을 것이다.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말해 봉인을 해제하면 저들의 뜻대로 되겠지요. 하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습니다. 유적의 위치가 발각된 이상 방치한다는 선택지는 없을뿐더러…… 저희에겐 충분한 힘이 있으니까요.”
특별한 정십자가가 매달린 목걸이에 햇빛이 반사되었다.
“그러니 예정대로 봉인을 풀고 ‘옛 왕’의 신체 부위를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제프 대주교가 앞장섰다.
“전군, 유적에 진입하십시오.”
“예, 대주교님.”
성기사단이 움직인다.
유적에 가까워지자, 어둠으로 가득한 내부에서 무수한 언데드가 해일처럼 쏟아져 나왔다.
‘봉인을 풀길 원하면서 길을 가로막는다라…….’
시간을 끌기 위함인가.
어떤 숨겨진 목적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지만 해야 할 일은 같다.
‘최단 시간으로 언데드를 토벌하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
당장 네 번째 하인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
초월자에게 인정받은 자, 애셔.
현재 그의 경지는 조제프조차 파악하지 못할 정도니 능히 대적할 수 있으리라.
최소한 지원하러 가기 전까지는 버틸 수 있을 터.
본래의 목적 말고도, 그런 확신 또한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조제프가 위광을 드러냈다.
눈부신 신성력에 휩싸인 성기사단이 언데드와 충돌했다.
* * *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군, 애셔.”
마침내 주검의 영광의 수뇌부와 대치했다.
사방을 감지하고 있던 베르덴의 벽안이 미세하게 기울었다.
‘이곳에 있는 언데드는 총 두 마리.’
왼쪽에는 거체의 언데드가 쓰러진 돌기둥 위에 걸터앉아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는 전신 갑옷을 두른 기사의 모습이다.
날 전체가 물결처럼 구불거리는, 무광으로 처리된 거대한 플람베르크(Flamberg)를 어깨에 멘 채 흉흉한 기세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 기립하고 있는, 마력이 깃든 책을 들고 있는 언데드.
어둠이 일렁이는 로브 아래 썩어 문드러진 육신이 있다.
뻥 뚫려 있는 안와(眼窩)에서는 증오와 경멸이 가득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제까지 만나 왔던 언데드와는 격이 다르군.’
베르덴이 직접 왕국에서 토벌했던, 사령의 보주를 품고 있던 그림 리퍼를 넘어서는 불길함이다.
어떤 개체인지는 몰라도 최상위 종에 위치한 놈들일 테지.
하지만 그보다 기이한 건, 두 언데드를 거느리고 있는 존재였다.
‘저걸……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난생처음 느껴 보는 기척.
회색빛의 피부 위에는 늙음과 젊음이 공존하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생사의 경계선에 위치한 존재 같다고나 할까. 사람보다는 이형종에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슬쩍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블랙 아워의 나침반은 정확히 저 존재를 가리키고 있었다. 카일리언스에서 느낀 마력과 거의 흡사하기도 하고.
어느 모로 보나 네 번째 하인 본인임이 분명하리라.
레인디아를 기동하여 나침반을 아공간에 보관했다.
관찰을 마친 베르덴이 말했다.
“기습이었을 텐데.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모양새군.”
“시기가 이르긴 하나 이런 상황 자체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너희들이 나를 찾아 벨디른 공화국에 온 것처럼, 내 의도대로.”
네 번째 하인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뭐, 본래라면 다크 워튼의 제자가 이 자리에 있어야 했지만. 카일리언스에서 새로운 변수가 끼어들었으니 결과 또한 달라지는 것이 자연스럽겠지. 비교하자면 오히려 지금이 더 만족스럽군.”
태연한 기색이다.
한낱 허세를 부리는 건 아닐 테니, 아직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겠지.
베르덴은 애써 추측하지 않았다.
애시당초 뭐가 됐든 간에 정면에서 박살 낼 계획이었으니까.
압도적인 힘의 논리.
그가 추구하는 건 초월자에게 닿는 절대적인 강함이다.
‘하지만 그 전에…….’
베르덴이 루아스교와 함께 주검의 영광을 추적한 이유 중 하나.
당장 마법 폭격을 가하는 대신 아공간에서 오래된 책을 꺼내 보였다.
네 번째 하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비올라가 가지고 있던 고대 서적이다. 알아보니 여기에 쓰인 문자가 약 800년 전에 존재했던 어떤 국가의 것이라고 하더군.”
아크에서 들은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대륙의 절반을 불태운 끝내 루아스교에 의해 역사에서 지워진 정체불명의 나라에 대해서.
그리고 물었다.
“너희들이 이 서적을 가지고 있던 게 우연인가?”
루아스교는 주검의 영광에 대한 정보를 숨기고 있다.
그러니 당사자에게 물을 수밖에.
에스티리아 왕국에서부터 시작된 마찰, 끼어들 대로 끼어든 이상 알 건 알아야겠다.
놈이 답하든 거부하든.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었다.
“…….”
침묵이 내려앉았다.
책을 응시하던 네 번째 하인이 말했다.
“그 역사, 누구한테 들었지? 대주교인가?”
“그랬다면 너에게 묻지도 않았을 거다.”
“아, 하긴…… 루아스교에 속해 있지 않은 자에게 모든 걸 공유할 리가 없으니. 그럼 질문을 바꾸지.”
그가 베르덴에게 시선을 옮겼다.
“왜 루아스교가 숨기고 있는 것에 의문을 갖는 거지? 종교를 믿지 않는 건가?”
“신의 존재 자체는 믿고 있다. 하지만 신뢰하지도, 신앙하지도 않는다.”
신성력은 신의 증명과도 같다.
그렇기에 존재를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에게 의존하고, 종교를 받들며 그 추종자에게 무조건적인 믿음을 갖는 건 완전히 다른 것이다.
베르덴의 개인적인 견해는 신랄하기 그지없었다.
여신 루아스를 신앙하는 자들이 듣는다면 대부분 반발할 것이다. 조제프 대주교조차 표정을 관리하기 어려워했겠지.
“존재를 인정하되 무관한 것으로 치부한다라…… 상당히 인간답지가 않군.”
네 번째 하인이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생사를 분별할 수 없는 눈동자에 짙은 흥미가 깃들었다.
“네가 그 동화책을 비올라에게서 얻은 건 우연이 아니다.”
* * *
관련성을 인정했다.
기만은 아닐 터다. 그야 이 고서가 동화책이라고는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으니까.
‘놈은 고대 문자를 해석할 줄 안다.’
네 번째 하인의 눈동자는 분명히 책의 제목을 읽고 있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증거였다.
“그 외에 달리 물어볼 건 없나? 대답해 줄 용의는 있다만.”
“거절하지.”
더 이상 들어 봤자 의미가 없다.
고대 서적의 경우와 달리 진의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으니까.
괜히 판단만 흐려지는 등 역효과만 날 뿐이다.
“현명하구나.”
네 번째 하인이 입가를 비틀었다.
동시에 앉아 있던 언데드 기사가 몸을 일으켰다.
강렬한 적의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군. 나는 위대한 주검의 네 번째 하인, ‘케실루스’. 그리고 차례로 ‘종말의 기사’와 ‘아크 리치’다. 개체명이지.”
이름이 불린 종말의 기사가 한 발을 내디디려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당장이라도 돌진할 듯한 극단적인 기세였다.
“놈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아드리안이 마검 케덴스를 양손으로 쥐며 자세를 잡았다.
이곳엔 목격자가 없다.
전 중앙 대륙 4강이라는 정체를 들켜도 상관없는 상황이다.
아드리안의 전신에서 흘러넘치는 자색의 기운. 검기가 일렁이는 마검이 강렬한 예기를 번뜩였다.
“맡기지.”
그게 신호였다.
섬전처럼 쏘아져 나간 아드리안이 허공에 획을 그었다.
어지간한 실력자는 감히 반응조차 할 수 없는 속도였으나 종말의 기사는 달랐다.
[너에게. 종언을. 고한다.]
망자의 의지가 담긴 섬뜩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인다.
직후 앞으로 달려든 종말의 기사가 급속도로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앙!
강력한 일격이 부딪쳤다.
그 충격에 견디지 못한 석재 바닥이 크게 으깨졌다.
이내 몇 번의 충돌이 이어지며 아드리안과 종말의 기사가 서로의 주군에게서 멀어졌다.
대기가 떨렸다.
불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금속음을 배경으로 마도사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체내에서 들끓는 마력.
케실루스가 칠흑의 고목 지팡이를 단단히 쥐었다.
“숫자가 맞지 않으니 나와 아크 리치를 혼자서 감당할 생각인가. 확실히 비올라와 노사를 죽였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강해졌군. 나조차도 경지를 엿볼 수 없을 정도니.”
세월을 무시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어린 마도사.
그런 말로도 설명이 부족한 기형적인 성장 속도와 강함이다.
감히 얕볼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기대된다.
“애셔, 대체 너의 죽음은 얼마나 거대할까. 생각해 볼 것도 없이 필시 독보적인 힘을 담고 있겠지……. 그래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케실루스의 눈동자에 기이한 저주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죽음 자체는 끝이 아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상태에 불과하니.”
위압적인 마력이 닥쳐 온다.
아무렇지 않게 그를 받아 낸 베르덴이 맞받아치듯 전력으로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아케인>으로 운용된 방대한 마력이 순식간에 뻗어 나가며 공간을 뒤엎었다.
쿠르르릉…….
주변에서 피어오른 용오름이 하늘을 어지럽힌다.
회색 하늘에 떠 있던 먹구름 속에서 수많은 번개가 요동치며 우레 소리가 들려왔다.
세계를 전율시키는 초월자의 격.
준초월자인 베르덴은 그를 국한된 범위 내에서 재현할 수 있다.
이전 워 로드, 레그리트와 교류전을 치렀을 때도 일으켰던 현상.
그때는 살육전이 아니었기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아니다.
“……?!”
단번에 마력에서 밀린 케실루스가 눈을 부릅떴다.
이것만큼은 상정하지 못했는지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언데드인 아크 리치조차 본능적으로 주춤거렸다.
“죽음이 일시적인 상태에 불과하다면.”
그들을 직시하던 베르덴의 오른쪽 눈동자에 역천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넌 죽어도 상관없겠군.”
추락하는 뱀.
<청사뢰>
뇌운이 일시에 번쩍였다.
이내 빛이 모여들며, 거대한 벼락으로 이루어진 6위계의 뱀이 수직으로 낙하했다.
콰과과과과과과!
압력에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옛 성터.
사방으로 확산한 전격의 폭발이 케실루스와 아크 리치를 여지없이 집어삼켰다.
동시에 오리엔트를 다잡은 베르덴이 자리를 박차며 섬광 속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