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전쟁의 바람
아 오늘도 힘들었다. 어떻게 잘 넘겼네.
만찬에 참여했던 손님들은 대부분 방으로 돌아갔고, 소수의 주당들과 모리츠 정도가 남아서 취한 아저씨들 특유의 와하하하하 하는 몰이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역시 모리츠는 이럴 때도 탱커로서 고마운 존재이다.
나는 트랑카벨 저택 만찬장의 발코니로 나와서 벽에 등을 기대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종일 허리를 펴고 돌아다녔더니 등과 허벅지가 이상하게 땅긴다. 그 자세 그대로 오른손에 들린 잔을 홀짝거린다. 평소에 마시던 포도주에 비하면 탄산이 많고 달달해서 마치 포도 주스 같다. 병을 잘못 들고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트랑카벨 가문의 블랑독 통합책은 큰 결실을 맺었다. 블랑독이 실제로 위협당하고 있으며, 트랑카벨이 그 위협을 극복할 수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겠지.
방금, 트랑카벨 가문을 맹주로 하는 ‘블랑독 연맹’이 결성되었다. 무려 드 누아 백작의 주도에 의해서였다. 세력은 트랑카벨이 더 크더라도, 귀족 작위의 격에서 백작과 자작은 차이가 크다. 이런 상황에서 드 누아 백작이 먼저 나서서 트랑카벨을 맹주로 추대하니 반대하는 가문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연맹 소속의 가문들은 영주가 스스로 병력을 이끌거나, 자금을 지원할 것이며, 그들의 영토에서 트랑카벨 영지군 소속의 병사를 모병하는 것을 찬성하는 조건이었다.
이로써 트랑카벨은 명실상부한 블랑독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지켜야 하는 영토도 늘어났다.
“어휴, 힘들었어요.”
바로 옆에 누군가가 앉는다.
“어어? 아쥬흐 양? 엇? 여기는 어째서?”
“저는 여기 오면 안 되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좀 지치네요. 저도 술 한 잔 주세요.”
“잔이 하나밖에 없는데···.”
“그거라도 주세요.”
아쥬흐는 내가 마시던 잔을 가져가더니 꿀꺽꿀꺽 마신다. 호쾌하게 원샷하더니, 푸하 하고 참았던 숨을 내쉰다. 그녀의 숨결에서 달착지근한 포도주의 냄새가 난다.
나는 옆에 있던 병을 들어, 다시 잔을 채워 내밀었다. 아쥬흐는 다시 한 잔 호쾌하게 원샷한다. 아니, 아쥬흐가 이렇게나 술을 잘 마셨었나?
“이번에는 제가 한 잔 드릴게요.”
나는 멍한 상태로 잔을 내밀어 아쥬흐가 따라주는 술을 받는다. 반투명한 붉은 액체 안에 탄산 방울이 떠다닌다. 그런데 잔 입구에··· 입술 자국이 있네.
“마시기 싫어요?”
“아뇨, 마십니다, 마셔요.”
나는 조심조심 아쥬흐의 붉은 입술 자국을 피해 포도주를 마셨다. 나도 원샷.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순식간에 병이 비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빈 병과 잔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달빛이 아름다운 밤에, 저택의 발코니에서, 어깨를 드러낸 금발 벽안의 미녀와 나란히. 조금 로맨틱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도 로맨틱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어디 갔나요?”
“아, 그 배불뚝이 라몽! 푸후후후···.”
아쥬흐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 소심한 백작, 자기 시종이랑 옷을 바꿔입고 도망쳐 버렸어요! 그것도 자기 옷을 입은 시종을 방에 남겨두고요. 자기 대신 위장을 하라는 거였겠죠?”
아니··· 뭐 이런 병신새끼가 다 있지? 이 세계로 와서 온갖 찌질한 놈들은 다 봤고, 나도 찌질한 짓을 꽤나 했었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정말 차원이 다른 놈이네. 내가 그 동안 워낙 정신적으로 성숙한 인간들만 만나서 그런가? 낙차가 너무 크다. 진짜 명치 한 방 세게 때리고 싶네.
“...혹시 트랑카벨에서 백작을 위협이라도 했나요?”
“그럴 리가요? 그냥 당당하게 정문으로 나가도 아무도 안 막았을 텐데, 그러고 가 버린 거예요.”
그렇겠지, 지금 라몽이 없어진다고 트랑카벨이나 내가 이득 볼 게 하나도 없는데.
“하아... 그래서 그 버려진 불쌍한 시종은요?”
“여비 챙겨줘서 보냈어요. 조금 두둑하게 챙겨줬더니, 나중에 ‘안부 편지’를 보내준다 하더라고요.”
와··· 아쥬흐의 판단에는 정말 감탄이 나온다. 상대의 찌질한 짓에 놀랐나 싶었는데, 그새 버려진 상대의 시종을 구워삶아서 간첩을 만들어 놨다. 이걸로 레뮤즈 백작가에 대해서는 좀 더 소상한 정보를 알 수 있겠지.
“자, 이제 들어가요. 손님들 가시는 길에 인사는 드려야죠.”
“네, 들어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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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카르카냑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평소처럼 군수 생산 구역을 들러 유능한 드워프 장인 에오르크 레타일을 만났다. 그리고 역시 평소처럼 몇 가지 일을 떠넘기는데 성공하고 기분 좋게 돌아오다 호출을 받았다. 이번에는 아쥬흐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저 왔습... 으앗 깜짝이야! 누, 누구세요?”
아니 이게 뭐야, 아쥬흐의 집무실에는 머리에서 종아리까지 검은 천, 후드 달린 긴 옷을 입은 정체불명의 인물 네 명이 서 있었다. 게다가 겉으로 드러낸 얼굴은 철로 된 가면이 덮고 있다. 입구를 막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석에 모여서 있는 게 누구를 위협하기 위함이 아니라 통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인가. 생긴 게 무서워서 그렇지 딱히 위협적이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콘도티에레 에트,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콘도티에레.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안에는 아쥬흐와 철가면을 쓴 남자들과 같은 옷을 입었지만, 후드를 벗고 가면도 쓰지 않았다. 이들의 우두머리나 그런 건가. 단정한 바가지머리를 한 남자의 가느다란 눈에서 나를 살피려는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
이건 '평가하는' 듯한 눈이다.
"이 분은 주디칼리의 철면 은행에서 출장 오신 빈첸조 지점장이에요. 빈첸조 지점장님, 저희 가문의 콘도티에레 에트입니다."
철면 은행? 지점장? 아, 주디칼리에서 지낼 때 들어본 것 같다.
대륙 여기저기에 지점을 가진 말 그대로의 은행이다. 평범하게 일반인이나 상인들을 상대로 영업하기도 하지만, 국가나 유력자들을 상대하는 것이 주된 업무라고 들었다. 보유하고 있는 금고 요새들에는 엄청난 양의 금을 쌓아놓고 있어서, 요새를 짓는데 들어간 돌보다 금고에 보관하는 금이 더 무겁다나 뭐라나. 철면 은행에서 발행한 지급 증서가 화폐처럼 쓰이는 것도 보긴 했지.
그런데 트랑카벨에는 무슨 일로... 아니 설마! 가문에 돈이 떨어졌나? 내가 너무 많이 써버려서? 크... 솔직히 얼마 썼는지도 모르고 되는대로 막 써버리긴 했다. 어차피 아무리 써도 아쥬흐가 벌어다 주면 되는 거로 생각했었고.... 어떡하지 이제.
"최근 현금을 지급할 일이 많아져서 돈이 떨어져서요."
아쥬흐가 말한다. 아니 진짜 돈이 떨어졌어? 대출까지 써야 할 정도로? 설마 차압 들어온 것은.... 나야 빚 없이 살아온 인간이라 상관없지만, 철면 은행은 피도 눈물도 없는 이자 징수로 유명하기도 했다.
"그래서 철면 은행에 돈을 가져다 달라고 했죠.”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빈첸조가 손짓하자, 네 명의 철가면이 척척 걸어온다. 이제 보니 그들은 상자 하나를 들고 있다. 모서리와 옆면이 강철로 보강된, 그냥 봐도 엄청나게 단단하고 무거워 보이는 상자.
척척척 걸어온 그들은 쿵 하고 상자를 내려놓는다. 상상 이상으로 묵직한 소리에, 마룻바닥이 부르르 떨리는 것 같다. 아니 설마 이게 전부···.
“금액을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아니요, 철면 은행의 철저한 계산을 의심하는 것은 시간 낭비죠.”
“고객님께서 보여주시는 신뢰에 보답하겠습니다.”
네 철가면이 상자의 모서리를 뭔가 철컥철컥하더니, 상자의 윗면이 좌우로 열린다. 아마 아무나 못 열게 특수한 기믹을 넣어놓은 모양이지.
안에서 찬란한 황금의 색··· 이 나올 줄 알았으나, 그렇지는 않았고 두껍고 거친 아마포로 짠 주머니들이 나왔다. 대충 어린아이를 감싼 포대기 정도 크기이다.
쿵, 쿵, 쿵, 쿵, 쿵··· 테이블에 주머니들이 순서대로 놓인다. 12개나 되네···.
“주문하신 대로, 여섯 개는 금화, 나머지는 당장 사용하실 은화로 채워져 있습니다.”
뭐.
“감사해요, 빈첸조 지점장.”
뭐 시발.
“고객님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저희 기쁨입니다.”
뭐 시발 저게 다 돈이라고?
“이게 다 돈이라고···?”
놀라서 높임말을 빼먹었다.
“후후, 콘도티에레 에트가 큰일을 하시는데, 돈이 부족하면 안 되잖아요?”
아쥬흐가 예쁜 말을 한다. 얼굴도 예쁜데 마음 씀씀이도 예쁘네.
그나저나 이렇게 돈을 다 쌓아놓는다는 것은, 이 돈을 다 쓰면 트랑카벨이 위험에 빠진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책임이 더더욱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아쥬흐 트랑카벨 고객님께서 요구하신 대로, 주식의 절반을 청산한 금액의 나머지는 저희 은행에서 맡아두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은행을 결제 대행 수단으로 사용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구나.
“저, 아쥬흐 양. 그동안 트랑카벨 영지군을 확장하면서 돈을 상당히 많이 사용한 것 같은데, 어느 정도 남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후후, 돈이 떨어질까 불안하신가요?”
“네, 사실 금액도 안 보고 막 썼으니까요.”
“사실은 트랑카벨의 자산은 그동안 조금 불어났답니다?”
“엑?”
“여기 빈첸조 지점장께서 투자 조언을 해주셔서요. 그대로 했더니 불어나더라고요.”
뭐여, 돈이 복사가 된다, 이 말인가?
“저는 지점장으로서, 소중한 고객님의 자산을 지키기 위해 약간의 조언을 해 드렸을 뿐입니다.”
빈첸조가 예의 바르게 말한다.
“일단 주식 중 절반을 오른 가격으로 청산해서 현금을 만들었고요, 그 돈으로 나우데사의 무역 회사 한 곳의 주식을 더 샀어요. 마지막으로, 그 무역 회사와 블랑독 상단의 포도주 독점 계약을 체결했어요.”
그거 뭐 내부자 거래나 주가 조작이나 이런 거 걸리는 것 아님? 여기 세계에는 그런 것 없나? 성실한 근로자로서 막 분통이 터지려고 하는데. 아니 어? 사람이 돈을 어? 땀 흘려서 벌어야지!
“...그래서 얼마나 늘어났나요?”
“음··· 투자액의 네 배? 그룬발트에서 블랑독 포도주 인기가 상당하더라고요. 나우데사나 알디온에서도 그만큼 잘 팔리면 좋겠네요.”
아이고··· 존버로 60배 벌었었는데, 4배면 뭐 그저 그렇네··· 가 아니구나. 괜히 걱정했네! 걱정해서 손해란 게 이런 거구나!
“상상이 잘 가진 않지만, 돈 떨어져서 전쟁에서 지는 일은 없겠다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후후, 잘 부탁드려요. ‘트랑카벨의 승리’ 말이에요.”
“네에 네에, 맡겨만 주십쇼.”
머릿속에서 효율 문제로 도입하지 않았던 무기 몇 개가 갑자기 생각난다. 확 질러 버릴까?
“그나저나 콘도티에레께서 트랑카벨에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막 망상에 빠져들려고 하던 차에, 빈첸조가 말했다.
“저를 아십니까?”
“물론입니다. 저희 은행은 용병단에 투자하기도 하고, 용병대장님들의 자산을 관리하기도 하니까요. 에트 경께서도 관리를 원하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저는 빈털터리라서 그런 거 없습니다."
“호오, 조금 아쉽군요.”
빈첸조는 정말 아쉬운 건지, 예의상 하는 건지 모호한 미소를 짓는다.
“인간은 크든 작든, 살면서 투자를 하고 살게 됩니다. 그게 자산이든, 인생이든, 신뢰든,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든 투자의 대상이 되거든요.”
“허어···.”
“투자의 기본은 리스크 관리입니다. 그런 점에서, 트랑카벨 가문은 아주 우량한 소재에 가문의 미래를 투자하셨군요. 그 안목, 투자 조언가로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후후, 과찬이십니다.”
그러니까 뭐 내가 쓸만하니 잘 투자했다 이런 말이지. 칭찬 같기는 한데 묘하게 혼란스럽다.
“블랑독 상단은 주식을 발행하지 않으시나요? 철면 은행이 공정한 가격으로 전량 매입할 의사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어머나, 블랑독 상단을 손에 넣으실 생각이신가요?”
“설마요. 저희는 발전할 여지가 보이는 사업에 자금을 수혈할 뿐입니다.”
“저희 상단은 이번 전쟁을 이겨내면 그때 투자를 받을 예정이에요.”
“좋은 판단이시군요. 전쟁 위험을 극복한 트랑카벨··· 분명 훨씬 좋은 평가액이 되겠네요.”
와 생각해보니 그렇네. 지금 지분을 넘기면, 전쟁을 앞둔 상태에서 저평가받을 수밖에 없지만, 전쟁이 마무리되면 그런 페널티 없이 평가를 받을 수 있으니까!
...이게 큰돈 버는 사람들의 마인드구나. 솔직히 감탄스럽다. 하긴 이전 생애에 친하게 지냈던 선배도 돈이 돈을 벌도록 하지 않으면 평생 품팔이 생활을 못 벗어난다 했었다. 눈앞에서 어마어마한 돈이 왔다 갔다 하고, 몇 배 오르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실감이 온다.
만약 나도 애매하게 전쟁으로 먹고사는 게 아니라 주식에 재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주식으로 이세계를 독식한다’ 이런 세계관도 있을 법하지 않을까?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에트 경. 저는 이미 트랑카벨 가문과 당신께 투자하고 있거든요.”
“저는 주식 같은 것 없는데요.”
“그렇기는 하지만 에트 경의 활약에 따라 가치가 올라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저는 거기에 투자했습니다.”
이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 무슨 테마 주나 수혜 주 같은 건가.
그렇게 다섯 명의 철면 은행 직원들은 트랑카벨 저택을 떠났다. 살다 보니 별 경험을 다 해보게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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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특별히 큰 사건도, 마음과는 다른 큰 지름도 없이 계획하고 있던 트랑카벨 영지군을 만들어가던 시기, 마침내 소식이 왔다.
엘랑키아 왕실이 법황청의 이단 토벌령에 응했다.
국왕이 엘랑키아 전역의 귀족들에게 블랑독으로 쳐들어갈 ‘명분’을 만들어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