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슈토르히 용병단
다음 날 아침, 나는 오랜만에 군수 생산 구역을 방문해 일찍부터 주점에 자리를 잡았다.
“최근 한 건 박터지게 하고 왔다더니, 또 아침부터 술인가! 나도 한 병 줘! 제일 독한 걸로!"
내가 아는 가장 뛰어난 드워프 장인, 에오르크 레타일은 자연스럽게 내 앞에 앉아 술을 주문했다. 그것도 병으로. 역시, 일부러 작업장 안으로 들어가면 뜨겁고 시끄럽고 난리인지라, 찾기도 힘들다. 여기서 술 마시고 있으면 알아서 찾아올 거로 생각했다.
“그래, 가죽포는 어떻더냐? 딱 네가 만들라던 대로 만들어 주었는데.”
“아, 그거 좀 별로더라고요.”
“뭣이!”
“하아, 대포라는 게 쏘면 순식간에 뜨거워지는데, 가죽으로 씌워 놨으니 열기가 빠져야 말이죠.”
“이노옴! 전부 내가 만들기 전에 했던 말 아니냐! 어떻게든 써 볼 테니 만들어 보라 했던 것은 바로 네 놈이고!”
“아 그렇죠. 그래서 써 보고 피드백해 드리잖아요.”
“이이익!”
에오르크가 분노했는지 탁자가 흔들흔들했지만, 주문했던 술이 나오자 얌전히 앉았다. 그대로 반병 정도 쭈욱 들이킨다. 아니 오늘 일해야 하는데 이렇게 마셔도 되는 거야?
“그래도 성능은 좋았어요. 전투 중인 적 바로 10미터 근처에다 방열하고 옆구리에 대고 쏠 수 있었습니다.”
“으음, 역시 너는 사람 좋게 생겨서는 무서운 짓을 하는 놈이로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기가 만든 무기가 활약을 했다는 말에 기뻐하는 기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역시 기술자라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칭찬을 하는 것 보다, 만들어낸 물건을 칭찬하는 것이 효과가 좋다. 자기보다 아이가 칭찬받으면 기뻐하는 부모의 마음일까. 나도 애가 없어서 모르겠네.
“트랑카벨의 병사 중에, 열을 다루는 기프티드가 있습니다. 레미라고.”
“열을 다룬다?”
“네. 사격 직후의 뜨거워진 포신을 오후의 따스한 햇볕 정도로 기분 좋게 만들어 주더군요.”
“오호! 그거 유용한 기프트로구만!”
“그렇죠?”
역시나, 에오르크는 크게 흥미를 가진다. 기술자로서 관심이 갈 수밖에 없겠지. 뜨겁게 만드는 것도, 식히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물체에 손상을 가하지 않고는 말이다.
“그래도··· 그만한 인재를 가죽포 다루는 데 쓰는 것은 좀 아쉽구만···.”
“저도 조금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한 번에 옮기거나 방출할 수 있는 열의 총량은 제한되는 모양입니다.”
“하긴 사람이 하는 일이니, 한계는 있겠구먼···.”
구경이 작을수록 연사 속도가 빠르고, 연사 속도가 빠를수록 포가 과열될 가능성이 커진다. 에오르크가 말하는 것은, 기왕 능력을 활용할 것이라면 더 크고 강력한 화포의 연사력을 끌어올리는 데 쓰면 좋겠다는 것이다. 나도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레미의 능력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이 많으니.
“아무튼 가죽포는 더는 만들지 않기로 했습니다.”
“뭐 그렇겠지. 이미 만든 것은 계속 쓸 텐가?”
“그래야죠. 기병 행군 속도를 따라가는 포가 어디 있겠습니까.”
“또 괴상한 것을 꾸미고 있구만!”
에오르크가 껄껄거리며 웃으며 남은 병을 전부 비웠다. 나는 잔과 은화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려는가? 그래서 이제 뭘 만들면 되나?”
“각 연대에 포를 배치하려고 합니다.”
“흐음 어떤 포를?”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목이 답답해지고 땀이 나는데. 이거 그냥 서면으로 요청하면 안 되나?
“그걸 좀 만들어 주셔야···.”
“그러니까, 어떤 포를 만들라는 건데?”
“가죽포 말고, 청동이나 황동을 사용해서 만들어 주시고요. 재질은 원하시는 대로 정하셔도 됩니다.”
“으음, 그리고?”
“무게랑 연사 속도랑 사용 편의성 등등은 가죽포와 별 차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네 이노옴!”
덜컹덜컹, 탁자가 뒤집힐 듯이 흔들린다. 하지만 이때를 위해서 인간 사이즈의 의자만 가져다 놨었지. 드워프는 오르기도, 내려오기도, 밀치고 지나가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항상 전장을 살피고 유리한 포지션을 선점하는 것이 가늘더라도 길게 사는 비결이다.
“아 앉아서 말씀하시죠, 앉아서.”
“이노옴! 항상 터무니없는 일만 맡기는 것이냐!”
“전 트랑카벨이 에오르크 님만 믿고 있습니다!”
“거기 서라 이 녀석! 죽고 싶은 게냐!”
“다음에 좋은 술 좀 챙겨올게요!”
나는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화두는 던졌으니, 이제 에오르크 영감은 신경 쓰여서, 자존심 때문에라도 극한까지 효율적인 무기를 깎아 낼 것이다.
양심상 멱살 정도는 잡혀 드리고 싶지만, 오늘은 정말로 바쁘니 다음을 기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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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자료를 정리한 나는 점심을 대충 먹고 트랑카벨 저택으로 향했다. 마치 이전 세계에서 학생 시절 발표를 앞둔 것 같은 두근두근한 기분이다. 나름대로 고민도 많이 하고 합리적이라 생각해서 준비해 온 자료와 수치지만, 지적당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
“오셨습니까, 콘도티에레!”
“모리츠구나. 왠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하하, 슈토르히 보급 체계 관련 일은 잘 마무리됐습니다!”
우리는 함께 회의실로 이동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모리츠는 새로이 트랑카벨 영지군에 편입된 슈토르히 연대를 기존 영지군 보급체계 안으로 집어넣기 위해 몇 가지 절차를 하느라 어제오늘 바빴던 모양이다.
“다른 분들은 다 오셨나? 톨마르 마슈레 경은?”
“오셨습니다! 여전히 목소리가 크시더군요!”
“...뭐?”
으으음··· 정말로, 정말로 악의는 없는데 말이야···. 모리츠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않을까? 톨마르 경과 모리츠는 서로 한 100미터쯤 떨어져서도 평소처럼 대화할 수 있을 것 같다. 식사하셨습니까! 음 먹었네! 자네는! 이러면서 말이지. 둘 다 인간 확성기야 아주.
“오오, 에트 경!”
생각하기 무섭게 톨마르 경이 나타났다. 역시 복도에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벨모제 방어 계획을 준비하시느라 바쁘셨던 것으로 아는데, 정말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고.
“아니, 이제 에트 경이 아니라 콘도티에레라고 불러야 하나?”
“평소대로 불러주세요. 그런 분이 하나쯤은 있어야죠.”
“하핫, 콘도티에레라는 명칭이 싫은 것인가?”
“음, 그건 아니지만···.”
“뭐 좋네, 에트 경! 최근 여울목 전투의 승리에 대한 소식은 들었다네! 소문만 들었는데도 피가 다 끓더구먼!”
“하하···.”
노기사의 솥뚜껑 같은 손이 어깨를 감쌌다. 톨마르 마슈레, 트랑카벨 가문에 충성을 바치는 기사 중 최연장자인 이 노인은 가신들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다.
“지금 가문의 기둥은 자네일세!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테니, 이 노인네가 필요하다면 어디라도 써 주게!”
“저희가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데요, 지금 계획도 톨마르 경의 역할이 없으면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하하하하핫! 역시 듣기 좋은 말도 잘하는구먼!”
“으헉, 저 죽어요!”
톨마르의 거대한 손이 또 내 등짝을 후려갈기자, 내 상체가 한 30센티는 앞으로 휘청인 것 같다. 으으, 이 동네는 또 왜 이렇게 힘센 사람이 많아.
“아롱드 트랑카벨 자작님께서 들어오십니다.”
중요한 일, 앞으로의 대전략을 결정할 일이라 이번에는 트랑카벨 가문의 세 사람인 아롱드, 아쥬흐, 아실 세 사람이 모두 참석하기로 했다.
그리고 트랑카벨 가문의 네 자작령 중, 벨모제를 위임받은 성주 톨마르 마슈레와 몽세나를 위임받은 성주 파스칼 드 뒤랑이 참여했다. 파스칼은 아넥시와 여울목에서 전공을 세운 기병 연대장이기도 하지.
카르카냑이야 트랑카벨의 본성이니 따로 위임 성주가 없고, 델레망드 성주는 거리 관계로 이번에는 참여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델레망드의 성주는 블랑독 상단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사보다는 상인에 가까운 인물이라 하는데 나도 만나본 적은 없다.
그리고 나와 내 부관인 모리츠가 참여한다.
카르카냑 부근에 주둔 중인 연대장들도 역시 참여시킬까 하는 고민을 했으나, 앞으로 결정된 사항을 알려주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 회의는 말 그대로 트랑카벨 가문의 대전략, 앞으로 군사적으로 어떻게 대응할지를 결정하는 것이었으니까.
“향후, 아마도 내년 봄부터 성전군의 침공이 본격화 되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모두의 시선을 느끼며 준비해온 내용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 주력은 엘랑키아 중추의 귀족군이 되겠죠. 국왕이 직접 이끄는 왕실군이 처음부터 앞장서지는 않을 겁니다.”
아쥬흐가 엘랑키아 전역에 뿌려 놓은 상인들의 정보망을 통해서 수집한 자료에 기반한 내용이다. 국왕 직속의 왕실군은 북방 전쟁에서 생각보다 큰 피해를 입었고 재편성에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우선은 고향으로 내려보내 힘을 기르고 재소집의 과정을 거치겠지.
게다가 이단 토벌 명목이라고는 해도, 저 남쪽 촌구석의 자작가 따위를 치는 데 국왕이 직접 나서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못하니까. 사실 측근의 귀족 군대만 해도 ‘자작가 따위’ 토벌에는 충분한 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하지만 트랑카벨은 ‘자작가 따위’가 아니다. 이만큼 당했으면 슬슬 알 법도 하지만.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이를 상정한 블랑독 방어 전략과 트랑카벨 영지군 증강에 대한 것입니다.”
나는 중앙의 탁자 위에 큰 블랑독 전체 지도를 펼쳤다. 참석자들이 이를 보기 위해 탁자 위로 고개를 숙인다. 키가 작은 아쥬흐와 아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으음, 아롱드 영감님은 잘 보이시려나.
“안타깝지만 블랑독 전체를 지킬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지켜야 하는 선은 로데브 강과, 그 북쪽 지류의 이남으로 정했습니다.”
나는 손가락으로 블랑독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로데브 강줄기를 훑으며 말했다. 로데브 강은 블랑독 전체의 생명줄이다. 트랑카벨의 네 자작령 중 세 곳, 카르카냑, 벨모제, 델레망드가 로데브 강변에 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허어···.”
톨마르가 안타깝다는 듯 탄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벨모제는 로데브 강의 북쪽에 있는 영지인 것이다. 필연적으로 적의 공세에 노출되겠지.
“허나 우리는 준비하고 있지! 1년이든 2년이든 버틸 자신이 있소이다!”
노기사가 굳은 결의를 담아 대답한다. 그의 말대로, 벨모제는 최신 공학 기술을 이용해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도시 전체에 네 군데의 포좌를 증설해 공격해오는 적의 머리 위에 불벼락을 떨굴 준비를 하는 한편, 해자를 깊게 파고 흙으로 성벽을 덮어 공성포의 공격에도 대응하고 있다.
“우물도 두 개 더 팠고, 강물로의 접근로도 강화하고 있소이다!”
“역시 든든하네요, 톨마르 경.”
“도련님의 도시이지 않습니까? 호락호락하게 내어 줄 수야 없지요?”
아실이 감탄하자 톨마르가 애정이 듬뿍 담긴 대답으로 응답한다. 아실은 트랑카벨의 후계자이면서 벨모제의 자작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 벨모제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니 애정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
“믿음직합니다. 또한, 저희 야전군이 벨모제의 위기를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믿지, 믿고 있겠소!”
벨모제가 함락당하지 않는 한, 적은 벨모제 포위에 상당한 병력을 할애해야 할 것이고, 그 나머지를 우리 야전군이 때려 부수면 간접적으로 벨모제도 구원되겠지. 반대로 적이 벨모제에만 집중한다? 그러면 그 뒤통수를 노리면 되는 것이고. 반드시 이길 필요도 없이 신경만 긁어주면 된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후방에 적을 두고도 강한 병사는 없으니까.
“저, 콘도티에레 질문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아실 자작님.”
걱정스러운 표정의 아실이 몹시 조심스럽게 의견을 표출한다. 가문의 후계자인 이 소년은 서열상 가주인 아롱드에 이어 이 자리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사람이겠으나, 역시 어른들만 있는 자리에서 자신을 내세우기에는 아직 익숙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면 로데브 강 북쪽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요?”
이 소년 귀족의 표정은 조금 괴로워 보인다. 자신이 언급한 이들이 걱정되기도 할 테고, 혹시라도 자기 의견으로 인해 내 계획에 부담이 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겠지.
한편 나는 참기 어려운 유쾌함을 느꼈다. 입가가 실룩거리는 것을 숨기기 어렵네. 어찌 누나나 동생이나, 성격은 전혀 다르면서 똑같은 점을 걱정하는지. 이래서는 내가 어떻게든 해결 해 줄 수밖에 없게 되잖아! 하여간 섬길 맛 나는 고용주들이네.
“로데브 북쪽의 정순파 신도들은 트랑카벨의 영토 안에 피난처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누님이신 아쥬흐 양과 몽세나의 성주 파스칼 경이 신경 써 주고 계시지요.”
“아, 역시 콘도티에레께서 먼저 생각하고 계셨군요. 그렇다면 저는 믿고 맡기겠습니다. 그래도 집을 옮기는 것은 그 사람들에게 힘든 선택일 테니, 신경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자작님.”
“벌써 신경쓰실 점이 많으실 텐데··· 부담을 드려 죄송하네요. 더 필요하신 점이 있으시면 제가 어떻게든 돕겠습니다!”
냉철하고 계산적인 군주와, 정이 많고 자비로운 군주 사이에 누가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내가 경험했던 꽤 많은 군주가 전자를 추구하면서 전자대로 행동하지 못했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머저리는 냉철하고 계산적인 군주가 아니다. 그냥 폭군이지.
아실의 사고방식은 당장 내년에 트랑카벨이 살아남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100년 후에도 트랑카벨이 살아있다면, 그건 아실의 사고방식 덕분이리라.
“자, 그럼 이 방어전략을 위해서 필요한 병력 증강 계획입니다.”
나는 다른 자료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