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전쟁하기 좋은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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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랜만에 군수 생산 구역 주점에 앉아서는 포도주를 한 잔 시켰다.
몇 달 사이에 여기도 많이 변했다. 그냥 임시 건물 임시 바 같던 느낌이, 어느새 확장하여 규모도 커지고, 바로 옆에 숙박시설도 붙었다. 그만큼 인원이 늘어나고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씀씀이도 좋아졌다는 것이겠지.
참고로 여기 주점과 여관은 트랑카벨 가문에서 위탁하여 운영하는 시설이다. 주변 상점들도 마찬가지로, 수익금은 상이군인 복지에 사용된다고 한다.
“네 이노옴! 또 어디를 돌아다니다 인제야 오는 것이냐!”
“아 와서 앉아 보시라니까요?”
내가 커다란 배낭을 꺼내놓자, 에오르크 레타일은 툴툴거리면서도 옆에 와서 앉는다.
“소식은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라솔 접경 지역에 다녀왔습니다.”
“네놈이 어디로 다니는지 내가 알 바냐.”
“아무튼, 라솔에는 체리로 만든 술이 있다는 모양입니다. 이게 또 침 나오게 시고 이가 아플 정도로 달아서 말이죠···.”
“허헛, 네 놈도 아직 어려서 술맛을 모르는구나! 그렇게 어정쩡하게 향만 예쁘게 만들어서, 계집애들이나 좋아하는 술이 아니더냐!”
“아 거 노인네 이게 일단 45도짜리거든요? 여자분들 드리면 코앞에 대기만 해도 질색하니까 일단 맛이나 보시고요.”
나는 빨간 체리 덩어리가 들어있는 술병을 기울여 작은 술잔에 선홍색 액체를 따랐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고양이 오줌만 한 잔에 따르는 건데?”
“원래 이렇게 마시는 술이에요. 하여간 병나발만 불어대니 맛을 모르죠.”
“에잉, 쯧.”
에오르크는 짜증을 내면서도 내가 따라 놓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더니 후욱 하고 콧김을 내뿜는다. 이게 보기보다 엄청 독한 술이니까, 첫맛 달다고 방심했다가는 입천장 날아간다.
“으음, 역시 모르겠군. 한 잔 더!”
“더 드리기 전에, 만드신 것 좀 봅시다.”
“이노옴! 말도 안 되는 대포 발주량을 다 맞춰줬건만, 그걸로 부족한 것이냐!”
“아 알죠, 아니까, 이렇게 감사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들고 계신 것 좀 보자니까요.”
“그게 감사하는 태도냐!”
다시 툴툴거리면서도 이 드워프 기능공은 기름종이에 감싸인 길쭉한 덩어리를 내 앞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나는 체리주 병을 넘겨주고, 조심스럽게 포장된 종이를 벗겼다.
“오호···.”
안에는 예상대로 새로운 총기가 들어있었다. 철로 된 부분은 반짝반짝 빛나고, 나무로 된 부분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윤이 나는 좋은 마감의 무기. 왜 무기는 사람을 죽이는 도구 주제에 이렇게 아름다운 것일까.
지금까지 이 세계에 존재한 적 없는 총기이다. 내가 ‘아 이런 식으로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들어요, 천재 엔지니어 맞잖아요?’ 하면서 어거지로 만들어 내게 한 총기.
“크어어··· 라솔 놈들이 만드는 술도 가끔은 나쁘지 않구만!”
연거푸 술을 들이키는 에오르크를 무시하고, 나는 총기를 양손으로 잡았다. 묵직하면서도 손에 착 달라붙는 서늘한 그립감. 근본적인 작동은 최신형 화승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몇가지 부품을 끼릭끼릭 만져 보다가 능숙하게 작동해 본다. 이윽고 허공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자,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격철이 깔끔하게 앞으로 접힌다. 화문을 덮은 덮개가 그 충격으로 열린다. 만약에 여기 부싯돌이 끼워져 있고 화문에 화약이 담겨 있었다면 점화되면서 불이 일어났겠지.
“부싯돌 없어요 부싯돌?”
에오르크는 말도 없이 손톱만 한 돌을 던져준다. 체리주가 제법 마음에 드는지,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나는 천을 끼우고 죔쇠를 주의 깊게 조여 돌을 고정한다. 어우야··· 아직 볼트와 너트가 양산되지 않은 세상인데 이거 죔쇠 나사산을 다 손으로 팠나 설마? 이거 때문에라도 공임비가 장난 아니겠는데.
납작하게 깎인 부싯돌을 잘 고정하고, 격철을 뒤로 당긴 다음 다시 허공에 대고 조준한다. 허공의 가상 표적을 노리고 방아쇠를 당긴다.
찰칵!
스프링의 힘을 잔뜩 물고 있던 격철이 해방되자, 부싯돌이 앞으로 떨어지며 강철로 된 화문 덮개를 때린다. 쉬익 하고 흩날리는 금속 파편에 불꽃이 일어나며 화문 덮개가 열리고 화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만약 장전 상태라면, 이렇게 부싯돌이 부딪히면서 만들어 놓은 불꽃이 화문에 떨어지고, 화문을 채우고 있던 고운 화약에 불이 붙는다. 이렇게 순식간에 타들어 간 화약이 총열 내부의 장약으로 옮겨붙으면 탕! 하고 총알이 나갔겠지.
와··· 솔직히 이건 못 만들 줄 알았는데 벌써 이렇게 만들어 버렸네. 실제 역사에서도 부싯돌을 이용한 점화 방식은 화승총이 대중화된 직후부터 끊임없이 연구되었다. 다들 지긋지긋한 화승 관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겠지. 하지만 안정성, 비용, 양산성, 심지어 부싯돌을 구하기 힘들다는 등등의 이유로 제한적으로 활용되다가 전체적으로 공학적 발전이 이루어진 이후에나 대중화되었다.
대단하다 드워프! 훌륭하다 에오르크 레타일! 매달 들어가는 연구비가 아깝지 않을 정도다!
뭐, 어차피 내 돈은 아니니까 생색낼 필요야 없지만.
“이거··· 기가 막히네요! 솔직히 실패하실 줄 알았어요.”
“망할 놈! 자기도 확신하지 못하는 물건을 어거지로 떠넘기듯 시킨 것이냐!”
“아뇨, 확신은 했지요. 확신은 했는데 제가 똑바로 설명을 못 했잖아요! 그래서 감탄한 거예요!”
“어휴 내가 사서 고생을 했구나···. 그래도 네 녀석이 평소 하는 헛소리 중에 그래도 쓸만한 소리가 있다는 것은 아니까, 이번에도 건질 게 있지 않았나 싶어서 만들어 본 것이다!”
“그래서 부대 단위 양산은 가능한 건가요?”
“당연히 가능하지! 하지만 기능공들이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다. 애초에 수백 정쯤 만들 생각 아니었으면 시작도 안 했다 이놈아!”
나는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새로 완성된 수석식 점화 소총, 즉 수석총을 이리저리 살폈다. 딱 내 주문대로, 적당한 크기와 길이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건 왜 만들려는 것이냐?”
“우선은 기병대에 보급할 생각입니다. 화승 안 꺼지게 유지하면서 말 타는 게 워낙 힘들어서요.”
“허어, 그런 용도인가. 어차피 트랑카벨은 부자가 아니냐? 돈 들여서 비싼 치륜식 쓰면 되지 않느냐!”
“그게 비싸도 너무 비싼 데다가 고장이 나면 야전에서 고칠 방법이 없더라고요.”
“흐음··· 그런 문제가 있기는 하지. 그런데 대체 이런 생각은 어쩌다 하게 된 것이냐! 어설프게나마 설계도까지 그려오지 않았더냐?”
“꿈에서 보았죠! 이것 가져가도 될까요? 실사격 가능하죠?”
“그러엄, 내가 대충 만들 리가 있느냐! 샘플이 몇 개 있으니 가져가도 괜찮다.”
“으흐흐, 감사해요. 아, 이건 체리주 추가분이고, 이건 증류하면서 사과 향을 훈제한 증류주래요! 괜찮더라고요, 술 너무 드시지 마세요!”
“허허, 이노옴!”
나는 가방에서 술병을 몇 개나 꺼내서 에오르크 앞에 늘어놓았다. 정말 이 드워프 기능공을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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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방식의 총 말씀이십니까?”
나는 싱글벙글하면서 훈련장의 모리츠를 찾아갔다. 퍽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아서 반갑기도 하다. 내가 갑자기 찾아와서 신나서는 횡설수설하자 당황한 모양이다. 모리츠는 첼레스티나에게 부관 역할을 넘겨준 이후로는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연대장 대리 임무와 함께 총병 훈련 교관으로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설마··· 설마? 부싯돌로?”
내가 실물을 넘겨주자, 모리츠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몇 번 구조를 살펴고 방아쇠를 당겨보더니 나와 비슷한 반응이 된다. 나는 총을 돌려받아 옆에서 까치발을 하고 지켜보고 있던 에밀리아에게 넘겨주었다. 아넥시에서 구원받았던 이 소녀는 군속으로서 나름 제10 연대의 전령 역할을 하고 있었고, 모리츠로부터 사격술을 배워 제법 괜찮은 사수라고 들었다.
“이게 네 총과 어떻게 다른지 알겠니?”
“콘도티에레, 화, 화승을 어디에 끼우죠?”
“이건 화승이 필요 없는 총이란다!”
“그럼 점화를 어떻게 하나요?”
“하하. 에밀리아, 격철을 당기고 방아쇠를 당겨보렴! 아, 손가락 조심하고!”
“참, 모리츠 님, 저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당돌하게 말한, 나이보다 좀 어려 보이는 소녀는 나름 능숙한 사수의 솜씨로 격철을 뒤로 당기더니 허공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찰칵하고 불꽃이 일어난다.
“이번에도 또 멋진 물건을 만드셨군요, 콘도티에레!”
“아아··· 솔직히 가죽포는 실패였으니까··· 가끔은 성공도 해야지.”
“어떻게 사용하실 생각입니까?”
“양산하려면 당장은 힘들겠지만, 우선은 용기병대에 보급할 생각이야. 이거면 화승에 불 꺼질 걱정 없이 말을 탈 수 있겠지?”
“그렇습니다! 총신 길이를 보니 마상 사격도 염두에 두고 계신 것 같습니다, 콘도티에레!”
“더 비싼 무기니까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우리는 한참 떠들면서 앞으로 이 무기로 인해서 용기병대의 특성이 어떻게 변할지, 어떤 상황에서 추가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열띠게 토론하기 시작했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얻은 어린애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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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소집령이 왔군! 혹시 다른 연대에도 소집령이 전해졌던가?”
“예!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좋아, 수고했네!”
제21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중대장 막생 노타름은 업무를 마치고 연대장 막사 근처를 지나다가 연대장이 누군가에게 보고받는 것을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령 복장을 한 병사가 막사에서 나온다.
“자네 아치요 아닌가?”
“예? 엇! 막생 경··· 맞는가요?”
“그렇네. 군복을 입은 것을 보니 썩 잘 어울리는 군! 정식으로 트랑카벨 영지군의 전령이 된 모양이네! 정말 잘 됐구만.”
“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콘도티에레께서 전령을 해 보는게 어떻겠냐고 추천해주셔서···.”
“자네는 달리기도 빠르고 책임감도 강하니 이보다 더 적역이 없겠지!”
두 사람은 여울목의 전투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다. 막생이 정순파 주민들을 이끌고 랑두제 영지를 탈출할 때, 근처에서 훈련하고 있던 트랑카벨 영지군에 알리기 위해 아치요를 보냈었고, 온종일 뛰어다닌 아치요는 다행히도 트랑카벨군의 위치를 찾아 소식을 무사히 전할 수 있었다.
막생 노타름 자신은 이후 아내와 함께 카르카냑 남부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던 의용군 및 랑두제 출신 병사들과 함께 트랑카벨 영지군에 지원했다. 마침 새로 편성되던 제21 연대에 배치되었으며, 훈련 이후 여울목의 전투에서 했던 경험과 활약을 인정받아 중대장으로 임명받았다.
떠돌이였던 아치요는 여울목의 전투 직후, 에트와 모리츠의 배려로 트랑카벨 영지군의 군속이 되어 잡다한 일을 돕다가 정식으로 입대하게 되었다. 워낙에 마르고 팔다리가 길어 곤충 방아깨비가 생각나게 하던 실루엣은, 제법 말쑥하게 군복을 차려입은 지금도 티가 나서 절대로 잊지 못할 실루엣이다.
“저는 오늘부로 제21 카르카냑 보병 연대에 배속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신세를 지겠군. 나는 중대장이 되었다네. 함께 잘해보세. 그나저나, 드디어 출전인가?”
“저는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카르카냑의 사령부에서 훈련중이던 각 연대에 소집령을 내리신 것은 맞습니다.”
“오호, 그렇구만.”
막생은 사실 빨리 전장에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듭되는 훈련과 대기가 지겹다, 자신의 터전을 망쳐놓은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강해진 자신과 부대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비슷한 시기에 편성된 신편 연대인 제22 몽세나 보병 연대는 가장 서쪽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콘도티에레에게 불려가 서쪽 드 누아 영지에서 용감히 싸워 전공을 세웠다고 들었다. 솔직히 부러웠다.
이번에야말로 차례가 돌아왔다. 그와 같은 트랑카벨 출신이 아닌, 종교와 정치 문제로 고향을 잃은 블랑독 출신 난민들에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과거 그가 섬겼던 영주인 소베트르 드 랑두제 남작의 소식을 들었다. 놀랍게도, 자신이 탄압했던 정순파 주민들에게 사과하고 영주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고압적이던 인간이 그런 말을 했다니 믿기 힘들었지만, 트랑카벨 가문을 통해서 들어온 공식적인 메시지였다. 뭐 그렇다고 다시 랑두제로 돌아갈 생각은 없지만··· 참 씁쓸한 일이었다.
막생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까짓 종교가 뭐라고. 신을 섬기는 방식이 다르다고 사람을 고문하고 죽이려 드는 고귀한 개자식들보다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마을 주민들을 위해서 밤새 초원을 달려가 구원군을 요청했던 이 방아깨비 청년 아치요가 훨씬 숭고한 존재가 아니던가.
“아직 숙소가 정해지지 않았겠군,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면 우리 중대의 전령 숙소에 머물게.”
“감사합니다, 막생 경!”
두 사람은 함께 이동하기 시작한다. 이제 트랑카벨 영지군의 전 연대가 집결할 때까지 일주일, 남부 엘랑키아 최강의 야전군이 결성될 때까지 일주일 남았다.